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종교이고, 어떤 현상학인가?: 20세기 종교현상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

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종교학에서 종교현상학이 지닌 지위는 다소 초라하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종교현상학은 종교학 자체를 주도하는 분야였다. ‘종교학’과 ‘종교현상학’을 마치 동의어인 것처럼 사용하는 텍스트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종교현상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엘리아데가 활약했던 1950-1970년대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다. 특별히, ‘종교현상학’이라는 분야의 방법론을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의 흐름이 이러한 쇠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본고는 종교현상학에 제기된 그동안의 주요한 비판들이 과연 어디까지 정당하고 어디부터 정당하지 않은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본고는 우선 엘리아데의 연구를 범례로 삼아 20세기 종교현상학에서 이루어진 기존 논의들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할 것이다(Ⅱ-Ⅲ). 다음으로, 종교현상학에 대해 ‘현상학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와 ‘종교 연구’라는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를 각각 소개할 것이다(Ⅳ-Ⅴ). 마지막으로, 종교현상학이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유형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Ⅵ).

Ⅱ.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서 종교현상학

종교현상학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을 과연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지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현상학’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조차 뚜렷한 합의를 찾기 힘들다. 특별히, 철학적 현상학보다도 종교현상학이 먼저 정립되었다는 사실이 혼란의 주된 원인이다. 즉, ‘종교현상학’이라는 명칭은 1887년에 드 라 소세이(P. D. C. de la Saussaye)를 통해 처음 제시되었고, ‘현상학’이라는 철학의 분야는 1900년 이후에 후설(E. Husserl)을 통해 점차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물론, 두 인물 이전에도 헤겔(G. W. F. Hegel)이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중요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두 인물을 통해 ‘종교현상학’과 ‘현상학’이라는 각각의 개념이 현대적 의미를 얻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현상학’에 앞서 ‘종교현상학’이 이미 존재하였다는 이러한 역설이 종교학 진영과 철학 진영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일으킨다는 점에 있다. 종교학 진영에서는 종교현상학만의 독자적 성격을 내세워 종교현상학과 철학적 현상학을 구분하고자 하고, 철학 진영에서는 철학적 현상학의 보편적 성격을 내세워 종교현상학을 철학적 현상학으로 포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1


샹트피 드 라 소세이 / 에드문트 후설

그러나 종교현상학과 철학적 현상학이 종종 갈등하더라도 두 분야는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만큼은 일치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phenomenon)’이 다른 근본적인 층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명칭에 충실하다. 즉, 종교현상학은 종교적 체험, 교리, 제의 등을 경제나 정치의 논리로 해석하려는 입장에 반대하여 종교만이 지닌 고유성을 해명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현상학은 우리에게 개시되는 다양한 진리 영역을 자연과학의 기준만으로 분석하려는 입장에 반대하여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돌아가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두 분야가 어떠한 입장을 논적으로 삼아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는지를 살피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 가령,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 K. Merton)이 호피 인디언들의 기우제에 대해 제시한 분석은 현상학이 극복하고자 하는 환원주의적 연구의 전형이다. 그의 연구는 기우제가 비를 부르는 ‘표면적 기능(manifest function)’ 뒤편에 부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잠재적 기능(latent function)’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한다(Merton, 1968: 118 참고). 즉, 기우제는 겉보기에는 비를 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는 것 같더라도, 실제로는 가뭄이라는 위기에 맞서 인디언 사회가 붕괴되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부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소망을 이루고자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부족원들은 기우제가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지닌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잠재적 기능은 오직 기우제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사회학자에게 발견될 뿐이다. ‘기우제’라는 현상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적 통합’이라는 잠재적 기능으로 환원되고, 그 잠재적 기능은 ‘사회학자’라는 외부자의 관점에서 분석되며, 그 외부자의 관점은 ‘부족원’이라는 내부자의 관점에 비해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현상학은 사태를 미리 상정된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환원주의적 연구를 거부한다. 특정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사태를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선입견을 받아들인 상태에서는 정작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현상이 무엇인지가 망각되고 만다. 따라서 현상학은 ‘판단중지(epoche)’ 혹은 ‘괄호치기(bracketing)’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지닌 선입견을 보류시키고자 한다. 가령, 호피 인디언들의 기우제를 현상학자가 탐구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현상학자는 기우제가 정말로 기상 현상을 변화시키는 마술적 힘을 지니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기우제가 인디언들의 미신적 주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지도 않는다. 그는 기우제가 겉으로 드러난 기능 뒤편에 숨겨진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는 기우제에 대한 선입견을 보류한 상태로 자신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자 할 뿐이다. 인디언 부족장은 기우제에서 어떠한 기도를 드리는지, 부족원들은 어떠한 노래를 부르는지, 어떠한 제물이 신에게 바쳐지는지, 제의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는지 등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이 단순히 잡다한 민족지적 사실을 기술하는 작업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의 탐구는 주어진 현상에서 우리가 자주 놓치고 지나가버리는 본질을 포착해내고자 한다. 여기서 ‘본질(essence)’이란 사태에서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하는 특징적 요소이다. 가령, 호피 인디언들의 기우제가 오랜 세월동안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고 해보자. 각각의 기우제를 구성하는 세부적 요소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른다. 기우제를 집행하는 부족장이 달라질 수도 있고, 기우제에 참여하는 부족원들의 인원도 달라질 수 있고, 기우제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의 종류도 달라질 수 있다. 현상학자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요소가 있는지를 살핀다. 기우제의 기도문이 오랜 변화에도 항상 중요하게 유지될 경우, 그는 바로 그 기도문을 기우제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포착해낸다. 기우제의 의례 순서가 항상 중요하게 유지될 경우, 그는 바로 그 의례 순서를 기우제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포착해낸다. 따라서 현상학자가 주목하는 특징적 요소란 결코 현상 뒤편에 숨겨져 있는 신비적 대상 따위가 아니다. 현상은 매 순간 자신이 지닌 특징적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동안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 지나친 요소가 그 현상에서 ‘특징적’이라는 사실이 현상학을 통해 새롭게 강조될 뿐이다.



