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분과 같이 운영하는 기독교 철학 채널에 키에르케고어를 소개하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1. 키에르케고어와의 만남
키에르케고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내가 ‘키에르케고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에 윤리와 사상 과목을 공부하면서였다. 그 시절에 나는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객관적, 보편적,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신앙의 진리는 과학이나 철학의 증명을 통해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 보았던 키에르케고어는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전통적 진리 개념을 깨부수는 인물이었다.
2.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진리
키에르케고어는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진리”라는 개념과 “주체성이 진리다.”라는 논제를 제시하면서 기존 진리 개념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추구할 만한 대상이란, 곧 인생에서 정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란, 결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는 비판이었다. 가령, 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는 매일 같이 대학 입시 문제를 고민해야했다. 온갖 입시 사이트에서는 다양한 차트를 제시하면서 수능 점수에 따라 내가 어떤 대학을 상향/하향 지원할 수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객관적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무엇이 나에게 최선의 선택일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 지식 자체가 나에게 “너는 A라는 대학을 가야 해!”라거나 “너는 B라는 대학을 가야 해!”라고 결정을 내려주지는 못하였다. 객관적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선택의 문제는 매 순간 나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선택은 나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였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진리’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한 대상이다. 즉,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도출될 수도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믿고 따르면서 내 삶을 던져보기로 선택한 대상이야 말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설령, 그 선택이 객관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내가 결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은 내가 따르기로 주체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진리’라는 것이다.
3. 실존이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은 흔히 ‘실존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실존’이란 우리가 매 순간 무엇을 진리로 믿고 따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표현한 용어이다. 즉, 우리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에 직면한다. 사소하게는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 따위를 선택해야 한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간다면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업을 할 것인지 개인 사업을 할 것인지 따위를 선택해야 한다. 그 뒤에도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누구와 언제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선택은 객관적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바로 이렇게 매 순간 선택에 직면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존재가 ‘실존’이다.
4.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어는 실존을 크게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하였다. 눈앞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실존, 도덕을 추구하는 실존, 신앙을 추구하는 실존으로 실존의 단계를 나눈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키에르케고어를 대표하는 논의이자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논의로서 흔히 ‘실존의 3단계’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 주로 소개되었던 것도 실존의 3단계였다.) 그런데 실존의 3단계는 유명한 만큼이나 자주 오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키에르케고어의 구분을 일종의 인간학적 혹은 인류학적 발전 단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은 자기 삶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심미적 실존으로부터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해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실존의 3단계를 이렇게 이해하면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이 지닌 논점이 흐려지기 쉽다. (가령, “실존의 3단계는 인류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왜 실존이 2단계나 4단계가 아닌 3단계로 구분되어야 하는가?”, “종교적 실존이 반드시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거쳐야만 도달될 수 있는 단계인가?”처럼 핵심에서 벗어난 의문들이 생기기 쉽다.) 오히려 실존의 3단계는 ‘법’을 따른다는 것과 ‘법’을 넘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논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키에르케고어는 법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법을 따르지 않는 삶’인 심미적 실존과 ‘법을 따르는 삶’인 윤리적 실존을 대조하고, 법을 넘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법을 따르는 삶’인 윤리적 실존과 ‘법을 넘어선 삶’인 종교적 실존을 대조하는 것이다. (전자의 대조가 잘 나타나는 책이 『이것이냐/저것이냐』이고, 후자의 대조가 잘 나타나는 책이 『공포와 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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