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성서: 야스퍼스, 레비나스, 리쾨르

칼 야스퍼스

"서양 철학에 있어서 철학의 내용은 그 역사적 근원을 희랍적인 사고방식뿐 아니라 성서적 사고방식도 두고 있다. 계시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도 성서적 근원을 습득할 수 있고 계시 없이도 인간으로서 성서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성서의 연구는 사실상 오늘날까지 서양의 철학 사상의 기반이었다. 성서는 어느 한 종파나 한 종교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파, 모든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카알 야스퍼스, 『철학적 신앙』, 신옥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9, 44쪽.)

"니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니체를 포함해서, 어떠한 위대한 철학자도 성경에 대한 철저한 지식 없이는 철학적 사유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양철학은 숨길 수가 없다."(카알 야스퍼스, 『철학적 신앙』, 109쪽[번역 수정]. / K. Jaspers, The Perennial Scope of Philosophy, R. P. Mannheim (tran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50, p. 109.)

에마뉘엘 레비나스

"성서는 사람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 꼭 이야기되어야 할 제일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책이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석을 통해 그 심오함이 드러나도록 개방된 형태의 이야기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 마디로 말해 성서는 책 중의 책이다. 성서에 들어 있는 풍부한 윤리성 그리고 신비할 정도로 다양한 주석의 가능성, 나한테 초월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역시 그렇다. 풍요로운 해석을 엿보고 느끼는 것은 과연 종교요 제의라고 할 만하다. 한편 큰 철학가들이 쓴 책을 읽고 해석하면서 내게는 철학이 성서와 반대라기보다는 성서에 가깝게 보였다. 성서의 주제들이 구체성을 띤 반면 철학책은 그렇지 못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나는 철학이 무신론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의 글귀 몇 줄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듯이, 철학자가 아무리 비슷한 은유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표현한다 해도 성령은 그 너머에서 역사하신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28쪽.)

"그러나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예언자 정신의 책은 책 중의 책인 성서라고 나는 확신한다. 세상의 모든 문자는 그것을 기다렸다고 주석했다. 성서는 초자연스럽고 성스러운 기원의 이야기, 교리로 얼룩진 그런 이야기로 말하지 않는다. 내용과 위치를 갖기 이전에 성서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드러내며 말한다. 그 표현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사가 강력한 만큼이나 강하다.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읽으며 깨우친 것과 주석한 것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말한다. 성서는 '무거운 단절을 명한다.' 거기서 우리의 현존재(Dasein) 의식은 의문에 부쳐진다. 성서의 거룩성은 거기에 있다. 성스러운 의식에 있지 않다. 만일 성서의 이 위기의 바람을 법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유일한 법규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꿈 같은 법규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자꾸 매듭을 지으려고 하지만 그 위기의 바람, 또는 성령은 자꾸 불어 흩는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52-153쪽.)

폴 리쾨르

"오늘날 예수의 비유들에 대하여 설교한다는 것──또는 이 비유들을 설교한다는 것──은 실로 내기를 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내기란 모든 반대적인 논증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비유를 듣고 우리가 다시 한 번 놀라고, 감동을 받으며, 갱신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기로 인하여 나는 이 비유들을 다른 텍스트 중의 하나처럼 단지 학문적인 방식으로 연구하지 않고 그것들을 설교하려고 하는 것이다."(폴 리쾨르, 「예수의 비유 듣기」,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 존 톰슨 편집, 윤철호 옮김, 서광사, 2013, 549-550쪽.)

기독교인 가슴이 웅장해지게(?) 만드는 구절들이네요. 야스퍼스의 책을 읽다가 올려 보았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성서는 안일한 사고에 어떤 '충격'을 주는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널리 알려진 예수의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만 봐도 그렇죠. 당대 유대 사회에서 '사마리아인'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더러운 피' 혹은 '잡종'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교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판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당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도전적이었죠.

바로 이런 점들에서,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거운 단절"을 명하면서 "우리의 현존재를 의문에 부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레비나스는 유대인이어서 예수의 비유보다는 히브리 성서를 염두에 두었겠지만요.)

그리고 성서 이야기가 이렇듯 단순히 '교리'나 '교훈'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 상황과 고민을 담아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손쉽게 읽히고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일대학교 교수 크리스틴 헤이즈가 구약성서 입문 강의 첫 시간에 했던 이야기도 올려봅니다.