루돌프 오토 / 게라르두스 반 델 레에우
미르치아 엘리아데 / 윌프리드 캔트웰 스미스

종교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태 속에 언제나 드러나 있는 종교의 본질에 주목하고자 한다. 종교의 본질을 현상 뒤편에서 발견하려는 태도는 종교현상학에서 우선 제재를 받는다. 종교적 체험이 단순한 두뇌의 환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지, 종교적 교리가 과학적으로 거짓은 아닌지, 종교적 제의가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같은 질문은 적어도 ‘종교’라는 사태에 대한 접근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종교적 체험, 교리, 제의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무엇인지가 종교현상학이 고민하는 문제이다. 물론, 종교현상학자들마다 종교의 본질로 제시하는 요소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가령, 오토(R. Otto)는 ‘두려운 신비’와 ‘매혹적 신비’라는 감정을, 반 델 레에우(G. van der Leeuw)는 ‘힘’에 대한 숭배를, 엘리아데(M. Eliade)는 ‘원형의 반복’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스미스(W. C. Smith)는 종교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자신의 결론으로 도출하기도 한다. 각각의 입장들 중 무엇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적절한 기술인지는 연구자들의 평가에 맡겨져 있다.

Ⅲ. 성현의 구조에 대한 탐구로서 종교현상학

20세기에 종교현상학에서 등장한 수많은 논의들 중에서도 엘리아데의 연구는 그 시대 전체의 학문적 경향을 대표하는 범례로 삼기에 적절하다. 이전의 모든 종교현상학이 엘리아데로 모여들고, 이후의 모든 종교학이 엘리아데로부터 다시 새롭게 갈라져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엘리아데는 오토와 반 델 레에우 등 20세기 초반 종교현상학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물려받아 종교에 대한 자신만의 거대한 사유를 전개한 인물이었다. 그의 종교현상학은 20세기 후반 종교학 전체의 흐름을 규정하였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다. 종교현상학의 지위가 약화된 오늘날까지도 알렌(D. Allen)과 도니거(W. Doniger) 등 엘리아데를 계승하는 주요한 인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심지어 링컨(B. Lincoln), 스미스(J. Z. Smith), 시걸(R. A. Segal), 스트렌스키(I. Strenski) 등 종교현상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종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인물들조차 자신들의 논의가 지닌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엘리아데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스러움(sacredness)’ 혹은 ‘거룩(holiness)’라는 현상을 탐구한다. 그의 연구는 고대 근동 문헌으로부터 인도-유럽 신화를 지나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참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단순히 종교의 본질에 대한 가치중립적 기술만을 위해 제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이 개인의 내면과 집단의 생활에서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지를 강조하여 현대인의 삶 속에 신화와 상징의 의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표가 엘리아데가 종교현상학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의 종교현상학이 지닌 특징을 ‘반환원주의’, ‘종교사’, ‘원형의 반복’, ‘성과 속’, ‘종교적 인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요약해 보자.

반환원주의: “현상을 만드는 것은 바로 잣대이다.”라는 문장은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을 위한 모토이다. 엘리아데는 우리가 어떠한 잣대(scale)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현상이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는지가 달라진다고 지적한다. 가령, 코끼리를 현미경으로 바라볼 때와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파악하는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미경에서는 ‘코끼리’라는 대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현미경이 코끼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자세하게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동물학의 현상으로서 코끼리를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를 다룰 때에도 이러한 ‘잣대’의 문제가 중요하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상정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철학적 논리를 잣대로 삼아 종교를 평가하려는 태도는 자칫 ‘종교’라는 현상을 전혀 보지 못하게 할 위험을 지닌다.2 종교를 종교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맞는 잣대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 종교현상은 그 자체의 고유한 차원에서 파악되었을 때만, 즉 종교적인 것으로서 연구되었을 때만 인식될 수 있다.”(Eliade, 1958: xi/45)

종교사: 엘리아데는 자신의 연구를 ‘종교현상학(phenomenology of religion)’이라는 용어보다는 ‘종교사(history of religion)’라는 용어로 명명하기를 선호하였다.3 그는 종교의 본질을 다루기 위해 역사적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성스러움이란 언제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 특정한 사건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결코 성스러움 자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단지 개별적 사물이나 인격을 통해 성스러움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형상화하여 체험할 뿐이다. “성스러운 것의 모든 현현은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일어난다(Eliade, 1958: 2/55). 가령, 가톨릭 교인들에게 성상이나 성물은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 매개체이다. 그들은 이러한 매개체 속에서 ‘성현(hierophany, 성스러움의 현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무런 매개체도 없는 상태에서는 성스러움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스러움에 대한 분석은 결국 성스러운 인격, 사물, 사건에 대한 기술을 통해 성립한다. 종교현상학은 역사 속에서 무엇이 성스러운 것으로 숭배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성스러움을 해명하고자 해야 한다.

