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 도대체 학술적 근거가 있는가?

(1) 요즘 커뮤니티, 유튜브, 페이스북에서 '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니네요. 이미 접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요지만 말씀드리자면, 제우스가 신화 속에서 바람둥이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사실 제우스 신전에서 고아들의 양육을 맡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제우스 신전이 일종의 복지시설로서 온갖 고아들을 양육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우스가 그 모든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 결과 제우스는 온갖 여자들에게서 자식을 낳은 '바람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는 거죠.

(2)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굉장히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주전공이 철학이기는 하지만, 저는 학부 시절에 서강대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주로 관심을 가지던 분야가 신화 이론이었거든요. 물론, 학부 수준의 지식으로 어디 가서 '전공자'라고 내세우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만, 적어도 제우스 신전이 보육원 같은 복지시설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은 (단순히 제가 접해보지 못한 '낯선' 주장일 뿐만 아니라) 제가 알고 있는 기존 지식들과 '상충하는' 주장이었습니다.

(3) 종교가 고아, 과부, 장애인, 이방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구제' 활동을 담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종교사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던 생각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고대 종교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구제 활동이 낯선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구제 활동에 대한 강조는 유대-그리스도교의 굉장히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오죽했으면, 4세기경에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 신전에 구제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죠. 하지만, 율리아누스의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구제의 의무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스-로마 종교에서는 너무나 전례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결국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죠. 노터데임 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게리 A. 앤더슨의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구제를 높이 평가했고, 이것을 초대교회가 물려받아, 로마 세계 전역에서도 유명해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에게 후히 베풀었다.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Julian(주후 4세기)는, 가난한 이들에게 이렇게 넉넉하게 베푸는 일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황제는 이에 대응하여 갈라디아지방에서 사역하던 이교도 사제 아르사키우스Arsacius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아르사키우스에게 '나그네들에게 베푸는 자선' 덕분에 기독교 운동이 얼마나 진전했는지 주목하라는 말로 시작했다. 율리아누스는 이렇게 썼다. "내 생각에, 우린는 정말로 진심으로 이러한 덕목을 하나하나 실천해야 하오. 또 그대만 실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소. 갈라디아에 있는 사제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해야 하오."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하라는 이러한 권고는 율리아누스에게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율리아누스의 새로운 요구 사항을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조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끄럽게 만들거나 설득해서 의를 행하게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사장직을 박탈하시오."

율리아누스는 구체적이기까지 했다. 모든 도시에 쉼터를 지으라고 명하고 황제의 금고에서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다. "매년 갈라디아지방 전체에 옥수수 3만 포대와 포도주 6만 병을 보내시오. 명하건대, 그 중 1/5은 사제들의 시중을 드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나그네와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황제는 왜 이러한 시도에 이토록 열의를 보였을까? 율리아누스가 바로 설명했다. "이 상황이 수치스럽기 때문이오. 유대인들은 아무도 구걸할 필요가 없고, 또 불경한 갈릴리 사람들[황제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용어]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가난한 이들도 도와주어, 우리 민족이 우리에게 도움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되니 말이오."

황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려는 일이 현대의 독자들에는 놀라울지 모른다. 로마 사회는 불우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완전히 귀를 막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 황제의 문제는,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먹여살리는 일이 국가가 담당할 의무였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만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이 종교적 의무였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언급하듯이, 이교 신전을 배급소로 바꾸려 한 율리아누스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제들에게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하듯 하라고 권했지만, 거의 혹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기반으로 삼을 교리적 바탕이나 전통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자선을 하나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신을 섬기는 바탕에 자선이 없었다. 이교도 신들은 윤리적 요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윤리적 행동을 벌하지 않았다. 신을 화나게 하는 경우는, 인간이 종교 의식의 규범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는 때뿐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종교와는 반대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지였다.

(게리 A. 앤더슨, 『죄의 역사』, 김명희 옮김, 비아토르, 2020, 31-33쪽.)

(4) 그래서 '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을 주장한 분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해석을 했는지 궁금해서 출처를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출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어 위키피디아, 구글 도서, 구글 스칼라에 '제우스'와 '고아'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는데도 자료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저 해석은 정말 '뇌피셜'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단 하나 조금 유사한 내용을 찾은 게 소위 노예 철학자로 잘 알려진 에픽테토스의 구절이네요. 에픽테토스는 제우스가 '모든 인류의 아버지'라는 사실로부터 누구도 고아가 아니라는 주장을 이끌어내거든요. 에드윈 A. 애벗이라는 영국 신학자의 책에 에픽테토스의 글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I noted with pleasure here the words, "He does not neglect the meanest of His creatures." To the same effect elsewhere, speaking of Zeus, he said, "In very truth, the universal frame of things is badly managed unless Zeus takes care of all His own citizens, in order that they may be blessed like unto Himself" A little before this, he said about Hercules, "He left his children behind him without a groan or regret—not as though he were leaving them orphans, for he knew that no man is an orphan," because Zeus is "Father of men." (E. A. Abbott, Silanus the Christian, C. Taylor & the Online Distributed Proofreading Team (eds.), 2018.)

