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이승종의 『동아시아 사유로부터』는 유가, 불교, 도가의 사유를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들뢰즈 등의 현대철학과 비교하는 독창적인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동아시아 사유와 현대철학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를 해설하는 작업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동아시아 사유를 화두로 삼아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비전을 어렴풋이 그려보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 본고는 우선 이승종이 말하는 ‘동아시아 사유’를 크게 ‘해체적 사유’(Ⅱ), ‘자연적 사유’(Ⅲ), ‘은유적 사유’(Ⅳ)라는 명칭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그 세 가지 사유를 통해 ‘전인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Ⅴ).
Ⅱ. 해체적 사유로부터
‘해체’란 이항대립의 논리에 감추어진 균열을 폭로하는 철학적 작업이다. 가령, 세상을 ‘순수’와 ‘비순수’라는 항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근본주의적 종교인을 떠올려 보자. 그에게는 얼핏 모든 것이 명료해 보인다. 즉, 죄악이 발생하기 이전의 신화 시대는 순수하고, 죄악이 발생한 이후의 역사 시대는 비순수하다. 율법을 준수하는 종교 공동체는 순수하고, 율법을 무시하는 세속 사회는 비순수하다. 영혼이 머무르는 천상 세계는 순수하고, 육신이 머무르는 지상 세계는 비순수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항대립의 논리는 순수한 신화 시대에서 벌어진 최초의 타락, 순수한 종교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율법의 위반, 천상 세계에서 실현될 부귀영화 등 순수와 비순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온갖 예외적 사례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항대립 중 어느 쪽에도 뚜렷하게 속하기 힘든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상황에서는 두 가지 항만으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해체적 사유는 바로 기성의 범주에 갇히지 않는 요소를 찾아내어 이항대립의 논리를 공격하고자 한다. 이항대립의 논리에서 간과되거나 무시된 온갖 예외적 사례를 발굴해내어 가치의 기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비판의 전략이 바로 해체인 것이다.1
용수는 동아시아에서 해체적 사유를 가장 철저하게 수행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세계가 ‘다르마(dharma, 法)’라는 궁극적 원자들의 출현과 소멸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비다르마 철학에 반대한다. 그의 중관철학은 무엇이 다르마의 ‘진실된 본질(svabhāva, 自性)’이고 무엇이 다르마의 ‘찰나적 현현(laksana, 相)’인지가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비판은 아비다르마 철학에 내재하는 모호한 지점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한편으로, 아비다르마 철학은 “변화하는 것은 다르마들이 아니라 시간이다.”(이승종, 2018: 156)라고 주장하면서 시간을 다르마의 층위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비다르마 철학은 “시간은 다르마들이 현현하는 찰나로 쪼개지며, 이 찰나는 곧 다르마와 구별되지 않는다.”(이승종, 2018: 158)라고 인정하면서 시간의 층위와 다르마의 층위를 동일시하고자 한다. 모순되는 두 입장 사이에서 다르마와 시간 사이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는 모호하게 남겨지고 만다. 궁극적 원자들의 출현과 소멸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아비다르마 철학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수와 데리다
장자 역시 동아시아의 해체적 사유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방생설(方生說)과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은 얼핏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대립항이 언제나 나란히 생기고(方生) 나란히 함께 간다(兩行)고 지적한다. 가령, 삶과 죽음은 서로 모호하게 꼬여 있다. 살아 있는 유기물들은 언젠가 죽어서 무기물로 돌아가지만, 죽어 있는 무기물은 언젠가 다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유기물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옳음과 그름은 서로 모호하게 꼬여 있다. 한때 옳다고 평가받던 집단도 종종 자신의 진리를 과신하면서 독단에 빠지기도 하고, 한때 그릇되다고 평가받던 집단도 종종 경직된 사회를 비판하면서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의 철학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을 이항대립의 논리로 분류하여 어느 쪽이 먼저이고 어느 쪽이 나중인지 발생론적 순서를 나누고자 하는 시도가 거부된다. 어느 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은지 가치론적 서열을 정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지양된다. “다양한 소리나 신체의 다양한 구성 요소에 등급을 매겨 편애해서는 안 된다는 그[장자]의 말은, 이론이 초래하는 중심주의의 권력적 요소에 대한 경계와 비판으로 해석된다.”(이승종, 2018: 190) 세계는 ‘우/열’이나 ‘귀/천’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 다양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Ⅲ. 자연적 사유로부터