원형의 반복: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아득한 옛날에(in illo tempore)’ 신들이나 영웅들이 이루어낸 위대한 일들과 관련시켰다. 가령, 고대인들은 도시나 사원을 건축하면서 자신들이 천상의 신들의 영역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고대인들은 결혼이나 장례나 제사를 진행하면서도 자시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신년축제와 같은 행사도 태초에 신들이 세상을 창조하던 일화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고대인들은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에 일종의 ‘원형(archetype)’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원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신들이나 영웅들처럼 위대한 일들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야생인의 행위 대부분은 […] 신적 존재나 신화적 인물이 태초에 성취한 원초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Eliade, 1958: 33/92) ‘성스러운’ 것이란 바로 원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의미하였다. 신들과 영웅들이 만든 원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사태는 놀랍고, 뛰어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세속적인 사태와는 구별되었던 것이다.

성과 속: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이라는 범주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 들어가야 하는지가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대와 문화는 다르더라도 세계의 종교와 신화에서는 몇 가지 상징이 보편적으로 강조되기는 한다. 가령,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우주산(cosmic mountain)’,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우주목(cosmic tree)’, 천상의 도시를 지상에서 반복하고 있는 ‘성역(sacred ground)’ 등이 종교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중요한 상징이다. 그러나 산이나 나무나 땅 같은 특수한 요소만이 성현의 상징으로 분류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물이나 사건은 원형을 실현하고 있는 한에서 얼마든지 성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현을 심리적, 경제적, 정신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곧 절대적으로 모든 곳에서 인식하는 데 익숙해 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 어느 시점에 어디에서도 성현으로 변모한 적 없는 어떠한 것(대상, 운동, 심리기능, 존재, 게임조차도)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Eliade, 1958: 11/65) 즉, 고대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성현을 발견해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원형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영역을 성스럽게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에게는 온 세상이 의미, 경이, 기적, 권능으로 충만하였다.

종교적 인간: 엘리아데의 연구는 단순히 신화와 종교에 대한 자료 나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연구는 고대인들이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서 지니고 있던 감수성을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현대인들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성현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인과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무의미한 기계부품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의미도 없고, 경이도 없고, 기적도 없고, 권능도 없다. 우연히 발생해서 우연히 사라지는 입자들의 이합집산만 존재할 뿐이다. 회의주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대의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가 신화와 종교에 나타난 고대 존재론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울만한 통찰이 있다는 것이 엘리아데가 자신의 종교현상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고대인은 오직 역사의 측면에서만 스스로를 창조적이라고 여기는 현대인보다 자신이 좀 더 창조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즉, 고대인들은 더없이 창조적인 행위인 우주 발생의 반복에 해마다 참여한다. 주기적인 우주 발생을 모방하고 그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얼마 동안 우주적인 수준에서 “창조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전통적인 지평 안에 속해 있는 동방의 철학과 수행 기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도의 철학과 기법들이 갖는 “창조론적인” 함의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실존주의”(즉 “고통”을 모든 우주적 조건의 상황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동방은 존재물의 존재론적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을 한결같이 거부한다. 동방은 인간 존재의 운명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Eliade, 1971: 158-159/159)

Ⅳ. 종교‘현상학’에 대한 비판

20세기 종교현상학은 엘리아데의 연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주로 성스러움의 체험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현상학자들은 인간이 성스러움과 직면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행하는지를 왜곡 없이 기술해내는 작업을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단순히 신앙인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주관적 심상에 대한 심리적 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스러움에 대한 접근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문화적 성찰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종교현상학은 기본적으로 종교사에서 등장한 서로 다른 신화와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의 형식을 취하였다. 각각의 신화와 종교로부터 ‘성스러운 것’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성스러움’ 자체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동안의 종교현상학을 이끌었다. 종교의 본질이 바로 성스러움의 체험에 있다는 생각이 종교현상학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것이다.