"세 번째로, 성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12살 된 아이와 8살 된 아이가 있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성서를 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성서를 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성서 이야기' 책이라는 것은 나에게 충격적이다. 그러한 것들은 나에게 정말로 충격적이다. 성서는 어린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성서 속의 주제들은 매우 성숙한 것이며, 특별히 내러티브 텍스트들이 그렇다. 거기에는 배반과 근친상간과 살인과 강간의 에피소드들이 있다. 또한 성서는 순진한 낙관주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서는 직설적인 책이다. 성서는 삶이 열정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만큼 고통과 갈등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충분히 용기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건다. 성서는 또한 다른 의미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문학 걸작들처럼, 성서는 구조와 스타일과 주제의 예술적 기교와 은유에 있어서 복잡성으로 특징지어지며, 내가 믿기로는, 어른 독자들에게도 꽤 종종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성서는 독자가 활동하도록 만든다. 성서는 훈계하지 않으며, 좀처럼, 좀처럼 훈계하지 않는다. 성서는 도덕적인 이슈들과 상황들을 탐구하며, 사람들을 도덕적 이슈들과 상황들로 밀어 넣는다. 결론은 독자에 의해서 끌어내져야 한다. 성서에는 모든 종류의 패러독스와 미묘한 언어유희들과 아이러니들이 있으며, 앞으로 여러분들이 세밀한 독서 활동을 많이 하게 될 섹션들에서는, 여러분들의 관심을 끌게 될 몇 가지 것들이 있기도 하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그 내용들을 앞으로 기대하게 될 것이다." (Christine Haye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in Open Yale Courses, Lectur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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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이원성[*성서적인 극과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극]에서 자연스럽게 일종의 양극성을 보셨는지요?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유대교와 도스토예프스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입장보다는 덜 분열되었습니다. 저는 양쪽 모두에 충실하면서도 그 두 영역을 혼동하지 않으려는, 잘 정립된 양극성 내에서 계속 타협하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게는 철학 수업이 커다란 시련이었습니다. 이것은 칼 바르트(Karl Barth)가 프랑스 신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프랑스 신교를 성서 텍스트로 급진적이고 반철학전인--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회귀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학사 과정에서 저는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특히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의 베르그송에 열광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베르그송의 종교철학과 바르트가 내세운 급진주의의 사이에 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양쪽 모두에 충실하리라는 신념을 무너뜨릴 정도로 악화되었던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념을 끝까지 지키긴 했습니다. (폴 리쾨르, 『폴 리쾨르, 비판과 확신』, 변광배. 전종윤 옮김, 그린비, 2012, 24쪽)

성서 해석의 세계로 들어설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독서와 이해의 다른 유형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머거리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각각의 독서 유형, 즉 해석의 유형들은 다른 목적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종 서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상반된 전제들에서 출발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순서에 따른 독서는 교리상의 편결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주석은 고고학적 작업 --이를테면 사해사본(死海寫本)의 해독--이 밝힌 것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서에 대한 철학적 독서에서도 종파적 측면이나 역사적.문헌학적 탐구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어로 된 텍스트들과 성서 원전들 사이의 차이는 조율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실을 구약성서 연구분야에서 일어난 최근 몇 년간의 주석학적 혁명에 즈음하여 얼마 전에 발견했습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이 구약성서 연구는 7,8세기에 걸쳐 작성된 문서라고 추정되는 네 편의 자료들--「야위스트」, 「엘로이스트」, 「듀트로노미스트」, 「제사장의 기록」--의 가설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은 아주 오랫동안 역사적 비평 방법과 신학 주석학자들의 첨병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 신학--유대주의의 궁금적인 케리그마(kerygma) 속에 통합된 일련의 선언들, 즉 케리그마들의 축적으로 세워진--의 일관된 비전을 구축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가정된 일관성 덕분에 유대주의와 헬레니즘 사이의 전면적 대립은 당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오늘날 이 체계는 붕괴의 과정에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의 위기는 유배 이전의 다양한 전통을 모으기 위한 첫번째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유대인들의 문서들과 다시 쓰인 문서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작성되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것들을 모은 것은 아느 정도 페르시아 권력의 강요에 의해서인 듯합니다. 천천히 발전하고, 집중적이고, 통일된 유대인들의 비전은 보다 더 대조적이고 논쟁적인--그 자체가 다원적인 독서를 필요로 하는--히브리어 성서의 비전으로 대체되었습니다.(같은 책, 261-262쪽)

이스라엘과 헬레니즘 문화의 마찰은 우리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문서들은 유대주의 율법학자들이 '토라'와 선시자들의 항목 --'예연서(Nebiim)--과 다른 항목으로 정리한 문서들입니다. 즉 「잠언」, 「시편」, 「전도서」, 「욥기」입니다. 이 문서들이 헬레니즘 문화의 토대가 되는 문서들--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비극 시인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문서들--과 경쟁적 입장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구상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정통 「야위스트」가 유배의 위험에 직면한 유대주의 내부의 논쟁에 종속되는 것만큼, 이 문서들은 방금 인용한 그리스 텍스트들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몇몇 주석학자들은 더 멀리 나가 「듀트로노미스트」의 '역사가들'과 헤로도토스를 수평적으로 비교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기서 분리된 두 세계의 비전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합니다. 아테네의 맞은 편에 있는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같은 책, 263-264)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서로 다르지만 여쩌면 양립할 수 있는 두 방식의 사유와 직면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 분명 그렇습니다. 포괄적인 독서가 문제가 되거나, 아니면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기술적(記述的) 신학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그렇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헌들 전반에 걸쳐 펼쳐진 광대한 신학적 노고의 기원이 되는 성서적 사유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사변적 언어의 부재로 인해 이 성서적 사유가 활용할 수 있는 표현 수법들이 단지 서술적.법적.예언적.제사장적 양식들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에도 다양하게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번에는 내적 또는 외적인 비판의 쟁점이 됩니다. (후략)(같은 책, 264쪽)

얼마전에 악의 상징과 관련해서 참고될만한 점이 있나 해서 『비판과 확신』의 성서가 나온 항목들을 훑어본 적이 있었는데, 마침 오늘 올려주신 글(그리고 일전에 올리신 『해석의 갈등』 4장)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서, 그리고 저 자신도 복습겸, 한 번 인용해보았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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