나는 여기서 "그[제우스]는 그의 피조물 중 가장 초라한 것도 무시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기쁘게 주목하였다. 그[에픽테토스]는,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인상적으로, 제우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진실로, 만일 제우스가 자신의 시민들에게, 그들이 자신처럼 축복을 받도록,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물의 보편적 구조가 잘못 관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보다 조금 전에, 그는 헤라클레스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애통도 후회도 없이 뒤에 남겨두었다. 그가 그들을 고아들처럼 남겨두었던 것은 아닌데, 그는 어떠한 인간도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우스가 "인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애벗의 책에는 정확한 인용 표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래 1906년에 출판된 책이다 보니, 인용이 엄밀하지 않네요.) 발품을 팔아서 조사를 해 보니, 아마도 애벗이 인용한 것은 에픽테토스의 다음 구절인 것 같네요.

And he married also, when it seemed to him a proper occasion, and begot children, and left them without lamenting or regretting or leaving them as orphans; for he knew that no man is an orphan; but it is the father who takes care of all men always and continuously. For it was not as mere report that he had heard that Zeus is the father of men, for he thought that Zeus was his own father, and he called him so, and to him he looked when he was doing what he did. (Epictetus, Delphi Complete Works of Epictetus (ebook), G. Long & W. A. Oldfather (trans.), Hastings, East Sussex: Delphi Classics, 2018.)

그리고 그[헤라클레스]는 또한, 그가 보기에 적절한 때에, 결혼하였고, 아이들을 가졌고, 그들을 떠났다. 애통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고, 또는 그들을 고아처럼은 남겨두지 않고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인간도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아버지가 모든 인간을 항상 지속적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우스가 인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단순한 소문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우스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를 그렇게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이며, 그[헤라클레스]가 그의 일을 할 때 그[제우스]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5) 그렇지만 고대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에픽테토스의 구절을 근거로 '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을 뒷받침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에픽테토스는 1세기경에 살았던 스토아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미 (크세노파네스로부터 플라톤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그리스 신화 비판이 광범위하게 수행된 이후죠. 또 이러한 과정에서 '신'이라는 개념이 본래의 신화적 맥락에서 벗어나 우주의 보편적 질서나 원리로 추상화된 이후이고요. 그래서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제우스'가 그리스 신화가 말하는 제우스에 직접 대응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욱이, 이 구절은 제우스 신전이 보육원으로 이용되었다는 주장과는 완전히 무관하죠.

(6) 오히려 (제우스에 대해 조사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지만) '고아의 아버지'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보다도 유대-그리스도교의 야훼에게 훨씬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우스 신전이 보육원으로 이용되었다는 뇌피셜과는 달리, 중세의 교회가 고아를 돌보는 활동을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죠. 더군다나, 근대적인 고아 교육의 선구자인 페스탈로치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하여 활동했다는 것도 유명하고요. 현대철학에서는 레비나스나 데리다 같은 인물들이 성서에 나타난 고아와 과부에 대한 환대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타자 철학을 전개하였기도 하죠. 성서에서 야훼는 명시적으로 자신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고아들을 보호할 것을 명령하니까요.

주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학대와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께 의지합니다. 주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시편 10:14)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앞에서 크게 기뻐하여라. 그는 고아의 아버지, 과부를 돕는 재판관,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68:4-5)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셀라)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시편 82:1-3)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사야 1:17)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 (이사야 10:1-2)

(7) 그리고 이런 종교 사상이 실제로도 사회복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죠. 애초에 우리나라의 아동복지 역사는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현재도, (다소 오래된 자료이긴 하지만) 2009년 기준으로 전국 지역아동센터 3,013개 중 개신교가 운영하는 시설이 1,601개로 전체의 53.13%이기도 하고요(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09년 한국교회의 사회적섬김 보고서」, 2010, 8).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개신교'만 53.13%이니, 가톨릭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겠죠. 더군다나, 개신교나 가톨릭은 개별 교회에서 따로 법인 설립 없이 운영하는 센터들이 많아서 실제 비율은 이것보다 더 많으면 많았지 더 적지는 않을 겁니다.

(8)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냥, '고아의 아버지 제우스 썰'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로 답답해서 그럽니다. 한편으로는 근거 없는 신화 해석이 갑작스럽게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게 종교학도로서 빡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얕은 해석만 읽고서 "제우스 짱짱맨"하는 사람들이 정작 실제로 고아에 대한 환대를 강조하고 복지 사업도 광범위하게 수행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이유 없는 반감을 가지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빡치기도(?) 해서요.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한풀이 좀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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