브루스 링컨

그러나 성스러움의 체험에 주목하고자 하는 종교현상학의 작업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였다. 1960년대 이후 지성계는 ‘체험’에 대한 기술을 점차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를 통해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구조주의적’ 연구 방법이 사람들의 관심을 체험으로부터 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우리가 체험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그려내는 활동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철학과 종교학 모두에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철학에서 후설의 철학적 현상학이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한 것처럼 종교학에서도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철학에서는 바르트(R. Barthes), 알튀세르(L. Althusser), 푸코(M. Foucault) 등이 새롭게 명성을 얻게 되었고, 종교학에서는 그들의 사상을 수용하여 종교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분석한 링컨(B. Lincoln)과 스미스(J. Z. Smith) 등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상학 비판’이라는 맥락으로부터 종교현상학에 제기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종교현상학조차 환원주의적이다: 오늘날에는 과연 종교에 대한 반환원주의적 접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연구자들이 많다. 그들은 반환원주의를 표방한 그동안의 종교현상학이 실제로는 성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환원주의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모든 종류의 담론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현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주제를 제시하고, 개념을 만들고, 문제를 분류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태를 연구자 자신의 틀에 따라 해석하는 활동이다. 종교현상학 역시 아무리 성스러움의 체험이라는 사태에 있는 그대로 접근하려 하더라도 이러한 활동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 가령, 수없이 많은 신화와 종교 중에서 종교현상학자가 성스러움의 체험을 기술하기 위해 어떠한 자료들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결코 그 자료들로부터 내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심지어 유가나 도가 같은 동양사상을 ‘종교’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혹은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에 대한 기록을 ‘신화’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 등 종교학의 근본적인 질문들 앞에서는 사태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구호가 공허해지기만 할 뿐이다. 어떠한 환원주의적 관점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스러움의 체험에 대한 연구를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4

이러한 문제제기는 종교현상학의 신학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종교현상학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단히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종교현상학의 창시자인 드 라 소세이부터, 20세기 초반의 오토와 반 델 레에우를 거쳐, 20세기 후반의 스미스에 이르기까지, 종교현상학을 대표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타종교로 확장시키기 위해 현상학의 방법을 도입하였다.5 문제는 그들이 그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의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하였다는 사실이다. 타종교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훨씬 치밀하게 이루어진 오늘날에는 과연 ‘종교’라는 이름 아래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상이한 전통들을 포괄하는 것이 가능한지가 의문시될 정도로 종교의 본질에 대한 논의 자체가 토대를 잃어가고 있다.6 적어도 종교현상학에서 그동안 종교의 본질로 제시한 대다수의 요소가 우리 시대의 기준에서는 더 이상 모든 종교에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종교의 본질로 강조된 요소 중 상당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적 요소를 타종교에 적용한 결과였던 것으로 드러났다.7

(2) 종교현상학은 탈맥락적이다: 종교현상학이 종교를 지나치게 탈맥락적으로 다루고자 한다고 비판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종교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의 실천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문제로 제기한다. 즉, 종교현상학에서 정말로 중요한 요소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보존되는 성스러움의 체험이다. 물론, 종교현상학이 이러한 성스러움의 체험을 다루기 위해 종교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상징, 신화, 경전, 교의, 제의 등을 참고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자료들은 ‘성스러움의 체험’이라는 추상화된 본질을 도출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한에서 제한적으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8 일단 ‘성스러움의 체험’이 무엇인지가 이론을 통해 체계화된 상황에서는 그 자료들이 더 이상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가령, 그리스도인이 성찬식에서 어떠한 기도문을 읽고, 어떠한 찬송을 부르고, 어떠한 고백을 하는지 같은 개별적 사실은 종교현상학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찬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만찬이라는 원형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종교현상학에서 기술된 ‘종교’라는 사태는 마치 내용이 빠진 공허한 형식과도 같다. 종교현상학은 사태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자신의 구호가 무색하게도 정작 각각의 종교가 지닌 세부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9

성스러움의 체험에만 주목하는 20세기 종교현상학의 경향은 종교에서 실제로 강조되고 있는 사태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종교의 모든 교리나 제의가 ‘체험’의 문제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유대교의 쉐마나, 그리스도교의 사도신경이나, 이슬람의 샤하다는 각각의 종교들이 지닌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들이면서도 어떠한 ‘체험’을 불러일으키길 의도하고 작성된 것이 아니다. 그 고백들은 인간을 압도하는 신적 권능의 두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고,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위대한 일들을 회상하도록 자극하고 있지도 않고,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심미적 문체로 쓰여 있지도 않다. 성스러움의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그 신앙고백들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각각의 종교들이 강조하고 있는 논점을 흐리게 만들 뿐이다. 오히려 각각의 종교들은 그 고백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신앙인이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앙인이 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고백들을 통해 제기되는 진정한 문제이다.

Ⅴ. ‘종교’현상학에 대한 비판

20세기 종교현상학은 엘리아데의 연구가 지향한 것처럼 일종의 ‘거대 담론(metadiscourse)’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종교현상학자들이 종교사 전체를 논의의 범위로 삼아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본질에 도달하려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현상학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주로 종교들 사이의 동일성과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각각의 종교를 통해 나 있는 길들이 결국 같은 실재를 가리켜 보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종교현상학을 가능하게 한 암묵적 가정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형성된 신화와 종교가 활발하게 비교되었다. 가령, 엘리아데의 연구에서는 폴리네시아의 ‘터부’나 ‘마나’가 고대인들의 주술적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이 천공신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 기도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모든 종교가 힌두교의 범아일여에 대응하는 사상을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Eliade, 1958: 19-23/74-81; 38/94; 459-460/572-574 참고).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일반화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그동안 누적된 수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역사학적, 문헌학적 연구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사이에 환원되기 어려운 차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애초에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이 ‘종교’인지조차 주어진 자료를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지적되었다. 따라서 동일성과 보편성을 찾기 위해 이루어지는 종교 연구는 더 이상 신뢰를 얻기 힘들어졌다. 20세기 이후 비교종교학에서는 비교가 동일성을 찾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공리처럼 자리 잡았다.10 또한 비교가 종교들을 서로 대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11 수많은 자료를 탈맥락적으로 인용하여 종교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점점 더 의심받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 연구’의 맥락으로부터 종교현상학에 제기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조너선 스미스

