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저서 영원회귀의 신화를 읽다가 고대인들이 실재적인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는데요, 왜 고대인들은 실재적인 것에 목말라했나요?
단지 허구에 대한 두려움인가요, 아니면 생존을 위한 기제인가요?
(1) 미르치아 엘리아데 자신이 그렇게 상정하게 된 정확한 이유를 저는 정교한 문헌 비평적 방법이나 해외의 여러 논문들을 참고하여 정교하게 제시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저 자신의 speculation을 적는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물론 엘리아데 자신도 여러 근거를 가지고서 speculation을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말입니다.
(2)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나 삶의 양식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환경적인 면은, 지금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들과 무척이나 달랐음은 분명합니다. 밤이면 위험한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했고, 겨울이 되면 얼어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죠. 여름에 홍수가 나도 속수무책이었고, 병에 걸려 죽는 일은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고대도 언제 시기를 고대로 잡느냐에 따라 이러한 설정이 더 타당할 수도 있고, 덜 그럴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신화와 더 가까웠던 시기'라고 일단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고 넘어가죠.
(3) 신화는 신들이 나오는 세계를 다루죠. 즉 그들은 완전합니다. 고대인들 자신처럼 여러 환경적인 요소에 좌우되는 연약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뛰어난 인간을 신에 비유했습니다. 혹은 신의 혈통을 가졌다고도 했지요. 신화의 세계와 대비되는 현실은 많은 고대인에게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상받을 만한 일을 한 이를 위해 최고의 선물을 달라고 했더니 신이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다는 신화적 이야기도 있지요.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헤로도토스의 책에 나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진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현실은 완전한 신화적 세계와 멀리 떨어질수록 더 공포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4) 역사는 공포의 실현과정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마 현재에도 - 고대인들과 비슷하게도 그리고 또 다르게도 - 상당히 타당할 수 있을 텐데요, 비참하고 괴로운 일들이 많은 현실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역사'란 어떤 폐기의 대상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단지 허구에 대한 두려움인가요, 아니면 생존을 위한 기제인가요?
'허구'에 대한 두려움이 논리 필연적으로 '실재'를 요청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고대인들에게는 불완전한 현실보다는 (지금의 우리가 허구라고 생각하는) 신화적 세계가 더 '실재'적인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고대인들을 재단하면, 고대인과 현대의 우리 사이에 놓인 긴 시간에 따른 사고방식의 변모가 어떤 왜곡을 낳을 수 있겠지요.
'생존을 위한 기제'라는 것도, 다소 모호한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실재적인 것'을 그러니까 저의 미흡한 견해로는 신화적인 세계를 상정하거나 믿거나 집착함으로써 더 생존에 유리해 졌을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그들의 믿음이, 종교적인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신앙에 가까운 집착을 가짐으로써 삶이 조금이나마 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을 수는 있겠습니다. 그들은 신화 속의 신들과 영웅들과 그리고 그들과 공존한 괴물들을 사냥하고 정복했던 이야기를 듣고 노래하면서 삶의 애환을 표현하였지요.
그들에게 신화는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역사를 통하여 이 세계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신들의 삶과 내면과, 소중한 문화적 기억도 어느정도 위기가 찾아오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폐기되어야 했을 수 있습니다. 항상 새로이 반복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했을 수 있습니다.
(5) 결국 그들은 신화 속에서 신화를 통하여 새로이 표현된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과 삶을 보았던 것이며,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자 했을 수 있었겠지요.
삶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은 아닐까요. "라 때는 말이야~" 라든지, "아! 옛날이여!"라든지, 말을 할 때, 우리는 잠시 고대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6) 고대인들에게 삶은 형식이었고, 신화는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재는 강박적이었지만, 이 강박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되는 삶처럼 요구되는 그런 것이었다고도 보입니다. 과거는 결코 무용하지만은 않기에, 그저 회고의 대상으로만 남는 것도 아닐테죠. 고대인들은 어리석지만은 않았고, 신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도 무언가 진실된 것을 간직하였으리라고 믿어보고 싶습니다.
제시하신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종교에 대해 외부자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 내부자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1) 외부자적 관점을 취하는 연구들은 종교적 현상을 종교가 아닌 다른 요소로 환원하고자 합니다. "왜 고대인들은 종교적 실재에 목말라 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두려움 때문이다."라면서 심리적 이유를 들거나, "생존을 위해서이다."라는 진화론적 이유를 드는 것이 이러한 방식의 연구에 해당합니다. 더욱 구체적인 사례로는,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 같은 인류학자들의 종교 연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죠. "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종교적으로 금지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돼지가 중동지역에서 기르기 적합하지 않은 동물이기 때문이다."라고 환경적 요인으로 대답하니까요.
(2) 내부자적 관점을 취하는 연구들은 종교적 현상을 설명한다는 명목으로 종교를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러한 환원적 연구들은 애초에 '종교'라는 영역이 지닌 고유성과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부자적 관점에서는 "왜 고대인들은 종교적 실재에 목말라 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이 애초에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이 원래 종교적으로 생겨 먹었기 때문에 종교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 뿐, 그 현상을 자꾸 다른 원인으로 설명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엘리아데입니다. 애초에 '호모 렐리기오수스'라는 용어를 만든 것도 엘리아데죠. 그의 『종교형태론』(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서문에는 환원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아주 인상적이고 강력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현상을 만드는 것은 척도이다."라는 푸앵카레의 모토에 근거한 비판이죠.
MODERN science has restored a principle which was seriously endangered by some of the confus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 : "It is the scale that makes the phenomenon." Henri Poincare queried with some irony whether "a naturalist who had studied elephants only under the microscope would think he knew enough about those animals ? " The microscope shows the structure and mechanism of the cells, a structure and mechanism which are the same in all multicellular organisms. But is that all there is to know ? At the microscopic level one cannot be certain. At the level of human eyesight, which does at least recognize the elephant as a phenomenon of zoology, all uncertainty departs. In the same way, a religious phenomenon will only be recognized as such if it is grasped at its own level, that is to say, if it is studied as something religious. To try to grasp the essence of such a phenomenon by means of physiology, psychology, sociology, economics, linguistics, art or any other study is false ; it misses the one unique and irreducible element in it-the element of the sacred. (Eliade, 1958: xi)
엘리아데와 같은 방식의 탐구를 '종교현상학'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참고하시면 어떨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