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

나는 오랫동안 리쾨르의 해석학을 다소 과소평가하였다. 리쾨르의 해석학에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해석학과 구별되는 뚜렷한 철학적 개성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러한 평가는 리쾨르가 해석의 ‘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하였다. 리쾨르는 하이데거나 가다머가 인식론적 관심을 간과한 채 ‘진리의 문제’와 ‘방법의 문제’를 분리시키고 말았다고 비판하지만, 나에게는 리쾨르 자신도 방법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1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방법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여러 가지 해석학들 사이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 『해석의 갈등』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을 상당 부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 방법이 바로 리쾨르 자신의 ‘악의 상징 해석’과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 리쾨르는 그 두 가지 방법을 축으로 삼아 실존을 바라보고자 한다. 다만, 방법에 대한 리쾨르의 논의는 신화와 성서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과 뒤섞여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곧바로 포착하기 힘들다. 다른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첨가하는 리쾨르의 글쓰기 스타일로 인해, 어디까지가 텍스트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이고 어디까지가 리쾨르 자신의 독창적 주장인지가 한 눈에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2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해석의 갈등』에 대한 섬세한 독해가 필요하다. 애초에 이 책은 22편의 논문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각각의 논문에서 부각되는 주제에만 주목하게 되면 책 전체의 통일성을 놓치기 쉽다. 리쾨르 본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실존에 대한 반성이란 언제나 “멀고 힘든 길”(리쾨르, 2001: 9)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정신분석학이나, 정신현상학이나, 종교현상학 등 “여러 가지 해석학들”(리쾨르, 2001: 23)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개별 해석학들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개별 해석학들 사이의 갈등을 통해 주어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해야 한다. 그러나 리쾨르가 쓴 각각의 논문은 개별 해석학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작업을 수행하다 보니, 정작 리쾨르 자신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약속의 땅”(리쾨르, 2001: 29)이 무엇인지는 그의 글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리쾨르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은 『해석의 갈등』을 구조화하여 그 속에 수록된 각각의 논문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1. 비신화화: 비신비화와 비신화론화

『해석의 갈등』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 책이다. 1장과 2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들이 해체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통해 지적한다. 3장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여러 가지 해석학들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4장과 5장은 바로 그 ‘여러 가지 해석학들’ 중에서 리쾨르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학으로서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을 제시한다. 즉, 『해석의 갈등』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4장과 5장에 있다. 리쾨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옹호하고자 한다. 1장에서 3장까지 전개되는 논의는 바로 그 인간관과 세계관을 우리 시대에 이야기하는 것이 왜 설득력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배경 소개이다.


니체와 프로이트

각각의 부분에서 제시되는 논의는 ‘비신비화(demystification)’, ‘비신화화(demythization)’, ‘비신화론화(demythologization)’라는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요약될 수 있다. ‘비신비화’는 신화로부터 신비적 요소를 걷어내는 작업이고, ‘비신화론화’는 그렇게 비신비화된 신화로부터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내는 작업이며, ‘비신화화’는 비신비화와 비신화론화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다(리쾨르, 2001: 364 참고). 즉, 1장과 2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어떠한 것도 절대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비신비화 작업을 수행한다. 심지어 이러한 비신비화를 수행하는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조차 다시 비신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리쾨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3장은 비신화화 작업의 일반적 방법을 소개한다. 비신비화된 개별 해석학들은 이제 각각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4장과 5장은 그 개별 해석학들 중에서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의 비신화론화를 지향한다. 그리스도교가 악과 희망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리쾨르의 목표이다.