(1) 종교현상학은 자료를 왜곡한다: 스미스(J. Z. Smith)는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범바빌로니아 학파의 해석을 다른 모든 신화와 종교로 무리하게 확장시켰다고 비판한다. 특별히,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칠파 부족 신화를 엘리아데가 자신의 주저인 『성과 속』에서 인용하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12 칠파 부족 신화는 그 지역의 돌들과 언덕들이 지닌 지형적 특징에 대한 원인론을 제공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칠파 부족 신화를 성현의 구조에 대한 자신의 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본래의 텍스트를 대단히 자의적으로 요약한다. 고대 근동 문헌을 ‘우주 산’이라는 중심 상징을 통해 해석하고자 하는 범바빌로니아 학파의 이론이 칠파 부족 신화에 대한 엘리아데의 해석에서 무비판적으로 도입되기 때문이다. 가령, 칠파 신화에 등장하는 ‘눔바쿨라’라는 단어는 ‘원주민 조상’을 가리키는 본래의 집합 명칭에서 ‘지고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으로 바뀌어버린다. 텍스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우주 축’이라는 개념이 마치 칠파 부족 신화를 해설하기 위한 열쇠인 것처럼 사용되기도 하다. 신화 속 사건들의 인과관계 역시 엘리아데의 편의에 따라 뒤바뀌어버리기도 한다.

모든 신화에서 ‘세계산’이나 ‘세계수’ 같은 중심 상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정은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심 상징에 대한 강조는 고대 근동 문헌의 특징이다. “나는 자리에 대한 그러한 이해가 종교사 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기둥(혹은 세계수나 산)이 때때로 그러한 연결의 역할을 하는 전통들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칠파 신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Smith, 2009: 40) 심지어 고대 근동 문헌에서조차 범바빌로니아 학파가 상정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중심 상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범바빌로니아 학파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연구는 고대 근동 문헌으로부터 ‘세계산’과 같은 요소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시도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은 우주론적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심’이라는 언어는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것이고 이차적으로만 우주론적인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왕의 기능이라는 고대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어떤 특정 전통에서든 그것은 우주론적이고 우주 창생적인 신화와 연결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Smith, 2009: 51)

(2) 종교현상학은 자료를 해명하지 못한다: 젠슨(P. P. Jenson)은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 구약성서의 P 문서(the priestly writing, 제사장 문서)에 나타나는 ‘성/속’과 ‘정결/부정’의 구도를 해명하는 작업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P 문서에서는 성스러움이 ‘체험’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신화’와 연관을 맺고 있지도 않다. 고대인들이 ‘아득한 옛날에’ 신들과 영웅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성현을 체험하고자 하였다는 엘리아데의 주장은 적어도 P 문서가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는 잘 맞지 않는다. “[…] 신성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엘리아데의 고찰 가운데 많은 점들이 수많은 성과를 내고, 또 많은 시사점들을 제시한 반면, P에 적용하기에 그의 분석은 너무 단조롭고 일반적이다. 제사장의 율법들과 제도들은 신성함과 세속이란 단순한 이원론보다 더 섬세하게 공간에 대한 등급화를 다루고 있다. 더욱이 제사장이 제시하는 제의는 전반적으로 신화적 모티브로부터 자유롭다.”(Jenson, 2020: 57) 이러한 한계는 엘리아데의 연구에 있어 대단히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P 문서는 구약성서에서도 ‘성스러움’ 혹은 ‘거룩’에 대한 구절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성스러움과 관련된 다른 주변적 구절들은 해명하면서도 정작 가장 핵심적 구절들은 해명하지 못하는 연구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P 문서에서 ‘성스러움’이란 세계의 질서를 ‘등급’ 혹은 ‘스펙트럼’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범주들 중 하나이다. 즉, 고대 이스라엘인들 정상적 상태에 있는 사물을 ‘정결한(טהור, 타호르)’ 것이라고 불렀고,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사물을 ‘부정한(טמא, 타메)’ 것이라고 불렀다. 또한 정상적 사물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물로 구분된 것들을 ‘성스러운(קדש, 카도쉬)’ 것들이라고 불렀고, 그 이외의 정결하거나 부정한 사물들은 ‘속된(חל, 홀)’ 것들이라고 불렀다. “‘거룩’이 하나님의 존재 또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에 속한 것으로 정의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이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진술 또는 하나님의 제의적 현존에 대한 근접성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Jenson, 2020: 64) 따라서 ‘성/속’과 ‘정결/부정’이란 대상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닌 소속이나 지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상이 ‘성/속’과 ‘정결/부정’에서 어떠한 범주에 포함되는지에 따라 그 대상이 어떠한 제의법과 금기로 관리되어야 하는지가 규정된다.