‘자연’이란 우리의 삶에 주어져 있는 원초적 층위이다. 우리는 자연을 단순히 자연과학을 통해 설명되는 ‘인과적 법칙’으로 생각하거나 사회질서와 대조되는 ‘야생적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두 입장은 자연을 지나치게 협소한 의미에 국한시킬 뿐이다. 가령,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언어는 인과적 법칙이 아니라 의미론적 법칙을 따르는 체계이다. 또한 언어는 야생적 상태가 아니라 문화적 세계에서 형성되는 관습이다. 그러나 인과적 법칙으로 분석되지도 않고 야생적 상태에 귀속되지도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언어가 ‘자연적’이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인간은 아무런 소통 없이 혼자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다가 다른 인간과 만나는 과정에서 점차 언어를 발명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진화론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다른 인간과 소통하는 능력을 처음부터 갖추고 태어난 ‘언어적 동물’이다. 따라서 자연의 영역은 자연과학으로 모두 환원되지도 않고, 사회질서와 반드시 대조되지도 않는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a) 결코 ‘인과적’ 사실이 아니고, (b) 일종의 ‘문화적’ 사실이면서도, (c) 여전히 ‘자연적’ 사실이다. 자연적 사유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폭넓은 의미의 ‘자연’에 주목하고자 한다.2 철학의 수많은 문제들은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망각과 오해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유가는 자연적 사유를 바탕으로 도덕과 정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가령, 공자의 원시유학은 ‘인(仁)’, ‘충(忠)’ ‘서(恕)’ 등을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으로 이야기하고, 주희의 신유학은 ‘이(理)’와 ‘성(性)’ 등을 인간에게 주어진 하늘의 질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강조하는 ‘덕목’이나 ‘질서’란 단순히 인간 내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발견되는 ‘1인칭적’ 사실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 외부의 사태를 들여다본다고 해서 발견되는 ‘3인칭적’ 사실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2인칭적’ 사실이야말로 유교가 드러내고자 하는 층위이다. 즉, 유교에서는 “인간이 직면해본 적이 없는 사태, 혹은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사태는 큰 의미가 없다.”(이승종, 2018: 85) 도덕과 정치 등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인간의 사실’과 ‘인간의 자연’이다. 따라서 공자는 자신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굴신(屈伸)’과 ‘이순(耳順)’의 태도를 강조하고, 주희는 동일한 이가 서로 다른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수실현된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사상을 강조한다. 두 인물은 도덕과 정치를 획일적 가치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사실’과 ‘인간의 자연’이란 매 순간 새롭게 성립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공자
도가 역시 자연적 사유에 근거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이다. 이론적 ‘지식’이 자연적 ‘확실성’보다 선행할 수 없다는 주장이 바로 도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가령, 노자의 『도덕경』 1장은 ‘말해질 수는 있어도 항상 도라고는 할 수 없는 도(非常道)’와 ‘말해질 수는 없어도 항상 도인 도(常道)’를 대비시킨다. 또한 장자의 「천도」는 제나라 군주 환공의 ‘문자적 지식’과 천민 윤편의 ‘실천적 지혜’를 대비시킨다. 두 인물은 단순히 말과 글로만 배운 내용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실제로 걸어간 길과 수련을 통해 실제로 체득한 기술이 더욱 근본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앎과 삶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이승종, 2018: 195)라고 강조하고, “이 둘을 섞어 삶으로써 앎을 좇거나 혹은 삶을 알려고 할 때의 위험”(이승종, 2018: 195)을 경고한다. 즉, 삶의 층위는 앎의 층위보다 깊고 넓다. 우리의 삶이 결코 고정된 틀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윤리, 가치, 당위 등을 추상적 이론 속에서 삶과 무관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태도는 독단으로 귀결될 뿐이다.