애초에 ‘해석의 갈등’이라는 제목은 바로 비신비화와 비신화론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해석하기 위해 의심신뢰의 이중적 해석학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리쾨르가 ‘해석의 갈등’이라는 용어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즉,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해석이란 그리스도교를 여러 가지 해석학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다른 해석학들보다 더 우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신앙인의 가정은 의심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해석이란 그리스도교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이라고 강조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단순한 우화나 환상으로 폄하될 수 없는 진리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신앙인의 확신은 신뢰된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종교는 우상이고 거짓 예배이며 우화이고 환상이다. 어떤 두려움 때문에 신을 만들어내고 주문을 왼다. 그러므로 종교가 조상과 유아기의 원초적 운명의 투사인 한, 의식의 고고학과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를 해석하는 것은 먼저 비신비화하는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이 비신비화가 의식의 예언자인 거룩의 신호를 복원하는 것으로 본다. 이제 이 의식의 예언자는 여러 가지로 애매하고 야릇하다. 그 거룩의 상징이 <억압된 것의 복귀>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아니, 거룩의 상징은 동시에 억압된 것의 복귀이고 유아기적인 원초 상징이 불거져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두 상징 세계가 엉켜 있다. 거룩의 예언자적 의미들은 원초 신화의 흔적 위에서 뭉치고 활동한다. 앞으로 가는 상징은 뒤로 가는 환상과 별개가 아니다. 무의식의 원초 신화 속에서 새로운 거룩의 상징들이 몸을 일으킨다. 의식의 종말론은 언제나 의식의 고고학의 창조적 반복이다. (리쾨르, 2001: 361-362)

2. 존재론적 해석학: 현상학에 접목된 해석학

이러한 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해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존재론적 해석학(ontological hermeneutics)’의 통찰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존재에 대한 사유에 ‘현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태도와 관심이 언제나 개입한다는 사실은 하이데거와 가다머 이후로 해석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두 인물은 우리 의식이 지향성을 지닌다는 후설의 현상학의 기본 테제를 통해 해석학의 문제를 ‘방법론’에서 ‘존재론’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즉,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면서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지에 따라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이 끊임없이 달라진다면, 대상을 ‘신의 관점(God’s eye-view)’에 서서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든 기술은 우리 의식이 지닌 지향성에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이란 특정한 태도와 관심을 바탕으로 존재를 해석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존재론이 곧 해석학이고, 해석학이 곧 존재론인 것이다.


하이데거와 가다머

리쾨르는 현상학을 해석학에 접목시킨 하이데거와 가다머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그는 해석학이 존재론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두 인물이 강조하면서도 정작 존재론이 해석학을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존재에 대한 사유가 해석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존재론은 이제 정신분석학, 정신현상학, 종교현상학 같은 개별 해석학들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 개별 해석학들이 제시하는 세계의 현상이 바로 존재론이 탐구하고자 하는 세계의 실재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정작 개별 해석학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들의 논의를 더욱 철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의 존재론(ontology of understanding)’과 ‘해석의 인식론(epistemology of interpretation)’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해야 한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제기하는 물음은 어떻게 방법론의 물음을 완전히 제쳐놓고 직접 존재론으로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이라는 것이 결국 해석의 이론이 된다면 어떻게 해석의 순환 문제를 제쳐두고 직접 존재론으로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도를 자극하고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나 신칸트 학파식의 반성철학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역시 존재론의 욕구이다. 자세히 말해 내 문제는 이렇다. 곧 <주석의 문제나 역사방법론 또는 심리학이나 종교현상학에서 생긴 해석의 인식론이 이해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고 거기서 영감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하는 것이다. (리쾨르, 2001: 9)

따라서 리쾨르에게는 해석의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중요하다. 아무런 해석의 방법도 없이 존재를 직접 기술하는 작업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리하여 방법론을 따져가며 해석하려는 학문 분야들과 계속 접촉하고, 이해에서 따지는 <진리> 문제와 주석 분야에서 따지는 <방법>의 문제를 갈라놓으려는 시도에 맞서야 한다.”(리쾨르, 2001: 14) 여기서 크게 두 가지 과제가 생겨난다. 첫째로, 서로 갈등하는 여러 가지 해석학들을 비판적으로 중재해야 한다. 특별히, (정신분석학 같은) 의심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비화와 (종교현상학 같은) 신뢰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화론화를 적절하게 화해시켜서 진정한 의미의 비신화화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해석의 방법이 어떻게 성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넘어서 실제로 설득력 있는 해석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천적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3. 방법론적 해석학: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