Ⅵ. 종교의 유형에 대한 탐구로서 종교현상학

종교현상학에 대해 ‘현상학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와 ‘종교 연구’의 맥락에서 제시된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가지 문제는 종교현상학이 과연 오늘날 비교종교학에 적용되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한지를 의문시하고 있다. 즉, (a) 종교현상학은 환원주의적이고 탈맥락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성스러움의 체험을 순수하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종교현상학이 자신의 이론적 전제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거나 종교의 구체적 요소들을 간과하도록 만든다. 또한 (b) 종교현상학은 그 방법을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여 왜곡되고 부적절한 해석을 낳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신화와 종교의 자료는 20세기 종교현상학의 담론에서 심각하게 왜곡되었거나 불충분하게 해명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종교현상학에 제기된 두 가지 문제가 오늘날 비교 연구에서 종교현상학 자체를 근본적으로 포기하도록 할 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엘리아데의 연구로 대표되는 20세기 종교현상학이 종교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보여주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스러움의 체험’이란 종교현상학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우리는 종교현상학이 반드시 ‘성스러움의 체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미리부터 가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종교사’ 역시 종교현상학이 수행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층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우리는 종교현상학이 언제나 세계의 모든 신화와 종교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청할 필요가 없다. 종교현상학은 단지 주어진 신화와 종교의 자료에서 무엇이 특징적 요소인지를 포착해내는 활동이다. 종교현상학이 발견해내야 하는 ‘특징적 요소’가 반드시 성스러움의 체험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현상학이 사용해야 하는 ‘자료’가 반드시 종교사 전체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20세기 종교현상학에 제시된 비판들이 어디까지 정당하고 어디부터 정당하지 않은지를 규정하기 위해 중요하다. 즉,

―‘현상학 비판’의 맥락에서 20세기 종교현상학에 대해 제기된 문제는 다소 과장되어 있다. 물론, 종교현상학조차 특정한 관점을 전제한 상태로 이루어지는 환원주의적 담론이라는 지적은 적절하다. 또한 성스러움의 체험에 대한 종교현상학의 관심이 종교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실천을 간과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우려 역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종교현상학이 그동안 비교 연구에서 제시한 논의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토, 반 델 레에우, 엘리아데 같은 종교현상학자들이 특정한 관점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종교의 특징적 요소를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가령, 호피 인디언의 기우제에서 ‘춤’을 특징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연구자와 ‘노래’를 특징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해보자. 두 인물은 분명히 서로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춤’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자는 ‘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고, ‘노래’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자는 ‘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심의 차이가 호피 인디언의 기우제에 대한 두 연구자의 현상학적 기술에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두 인물의 현상학적 기술이 적절한 이상 ‘노래’와 ‘춤’은 모두 호피 인디언 기우제를 구성하는 특징적 요소라고 얼마든지 이야기될 수 있다.

―‘종교 연구’의 맥락에서 20세기 종교현상학에 대해 제기된 문제는 정당하다. 적어도 종교현상학이 유의미한 담론으로 남기 위해서는 실증적 연구에 근거하여 논의의 범위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즉, 종교사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 담론은 오늘날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여겨질 수 없다. 종교현상학을 통해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여 종교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 시대의 엄밀한 실증적 연구를 견뎌내기가 힘들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자료를 비교하는 작업에 종교현상학을 사용하고자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연구에서도 종교들 사이의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현상학적으로 기술하고자 해야 한다. 가령, 전세계에 홍수 신화가 퍼져 있다고 하더라도 시대와 문화를 무시하고서 서로 다른 홍수 신화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해서는 안 된다.13 우선, 지우수드라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창세기처럼 서로 분명한 영향을 주고받은 홍수 신화들을 그렇지 않은 홍수 신화들로부터 구분해내어 비교의 맥락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각각의 홍수 신화들 사이의 구조적 차이와 내용적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현상학적 기술이 수행되어야 한다. 고대 근동의 홍수 신화들은 실제로 신관, 인간관, 자연관 등에서 서로 대단히 많은 차이를 지닌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14 그들 사이의 차이를 잘 체계화하여 각각의 홍수 신화가 어떠한 특징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는 활동이 ‘홍수 신화에 대한 종교현상학’이 될 것이다.

따라서 종교현상학에 제기된 비판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종교현상학에서 제시된 담론들을 근본적으로 유지하는 입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성스러움의 체험을 기술하고자 한 종교현상학자들의 작업이 완전히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신화와 종교에서는 엘리아데가 주장한 것처럼 원형의 반복이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모든’ 신화와 종교에서 원형의 반복이라는 주제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비약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종교현상학에서 제시된 주장들의 의의를 조정하는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 즉, 종교현상학의 기존 논의들은 종교의 개별적 측면을 마치 종교의 보편적 ‘본질’인 것처럼 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종교현상학이 제시한 통찰들이 특수한 유형의 신화와 종교에 대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신화와 종교를 유형에 따라 분류하여 그들이 지닌 특징적 요소를 포착해내는 작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현상학을 ‘종교의 본질(essence of religion)’에 대한 탐구에서 ‘종교의 유형(types of religions)’에 대한 탐구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다.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종교의 본질을 찾으려는 작업이란 더 이상 정당성을 얻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애초에 ‘종교의 본질’이란 대단히 자의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성립한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가 지닌 특징적 요소를 포착해내는 작업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종교들이 속한 각각의 유형으로부터 각각의 특징적 요소를 도출해내는 작업만으로도 종교현상학은 얼마든지 성립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종교이고 어떤 현상학인가?”라는 물음이다. 즉,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일한 현상학적 기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유형마다 각각의 ‘종교들’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각각의 종교들마다 각각의 ‘현상학들’이 존재할 뿐이다. ‘종교현상학’이란 서로 다른 유형의 종교들을 대상으로 삼아 서로 다른 방식의 현상학들을 적용하는 가족유사적 작업의 총칭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1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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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son, P. P. (2020) 『거룩의 등급』, 김한성 옮김, 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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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der Leeuw, G. (1995) 『종교현상학 입문』, 손봉호·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1. 종교현상학과 철학적 현상학의 차이를 지적하는 입장으로는 Smart(2000), 34쪽, Strenski(2008), 211-217쪽, 최정화(2019), 14-15쪽을 참고하라. 두 현상학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입장으로는 Husserl(1981), 25쪽, van der Leeuw(1995), 18-32쪽, Cox(2006), 9-33쪽을 참고하라. 각각의 입장을 포괄하여 종교현상학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소개하는 글로는 안신(2008), 29-34쪽이 있다.