Ⅳ. 은유적 사유로부터
‘은유’란 보이는 대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가령,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를 떠올려 보자. 시의 화자는 보이는 ‘호수’를 통해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물결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호수의 이미지를 매개체로 삼아 자신의 마음 속 잠잠함과 평온함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은유의 사용이 단순히 시와 같은 문학작품에서만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대상과 보이지 않는 대상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형이상학에서도 자주 이루어진다. 형이상학이야말로 ‘가시계(visible world)’를 넘어서 ‘가지계(intelligible world)’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담고 있는 철학의 대표적 분야이기 때문이다. ‘은유’(metaphor)와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단어 속에 ‘넘다’를 의미하는 접두어 ‘메타(meta)’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3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전통적 철학에서는 자주 왜곡되었던 형이상학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즉, 형이상학을 실재의 구조에 대한 탐구로 이해하고자 하는 전통적 철학은 가시계를 통해 가지계를 이야기하려는 활동이 언제나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란 결코 과학적이거나,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사유가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사유란 은유적 사유이다.
헤세의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부처는 은유적 사유의 대가이다. 그는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인물이면서도 세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지 않는다. 가령, ‘연기(緣起)’와 ‘해탈(解脫)’에 대한 부처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을 함의한다. 모든 만물이 연기의 법칙에 종속된다는 주장이 참일 경우 해탈은 가능하지 않고, 해탈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참일 경우 모든 만물이 연기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는 이와 같은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부처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연기’와 ‘해탈’이란 부처에게 단순한 은유일 뿐이다. 두 주장을 조화시켜 정합적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다. 진정한 중요한 활동이란 지식으로는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층위를 은유를 통해 그려내는 일이다. “부처는 싯다르타가 찾아낸 결함을 부정하지도 시정하려 하지도 않고 있다. 자신의 가르침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목적으로 하는 일관된 체계이기보다, 고뇌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이승종, 2018: 124) 즉, 고착화되고, 경직되고, 속박된 사유에서 발생하는 실존의 문제는 앎보다 삶이 더욱 깊고 넓다는 자각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은유는 바로 삶의 층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모순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가르침조차 삶의 층위를 표현하기 위한 은유인 한에서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장자와 들뢰즈
은유적 사유의 대가로 언급해야만 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장자이다. 장자는 자신의 글 중 십분의 구가 ‘우언(寓言)’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세계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기를 선호하였다. 그가 형상화하는 세계에서는 어떠한 사물도 고정된 본질이나 고정된 위계를 갖지 않는다. 가령, 장자의 「소요유」는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하늘로 뛰어올라 ‘붕’이라는 거대한 새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곤이 붕이 되어 날아가는 과정에서는 ‘바다/하늘’이라는 공간의 구분이나 ‘물고기/새’라는 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엄격하게 갈라져 있다고 생각되었던 각각의 영역은 곤이 붕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진다. “곤은 변신과 비상, 그리고 비행을 통해 갈라진 영역을 하나로 가로지른다.”(이승종, 2018: 184) 특별히, 곤과 붕의 은유가 그려내는 세계는 일종의 ‘차이’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인 곤과 하늘을 날아가는 새인 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곤’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규정될 수 없고 ‘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의 반복을 통해 발생한다. 단일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 ‘그 무엇’의 반복이 매 순간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만물이 차이화하는 반복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계속한다는 사유야말로 곤과 붕의 은유에 담겨 있는 형이상학인 것이다.
Ⅴ. 전인성을 향하여
이승종이 ‘동아시아 사유’를 ‘해체적 사유’, ‘자연적 사유’, ‘은유적 사유’라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가, 불교, 도가에 대한 해설과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들뢰즈에 대한 해설을 가족유사적인 방식으로 뒤섞어 제시한다. 어느 한 해설에서 다른 해설을 엄밀하게 떼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역시 세 가지 사유를 엄격하게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세 가지 사유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a) 해체적 사유는 ‘순수/비순수’, ‘기원/비기원’, ‘진리/비진리’ 같은 대립항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무너뜨린다. (b) 자연적 사유는 대립항의 모호한 뒤얽힘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을 자연으로 받아들인다. (c) 은유적 사유는 인간의 삶이 고정된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유를 통해 그려낸다. 바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사유가 함께 모여 ‘동아시아 사유’를 형성한다. ‘동아시아 사유로부터’란 ‘해체적, 자연적, 은유적 사유로부터’이다.