갈등하는 해석학들을 중재하는 작업과 설득력 있는 해석학을 제시하는 작업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심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비화와 신뢰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화론화 사이의 매개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비신화화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리쾨르는 성서의 이야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비신화화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악의 상징 해석’을 통해 인간의 존재 구조를 성찰하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통해 존재 욕망의 윤리를 옹호한다. 그 두 가지 논의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복음의 말씀에 대한 사유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해석의 갈등』 4장과 5장은 바로 이러한 ‘방법론적 해석학’을 담고 있다. 1장, 2장, 3장에서 정립된 비신화화의 이론이 4장과 5장에서 성서의 이야기에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3. 1. 악의 상징 해석

『해석의 갈등』 4장은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커다란 기둥 중 하나인 악의 상징 해석을 다룬다. 여기서 리쾨르는 흠, 죄, 허물의 상징과 아담 신화에 담긴 사유를 비신화화하고자 한다. 즉, (a) 악의 상징의 변천 과정에는 악이 인간 바깥의 문제라는 사유와 악이 인간 내면의 문제라는 사유가 동시에 담겨 있다. (b) 아담 신화에도 악의 기원이 뱀이라는 사유와 아담 자신이라는 사유가 동시에 담겨 있다. (c) 이러한 대립은 인간의 자유 속에 언제나 의지의 요소와 비의지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소위 ‘노예 의지’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d) 따라서 우리는 악의 상징을 단순히 도덕 의무에 대한 위반만으로 설명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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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흠, 죄, 허물: 리쾨르는 ‘흠(defilement)’, ‘죄(sin)’, ‘허물(guilt)’이라는 상징이 악에 대한 사유 과정에서 등장하는 각각의 단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흠과 죄와 허물, 이 세 개의 별자리에 들어 있는 일차 상징들에는 겹뜻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겹뜻이 상징 일반의 힘찬 움직임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이 상징에서 저 상징으로 가며 깊어지는 운동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의 풍성함이 약해지는 운동이 있다.”(리쾨르, 2001: 313) 즉, ‘흠’이라는 상징에서는 악이 인간 밖에서 찾아오는 오염물로 그려진다. 여기서 악의 기원은 인간 바깥에 있다. 그러나 ‘죄’라는 상징에서는 악이 인간이 저지른 잘못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악의 기원은 인간 내면에 있다. ‘허물’의 상징에서는 악이 인간이 저지른 잘못이면서도 인간 밖에서 힘을 행사하는 권세이기도 하다. 여기서 악의 기원은 인간 내면에 있으면서도 인간 바깥에 있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흠, 죄, 허물이 모두 악에 대한 인간의 체험이 지닌 각각의 측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상징이 다른 상징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동시에 다른 면에서는 잃는 것이 있다.”(리쾨르, 2001: 313) 우리는 악을 밖에서 찾아오는 것으로 체험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저지르는 것으로 체험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체험하기도 한다. 그 복합적 면모를 모두 담고 있는 체험이 바로 악의 체험인 것이다.

아담 신화: 리쾨르는 아담 신화 역시 악의 체험이 지닌 복합적 면모를 그려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종교사적으로 보면, 아담 신화는 우주발생 신화나 비극 신화를 비판하면서 일종의 ‘우상파괴’ 작업을 수행한다. 아담 신화에서는 악이 형이상학적 실체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악의 기원은 인간의 행위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악이 인간을 굴복시키는 일종의 권세로서 체험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아담 신화에서조차 드러난다. 아담을 범죄하도록 만든 ‘뱀’이라는 신화적 형상이 바로 악의 체험에 들어 있는 일종의 ‘바깥 구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담 신화에서 악은 아담 자신이 저지른 것이지만, 그 악은 뱀이 저지르도록 만든 것이기도 하다. “악을 사람 바깥에서 찾는 관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육체를 무덤으로 보는 오르페우스 신화나 프로메테우스의 잔인한 신이나 전쟁 드라마를 담은 창조 신화에 들어 있는 바깥 구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 신화에 다시 등장한다. 인간을 말하는 아담 신화에 뱀의 형상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있다.”(리쾨르, 2001: 319)