  2. 엘리아데의 이러한 반환원주의적 태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글로는 Allen(2008), 제1장을 참고하라.

  3. 엘리아데의 작업을 ‘종교현상학’이 아니라 ‘종교사’라고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를 종교현상학자로 보는 평가는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종교사’와 ‘종교현상학’이라는 엘리아데의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는 Cox(2006), 183쪽을 참고하라.

  4. 종교현상학조차 결국 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주장들에 대한 개괄적 소개와 비판적 논평으로는 Allen(2008), 제2장을 참고하라.

  5. 엘리아데의 연구 역시 ‘우주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개인적 신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엘리아데의 연구와 그의 신앙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논의로는 Allen(2008), 185-194쪽을 참고하라.

  6. ‘종교’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등장한 삶과 전통을 포괄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으로는 Smith (1991)을 참고하라.

  7. 종교현상학의 신학적 성격에 대한 더욱 자세한 비판으로는 Cox(2006), 215-225쪽을 참고하라.

  8. 특별히, 엘리아데의 반역사적 태도에 대한 논의로는 Strenski(2008), 196-202쪽과 Allen(2008) 제8장을 참고하라.

  9. 이러한 비판은 결국 현상학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연구 방법론이 될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다. 현상학 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종교현상학을 비판하는 논의들에 대한 개괄적 소개로는 Cox(2006), 211-215쪽을 참고하라.

  10. “비교가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공리와도 같은 것이리라.”(Smith, 2009: 45)

  11. “[…] 다른 전통을 연구할 때는 비슷한 점보다는 대조되는 점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비교 연구의 특징이다.”(Smart, 2000: 38-39)

  12. 칠파 부족 신화에 대한 엘리아데의 인용과 해석은 Eliade, 1959: 32-33/63-64쪽에서 나타난다.

  13. 엘리아데는 홍수 신화에 대한 너무나 손쉬운 일반화를 시도한다. 그는 홍수 신화가 이전 시대의 끝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통해 구성되는 ‘순환적’ 시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다(Eliade, 1958: 210-212/293-295 참고).

  14. 고대 근동의 홍수 신화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개괄적 소개로는 Currid(2017), 76-101과 Longman Ⅲ&Walton(2021), 107-146쪽을 참고하라.

  15. 스마트의 종교현상학은 ‘종교적 유형에 대한 탐구’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종교현상학을 통해 각각의 종교가 지닌 서로 다른 세계관을 포착해내고자 한다(Smart, 2000: 제1장 참고).

6개의 좋아요

(1) 종교의 유형(type)에 관한 논의로 종교학이 나아가는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상 이게 '종교학계' 내에서 받아드려질만한 접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기존 엘리아데류의 종교의 본질을 강조하는 종교 현상학을 하시던 분도, 스미스/링컨 같은 의구심에서 인류학적 접근법으로 구체적인 종교 현상에서 시작하시던 종교 인류학을 하시던 분도, 제가 제안했던 '종교 유형론'이 과연 석사든 박사 수준에서든 받아들여질만한 것인지, 시큰둥하셨거든요.

그들이 보기에는, 이정도의 [중범위] 크기의 '유형'에 대한 담론조차, (엘리아데 같은 거장이 된 후가 아니라면) 학계에서 수용되기에 어렵다 보신 것 같아요.

사실 뭐. 요즘 종교학는 굉장히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하나의 개념어를 제시/분석/개량하는 것에 가까운 느낌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중범위 이론조차 많은 경력을 쌓은 학자가 낼 수 있는 마스터피스라는 생각이 학계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 아닌가....생각합니다.

(따지고보면, 과학철학이 개별 과학의 철학으로 분화하는 것처럼, 종교학도 개별 종교 현상에 대한 학문으로 분화하는 것이겠죠. '통합' 과학이라는 비전이 무너진 후, 개별 과학의 철학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였던 것처럼, '어떠한 본질로 정의 가능한' 종교라는 비전이 무너졌으면, 그 이후의 종교학이란 개별 종교에 대한 학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개의 좋아요

그렇군요. 두 가지 생각이 들어요.

