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키에르케고어는 누구인가? (2)

후배분과 같이 운영하는 기독교 철학 채널에 키에르케고어를 소개하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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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미적 실존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심미적 실존’이다. (반응이 좋으면 다음 기회에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미적 실존이란 모든 선택을 회피하고자 하는 실존이다. 자신이 매 순간 직면하는 선택의 상황에서 눈을 돌린 채, 아무런 결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 실존이다. 오직 눈앞에 주어지는 향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심미적 실존의 목표이다. 그러나 심미적 실존이 단순히 동물처럼 즉각적인 욕구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고도로 지적인 사람도 고도로 지적인 방식으로 심미적 실존일 수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어떤 사람이 심미적 실존의 상태에 있는지는 그 사람이 특정한 ‘법’ 아래에서 자신을 규정하고자 하는지와 긴밀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즉, ‘법’이 부여하는 의무, 책임, 제약 등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이 심미적 실존이고 ‘법’이 부여하는 의무, 책임, 제약 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윤리적 실존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아무런 법도 선택하지 않으려는 심미적 실존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을 타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승마란 지나치게 과격한 운동이니까. 나는 걷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걷는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니까. 나는 누워 있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누워 있는 채로 있던가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데, 나는 그 어느 쪽도 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이것이냐/저것이냐』, 37쪽.)

6. 결혼과 연애

키에르케고어는 종종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대조를 연애만 하려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는 사람 사이의 대조를 통해 설명한다. 즉,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중 어느 누구와의 결혼 관계에도 종속되려 하지 않은 채 연애가 주는 낭만적 향락만을 누리려는 사람을 통해 심미적 실존이 어떤 삶인지가 묘사된다. 마찬가지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여 그 사람과의 결혼 관계에서 부과되는 의무, 책임,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을 통해 윤리적 실존이 어떤 삶인지가 묘사된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결혼’이 ‘선택’에 대한 유비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결혼을 하는지 않는지의 문제보다도 무엇인가를 선택하려는 태도를 취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키에르케고어 본인도 평생 독신이었다,) 가령,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결혼을 하라. 그러면 그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않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 여자를 믿어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여자를 믿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그대는 여자를 믿거나 안 믿거나 할 것이지만, 어느 쪽을 택해도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 이것이 모든 철학의 총화고 알맹이다.(『이것이냐/저것이냐』, 71-72쪽.)

“어느 쪽을 택해도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라는 것은 키에르케고어 본인의 입장이 아니라 심미적 실존의 입장이다. 심미적 실존은 모든 선택을 거부하는 실존이다. 이러한 실존은 키에르케고어의 많은 글들 속에서 대부분 ‘결혼’이라는 선택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때때로 ‘결혼할 것이냐/결혼하지 않을 것이냐’라는 선택지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구분을 ‘연애만 하려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는 사람’ 사이의 구분으로 이해할 수는 있더라도, 이러한 구분이 단순히 그 사람의 실제 사회적 상태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람이 미혼인지 기혼인지 같은 사회적 상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선택’이라는 문제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다만, 오늘은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 사이의 대조를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대조로 사용할 것이다.

참고

쇠얀 키르케고르, 『이것이냐/저것이냐』 , 제1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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