노예 의지: 악의 상징은 단순한 신화적 환상 정도로 취급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악이 상징에는 우리를 납득시키는 해석학적 진리가 들어 있다. 고대인들은 악의 상징을 통해 우리가 악의 체험에서 겪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진지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린다고 해야 좋을 그러한 상징들을 통해 성서 기자들은, 잘못이라는 희미한 개념으로는 잡히지 않는 야릇한 악의 체험을 말하고자 했다.”(리쾨르, 2001: 303)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악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면서도, 자신의 의지가 악에 의해 휘둘린다는 사실 역시 한탄할 수밖에 없다. 악은 인간의 자유로부터 발생한 결과로 체험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는 권세로 역시 체험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존재자다. 우리의 존재 구조에는 우리 자신에게 반대되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와 자유가 완벽하지 않다는 자각이 바로 악의 상징에 담겨 있는 진리이다. “악의 상징은 악이 인간의 존재 구조라는 점 역시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악은 존재의 모험이며 존재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리쾨르, 2001: 336) 루터의 표현대로, 우리가 지닌 의지란 애초에 ‘노예 의지(servile will)’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개념 정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난감하지만,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참 의미 깊은 이야기다. 거의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의지 안에서의 문제다. 악은 의지의 산물이고 그 가운데 비의지가 이다. 비의지는 의지와 맞서는 것이 아니고 의지 속에 있다. 그것이 바로 노예 의지다. 악이 의지의 산물이라는 데서 책임을 묻는 법 개념을 가져오고, 물려받은 것이며 의지를 넘어 있는 것이라는 데서 유전이라는 생물학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리쾨르, 2001: 307-308)

결국 불가사의한 것은 이것이다. 곧, 악은 자유<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미 자유 <속에> 들어 있다. 악은 행위이면서도 습관이고, 그때그때 생기면서도 동시에 이미 있다. 철학자 칸트가 악의 수수께끼를 말하려고 신화에 나오는 뱀의 형상을 끌어들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내가 볼 때 결국 뱀은, 악이 자유로운 결정의 산물이고 인간의 행위에서 시작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미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리쾨르, 2001, 334)

정죄와 형벌의 비신화화: 악의 상징이 우리의 의지와 자유에 내재된 근본적 결함에 대한 묘사라면, 악의 상징을 단순히 윤리와 법의 논리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당하지 않다. 악의 상징은 종종 ‘법 개념’을 사용하여 악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생물학 개념’을 사용하여 악의 문제가 인간을 넘어서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악의 상징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악이 인간의 자유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면서도 인간의 자유 속에 내재된 구조라는 사실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 “악을 윤리 문제로만 풀려고 할 때는 지금 저지르는 악, 곧 <떨어짐>이나 <빗나감> 같은 상징만 끌고 들어온다.”(리쾨르, 2001: 329-330) 따라서 정죄나 형벌 개념에 근거하여 악의 상징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양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단히 유용하다. 그 두 해석학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한 윤리와 법의 논리를 비판하여 악의 상징을 정죄와 형벌의 층위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에 숨겨진 문제를 드러낸다. 악의 상징 해석은 바로 그 두 해석학을 발판 삼아 윤리와 법의 논리에 국한되지 않는 진리를 드러내고자 해야 한다.