하나는 '유형'이라는 것도 굉장히 세분화되어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 아주 구체적인 사례들까지도 유형론으로 비교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게 제 관점이에요. 가령, '아브라함계 종교'는 '인도 종교'와 대비될 수 있는 커다란 유형이겠지만, 그 속에서도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갈리잖아요. '그리스도교'라는 유형도 다시 가톨릭,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지고요. 당연히, 그 속에서도 훨씬 더 많은 유형의 세부화가 가능하죠. 그래서 저는 유형을 다룬다는 게 딱히 '큰 담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하나는, 솔직히 말해서, 종교학을 하시는 분들의 철학적 베이스가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가령, 인류학적 접근을 하시는 분들은 철학 자체에 관심이 없다든가, 종교현상학을 하는 분들조차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든가 하는 일들이요. 그래서 '철학'이라는 분야를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모호한 것처럼 생각하셔서 개별 사례 연구와 맞지 않는다고 보시는 경우도 있고, 철학에서 등장한 논의들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지 못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당장, 니니안 스마트만 하더라도, 자신이 사용하는 '현상학'이라는 말이 과연 후설의 현상학과 잘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 없어하더라고요. (종교현상학과 철학적 현상학은 다르다고 '의심'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없어서' 철학을 언급하길 꺼려하는 거죠.) 이런 점이 철학과 종교학 사이의 소통에 장애가 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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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건 몰라도 철학 내 다양한 세부 전공을 비롯해 종교나 애니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런저런 글을 쓸 수 있다는게 참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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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제 종교학과에는 너무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분들이 계신 듯합니다. 철학 (분석이든 대륙이든) 적 소양이 뛰어나신 분들은 대체로 기독교 신학처럼 특정 종교의 이론을 공부하시는 분들일 경우가 많죠. 한편 종교현상학처럼 (이제는 사실상 인류학적 접근이 대세가 된) 종교 현상에 대한 접근이라면, 상대적으로 철학보다는 인류학/사회학/문화 이론에 더 밀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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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출발은 현상학이 애초에 주창했던 "본질"에 대한 탐구와 Youn 님이 주장하시는 "유형"의 탐구 사이의 (모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긴장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1. 현상학이 환원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모든 개별 학문들의 대상성을 정초하려는 "보편주의"적 기획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종교학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개별 학문에서 현상학이 마주하는 어려움은 아마도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닌, 현상학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 20세기 철학에서는 여러 문화/역사/언어 사이에 무언가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경험적 연구에 선행한다는 의미에서의) "선험적 철학적 확신"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주의적 경향성이 상대적으로 보편주의적/추상적 성향을 띄는 "철학자"들에게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필드에서 개별 문화/역사/언어를 연구하는 "경험적 연구자"들에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옹호불가능한 입장이 되었다고 봅니다. 하이데거/가다머/콰인/데이빗슨/촘스키 등의 보편주의적 기획이 철학적/추상적 층위에서 매력적인 반면, 실제 경험적 층위에서 의심스러운 지위에 처한 것과 마찬가지죠.
  2. YOUN님이 말하는 "유형"에 대한 연구가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쪽으로 방향전환한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첫번째는, 아무리 범위를 특수한 개별사례들로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유형"에 대한 탐구는 보편주의적 기획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러한 비판에 응답하기 위해 특수성을 더욱 강조한다면, 왜 굳이 "현상학"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문화/역사/언어의 특수성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현상학보다 매력적인 다른 방법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나요? 종교학 분야는 잘 모르지만, 역사 연구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적인 정신에 입각해서 해당 문화/역사의 특수한 언어사용들을 추적하는 "지성사 intellectual history" 방법론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즉 보편주의를 경계하는 한에서, 후설 현상학은 매력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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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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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응용현상학(applied phenomenology)에 관심이 많습니다. 애초에 현상학이 개별 학문 영역을 정초하는 기본 개념들을 탐구하기 위해 제시된 기획인 만큼, 현상학에서 사용되는 '환원들(reductions)'은 실제로 미학, 종교학, 사회학 등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봐서요.

그런데, 이런 응용현상학의 작업이 반드시 "선험적 철학적 확신"에 근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논의해야 하는 문제가 여러 가지이긴 하지만, 간략하게 말해, (a) 응용현상학이 반드시 후설이 수행한 작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없고, (b) 심지어 후설 본인조차 단일한 방법론을 상이한 분야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태도에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니까요. 여하튼, 저는 철학과에서 흔히 논의되는 '선험적 현상학(혹은 초월론적 현상학)'보다는 개별화되고 세분화된 형태의 '응용현상학'의 작업들에서 현상학의 미래를 발견하고 싶어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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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특정한 분야를 탐구하기 위해 '반드시 현상학을 사용해야만 한다'라는 강한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아울러, 현상학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학이나 심리학 등의 도움을 받아 수행될 수 있다고 봐요. (가령, 종교현상학이 사회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제가 인용한 텍스트들 중에서 콕스(J. Cox)가 제시하는 주장이기도 해요.) 단지, 제가 강조하는 건, '현상학'이라는 분야가 여전히 유용한 탐구 방법론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일 뿐이에요.

비트겐슈타인은 종종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현상학이 후설의 현상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저는 후설의 현상학과 맞닿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이와 관련해서는 이승종 교수님의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제2장 보론 '비트겐슈타인의 현상학'에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