문제는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느 곳인지가 다소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승종은 동아시아 사유를 일종의 ‘돌연한 출발’의 지점으로 해명한다. 그는 동아시아 사유가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동아시아 사유로부터』의 논평자들은 이와 같은 목적지의 부재를 자주 지적한다. 가령, 김영건은 “이승종 교수의 글은 참으로 깔끔하고 아름답다.”(이승종, 2018: 324)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런데 모든 아름다운 글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다소 명료하지 못하다.”(이승종, 2018: 324-325)라고 아쉬워한다. 김진근은 헤세의 『싯다르타』에 대한 이승종의 해석에 대해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려는 게 무엇인지요? 왜 굳이 싯다르타를 가지고 이야기했는지요?”(이승종, 2018: 415)라고 의아해한다. 이승종 역시 김진근의 질문에 대해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 글에 결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이승종, 2018: 415)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시작된 돌연한 출발은 ‘전인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단일한 기준에 따라 재단될 수 없다는 통찰은 동아시아 사유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해체적, 자연적, 은유적 사유는 어떠한 지식도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범주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별히, ‘성/속’, ‘선/악’, ‘미/추’ 같은 평가조차 결코 절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다. 두 가지 극들은 각각의 문맥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는 문맥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한 문맥에서 올바른 행위가 다른 문맥에서는 잘못된 행위일 수 있다. 한 문맥에서는 부적절한 행위가 다른 문맥에서는 적절한 행위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문맥에 통용되는 보편적 법칙을 찾으려는 시도란 허구적이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자각한 사람은 자신의 좁은 세계를 뚫어내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뿐이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인격,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인격, 누구에게나 관대한 인격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 것이다.
헤세와 『데미안』
헤세의 『데미안』은 전인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헤세, 2000: 123) 즉, ‘성/속’, ‘선/악’, ‘미/추’로 이루어진 이항대립의 논리란 마치 새를 둘러싸고 있는 갑갑한 알과도 같다. 그 알을 벗어난 인간은 이제 세계를 모든 것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는 영역으로 새롭게 경험한다. 그는 자신을 속박한 이전의 관습과 이전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압락사스’에게 도달하고자 한다. 여기서 압락사스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함께 지닌 양면적 신성이다. 우리의 삶에 내재된 서로 다른 극들을 포괄적으로 통합한 전인성의 상태가 압락사스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헤세는 소설 속 주인공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빌려 압락사스의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다만 서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완전히 내면적인 영성과 바깥으로부터 내게로 찾아온, 찾아야 할 신에 대한 신호 사이에서 하나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결합은 그 후 더 긴밀해지고 더 내밀해졌으며 나는, 내가 바로 이 예감의 꿈속에서 압락사스를 불렀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히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한 더 이상 내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헤세, 2000: 127-128)
동아시아 사유가 이상적 인간상으로 평가하는 인물들은 실제로 전인성을 성취한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고정된 틀 속에 담아 절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각각의 문맥에 맞는 각각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가령, 공자는 같은 질문에도 제자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를 고려하여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한다. 그는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경쟁심 강한 자로가 제기하자 그를 만류하고, 소극적인 염유가 제기하자 그를 격려한다. 부처 역시 ‘자아’에 대한 단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고유한 길을 걸어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시구로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장자는 옳고 그름을 엄격하게 나누지 않는 인간을 성인으로 일컫는다. 그는 얼핏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입장들이 “도의 축”이라는 성인의 자리에서는 모두 긍정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유가, 불교, 도가는 서로 강조점은 다르더라도 모두 전인성을 목표로 하는 여행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 사유를 통해 이항대립의 논리를 해체하고, 현실을 구성하는 모호한 뒤얽힘을 받아들이며, 세계를 은유를 통해 역동적으로 그려낼 통찰을 얻는다. 전인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지닌 서로 다른 측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이루어진 돌연한 출발은 ‘전인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것이다.
참고문헌
이승종. (2018)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동녘.
이승종. (2021) 「형이상학의 역사와 논리」, 『철학연구회 학술발표논문집』, 철학연구회 2021년도 추계학술대회, 1-14.
이승종. (2022)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아카넷.
윤유석. (2022)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95권, 161-210.
헤세, 헤르만. (2000) 『데미안』, 전영애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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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설은 필자의 논문에 근거한 것이다(윤유석, 2022: 19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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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자연’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이승종의 논의를 참고한 것이다(이승종, 2022: 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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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주장은 형이상학에 대한 이승종의 논의를 참고한 것이다(이승종, 202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