3. 2. 희망의 신학

『해석의 갈등』 5장은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커다란 기둥 중 다른 하나인 희망의 신학을 다룬다. 여기서 리쾨르는 악의 상징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과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즉, (a)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는 모든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희망 위에 세워져 있다. (b) 악의 고백조차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근거한 위로와 분리되지 않는다. (c) 이러한 신앙은 니체와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에도 살아남는다. (d) 오히려 우리는 무신론을 통해 우상파괴와 부친살해를 수행할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복음의 말씀에 담긴 넘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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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실존론과 종말론: 그리스도교 신앙은 분명히 철학에 앞서는 실존론적 체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담 신화가 바로 윤리나 법으로 정식화되기 어려운 실존론적 체험을 그려내고 있는 대표적 이야기이다. 의지와 자유, 불안과 절망, 결단과 도약 등 인간의 존재 구조에 대한 사유가 악을 둘러싼 성서의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가 ‘중립적인 실존론적 인간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실존을 중립적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구적이다. 해석되지 않은 순수한 실존이란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특별히,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실존은 ‘종말론(eschatology)’과 대단히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즉, 실존에 대한 성서의 관점은 하느님이 마지막 날에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선포나 더욱이 예수의 선포는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가운데 양자택일로 볼 수 있다. […] 그러나 성서를 실존론으로 해석하면 그 선택에 들어 있는 특별한 무엇이 약하게 된다. 종말론 차원이 사라지고 영원한 현재의 철학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많다. 종말론에 들어 있는 풍부함을 현재의 결단만 강조하는 순간주의로 바꿀 위험이 크다. 그렇게 되면 부활 희망에 들어 있는 세상과 역사와 공동체와 우주적 관점이 사라진다.”(리쾨르, 2001: 443) 따라서 우리는 종말론의 차원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성서가 그려내는 실존을 이해할 수 없다. 실존론에 근거하여 비신화화를 수행한 불트만보다는 종말론에 근거하여 희망의 신학을 제시한 몰트만이 우리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넘침의 논리: 악의 문제 역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종말론적 희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악을 미래를 향해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 악은 약속의 운동 속으로 들어간다. 기도는 이미 관계 회복의 시작이고 재창조의 시작이다. <가능을 향한 열정>이 이미 악의 고백을 사로잡았다. 회개한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고, 과거에 대한 회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리쾨르, 2001: 477) 여기서 악은 지나간 ‘기억’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제 우리에게 진정으로 강조되는 것은 은혜이다. 즉, 우리가 악한 자라는 사실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악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욱 넘친다는 사실이 성서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리쾨르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성서의 이야기가 악의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결국 ‘넘침의 논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형벌의 논리(logic of punishment)’가 아니라, 죄를 지었더라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넘침의 논리(logic of superabundance)’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사유인 것이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악과 화해가 서로 이어지는 체험을 담은 속깊은 이야기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어 그 체험을 표현한다. 먼저, 악에도 <불구하고> 화해가 일어난다. 이 <불구하고>는 죄를 덮어두는 범주이며, 그래서 참으로 희망을 주는 범주다. 그것은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징표들이 있다. 그런 생각을 펼 수 있는 마당은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이며, 체계가 아니라 종말론이다. 둘째, 이 <불구하고>는 <은총으로>다. 악이 있지만 사물의 근본은 선이다. 마지막 때에 죄를 덮어준다는 생각에는 어떤 교훈이 숨어 있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한 대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etiam peccata>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리고 클로델Claudel이 부드럽게 말한 대로 <최악의 상태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숨어 있다. 거기에 절대지는 없다. <불구하고>나 <은총으로>에 절대지는 없다. 끝으로, 속깊은 이야기의 세 번째 범주는 <더욱더πολλω μαλλον>이다. 이 넘침의 법이 <은총으로>와 <불구하고>를 아우른다. 그것이 <로고스>의 기적이다. 로고스에서부터 되짚어 참다운 것을 얻는다. 로고스의 놀라운 신비에서 되짚어볼 때 존재의 빛 속에서 악의 필연성을 말하게 된다. 낡은 신정론에서는 거짓 논설을 펴기 위한 방편이던 필연성 문제가 희망의 앎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찾는 필연성은 그 희망의 앎에서 생기는 가장 높은 차원의 합리적 상징을 이룬다. (리쾨르, 2001: 341-342)

