[이 책이 대단하다!] 전인성을 향하여: 이승종의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
|
2
|
752
|
6월 10, 2023
|
"신화를 다루는 최근의 주요 저술들 중에는 철학자가 쓴 것은 하나도 없다."
|
|
3
|
852
|
5월 30, 2023
|
종교현상학으로 가는 여행을 위한 가장 좋은 안내자: 제임스 콕스, 『종교현상학으로의 안내』
|
|
5
|
639
|
5월 17, 2023
|
그리스도교 신학자 하이데거?!
|
|
0
|
519
|
5월 5, 2023
|
칭의론: 그리스도교의 정의론
|
|
5
|
858
|
3월 20, 2023
|
철학과 성서: 야스퍼스, 레비나스, 리쾨르
|
|
1
|
667
|
3월 3, 2023
|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
|
|
0
|
900
|
2월 10, 2023
|
나자렛의 몽키스패너: 예수 조폭설에 대하여
|
|
0
|
2465
|
1월 23, 2023
|
모든 문제를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종교관에 대한 단상
|
|
2
|
1656
|
12월 5, 2022
|
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 도대체 학술적 근거가 있는가?
|
|
0
|
3023
|
9월 30, 2022
|
이신건의 『어린이 신학』에 대한 단상
|
|
2
|
784
|
9월 6, 2022
|
약속으로서의 사랑: 언약신학을 통해 바라본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
|
|
2
|
606
|
7월 9, 2022
|
[오늘의 신학 특강] 키르케고르: 사상과 주요 개념(2)
|
|
0
|
495
|
2월 17, 2022
|
[오늘의 신학 특강] 키르케고르: 사상과 주요 개념(1)
|
|
1
|
739
|
2월 17, 2022
|
신앙은 철학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네 편에 대한 철학적 해설
|
|
1
|
2427
|
2월 15, 2022
|
[영상] 키에르케고어는 누구인가? (3)
|
|
0
|
827
|
12월 21, 2021
|
[영상] 키에르케고어는 누구인가? (2)
|
|
0
|
535
|
11월 29, 2021
|
[영상] 철학은 신과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가? (with 랜선교회 오승원, 유한철학회사 윤유석, 로고스서원 김희림)
|
|
0
|
1258
|
11월 15, 2021
|
[영상] 키에르케고어는 누구인가?
|
|
0
|
762
|
11월 11, 2021
|
[퍼온 글] 알빈 플란팅가, 「그리스도인 철학자들에게 드리는 고언」
|
|
4
|
1513
|
1월 26, 2021
|
어떠한 종교를 믿는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가?: 틸리히의 설교에 대한 비판
|
|
3
|
1490
|
12월 21, 2020
|
헤겔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
|
|
2
|
1882
|
12월 18, 2020
|
『대승기신론』에 대한 사견
|
|
1
|
1122
|
11월 20, 2020
|
'묵경'의 중요성 2 : 해명과 대답
|
|
2
|
1434
|
10월 11, 2020
|
틸리히 전기 종교철학
|
|
2
|
976
|
6월 19, 2020
|
에버하르트 융엘의 종교적 신학적 언어론
|
|
4
|
1256
|
6월 19, 2020
|
불교에 대한 개략적 설명
|
|
5
|
1551
|
6월 15, 2020
|
불교에 대한 개략적 설명 3
|
|
1
|
1135
|
6월 5, 2020
|
불교에 대한 개략적 설명 2
|
|
2
|
757
|
5월 30, 2020
|
삼위일체론의 해석학적 의의: 존재, 언어, 사유의 통일성(2)
|
|
4
|
989
|
5월 16,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