존재 욕망의 윤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고 있는 넘침의 논리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에서 자유롭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형이상학의 신이었다. “어떤 신이 죽었는가?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신이 죽었다.”(리쾨르, 2001: 484) 특별히, 그들은 형벌의 논리에 근거하여 인간을 정죄하고자 하는 윤리와 법의 허구성을 지적하였다. 윤리와 법이 어떠한 원한과 욕망을 숨기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애초에 성서의 이야기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악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벌의 논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넘침의 논리는 형벌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이다. 물론, 우리는 ‘넘침의 논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서의 이야기가 ‘하느님 나라’, ‘언약’, ‘부활’, ‘새로운 창조’와 같은 상징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희망이 와 닿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순수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모든 기술은 결국 상징과 은유에 부딪힌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는 주어진 상징과 은유가 말하고 있는 체험에 얼마나 공감되는지가 우리 자신의 실존을 형성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특정한 윤리와 법을 절대적 질서로 상정하고서 인간에게 맹목적 의무를 부여하려는 태도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윤리’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 윤리는 ‘존재 욕망의 윤리(an ethics of the desire to be)’ 뿐이다. 즉, 키에르케고어가 강조한 것처럼,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욱 넘치도록’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윤리나 법도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 복음의 말씀대로 자기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기를 욕망할 때, 그는 윤리나 법을 넘어서는 것에 복종하기를 욕망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스피노자가 강조한 것처럼,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욱 넘치도록’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 복음의 말씀대로 자기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기를 욕망할 때, 그는 어떠한 고통과 좌절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가기를 욕망하는 셈이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말에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은 따라야 할 명령 형태로 의지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실존이라고 부른 것, 곧 노력과 욕망에게 말을 건다. 말은 우리를 바꾸는데, 그것은 의지가 의지를 눌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들음>에 의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말은 우리 실존의 상징 틀에서 우리에게 다다른다. 상징은 상황을 이해하는 이해 방식의 표현이면서, 그 상황에 우리의 힘을 쓰는 방식의 표현이다. […] 우리의 존재 욕망과 말씀의 능력이 서로 깊은 연관을 맺는 것은, 우리가 듣고 귀를 기울이고 복종할 때다. (리쾨르, 2001: 493-494)

사랑의 하느님: ‘형이상학의 신’이 죽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의 하느님’이 살아난다. 무신론이 ‘아버지’라는 환상을 제거하여 윤리와 법이 지닌 허구적 성격을 폭로할 때에야 비로소 복음의 말씀이 ‘거룩한 아버지’라는 상징을 선포하여 우리에게 넘치는 의미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즉,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상파괴와 부친살해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하느님 ‘아버지’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일차적으로 강조되는 요소는, 니체와 프로이트가 비판한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이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그려내는 여러 가지 상징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의 기본 범주가 부성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복음서의 기본 범주는 하느님 나라이고 종말론이다. 구약성서에서처럼 먼저 계약이 있고, 아버지는 그 다음이다. […] 그러므로 부성의 자리는 희망의 신학 안에 있다.”(리쾨르, 2001: 533)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는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욱 넘치도록’ 사랑하신다.”라는 종말론적 희망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를 윤리와 법 너머로 부르면서 우리의 존재를 무한히 긍정하는 복음의 말씀이 바로 ‘아버지’라는 상징이 놓여 있는 맥락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버지를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와 일방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예수의 아버지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말론적 희망 속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예수의 아버지를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정죄의 승화는 키르케고르 쪽으로, 위로의 승화는 스피노자 쪽으로 윤리를 밀어낸다. 사랑의 신학은 그 둘이 똑같은 것임을 보여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주제가 모든 변증법의 정점이어야 한다고 말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랑의 신학이라고 해서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 윤리를 밀어내는 두 가지 양태가 결국 같은 것임을 보여야 한다. <최고의 당신>과 <하느님이냐 자연이냐>가 깊은 곳에서는 같은 것임을 보여야 한다. 바로 거기서 아버지 형태가 상징으로 부활한다. 환상이라고 해서 극복되고 우상이라고 해서 폐기된 아버지 형태가 상징으로 부활한다. (리쾨르, 2001: 384)

4. 케리그마에 접근하는 철학자: 헤겔 이후의 칸트

따라서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커다란 기둥은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a) 우리의 의지와 자유가 ‘악’이라고 부를 만한 결함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b)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더욱 넘치는 하느님의 은혜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리쾨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칸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특별히, 리쾨르가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비신비화에서 출발하여 신뢰의 해석학을 통해 비신화론화로 나아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칸트 역시 순수이성을 통해 선험적 환상 비판에서 출발하여 자유의 요청을 통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로 나아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선험적 환상 비판은 사변 쪽에서 <신의 죽음> 역할을 한다. 요청들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하느님을 말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다.”(리쾨르, 2001: 455)


칸트와 헤겔

그러나 ‘악’과 ‘희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칸트가 제시하는 통찰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칸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칸트는 감각의 세계와 예지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전제로 자신의 철학을 성립시킨다. 또한 그가 제시한 윤리는 형식주의적 의무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헤겔이 바로 칸트의 사유에 내재된 이러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악과 희망에 대한 칸트의 사유에 주목하면서도 헤겔의 비판을 진지하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긍정적인 함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칸트’가 아니라 ‘헤겔 이후의 칸트’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리쾨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자가 케리그마에 접근하며 자유에 대해 하는 말은 결국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이야기가 된다. ​칸트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물론 나도 칸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만들어 보려고 한다. 에릭 베이유Eric Weil의 표현을 빌리자면 헤겔 이후의 칸트다. (리쾨르, 2001: 448)

리쾨르가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으로부터 수행한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 이후의 칸트’를 재발견하기 위한 시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 리쾨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신화화하고자 하는 철학이 결국 악과 희망에 대한 칸트의 사유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 칸트가 전개한 최고선의 초월론적인 종합은 철학이지만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아주 가깝다. 더군다나 몰트만이 희망을 가리켜 <전적으로 새로운>이라고 부른 것과 비슷한 말을 칸트도 하고 있다.”(리쾨르, 2001: 45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리쾨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신화화하고자 하는 철학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비신비화와 비신화론화를 화해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신현상학은 구체적인 반성이며, 그러한 철학 도구의 매개가 없으면 정신분석과 종교의 갈등은 제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다.”(리쾨르, 2001: 541) 정신의 자기 자각은 해석의 우회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강조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길을 따를 때에야 비로소 악에도 불구하고 더욱 넘치는 은혜를 희망하는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리쾨르의 의의와 한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리쾨르의 해석학은 분명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포괄성과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와 ‘방법’, ‘의심’과 ‘신뢰’, ‘악’과 ‘희망’, ‘칸트’와 ‘헤겔’이라는 각각의 대립쌍을 오늘날의 철학자들 중에서 리쾨르만큼이나 체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나는 (a) 존재론적 해석학과 방법론적 해석학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리쾨르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b) 의심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비화와 신뢰의 해석학이 수행하는 비신화론화를 통합하여 텍스트에 대한 비신화화를 성취하고자 하는 리쾨르의 시도에도 크게 공감이 된다. (c) 리쾨르가 성서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을 제시하는 방식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d) 그가 주장하는 ‘헤겔 이후의 칸트주의’라는 표어도 매우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음의 네 가지 문제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여전히 아쉽게 느껴진다.

(1) 리쾨르가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이라는 방법론적 해석학을 제시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두 해석학은 여전히 추상적이다. 리쾨르는 악과 희망을 상징을 통해 어렴풋이 그려낼 수밖에 없는 체험으로 남겨둘 뿐, 악과 희망의 체험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인간학, 사회 이론, 정치 이념, 신론 등을 전개하려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는 상징의 의미를 특정한 철학적 체계 속에 단일한 형태로 고정시키기보다는 그 의미를 다소 막연하더라도 본래의 풍부한 형태로 열어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징이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상징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부터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별히, 상징을 해석하는 작업이 오늘날의 철학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유의미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해명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몰트만은 자신의 희망의 신학을 통해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등과 같은 조직신학의 고전적인 분과들로부터 시작하여 정의의 문제, 종교 간 대화의 문제, 성 윤리 문제, 기후 변화 문제 등 사회-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까지 다양한 실천적인 이론을 구성한다. 우리 자신과 세계를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게 될 경우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크게 변화하는지를 증명한다는 것이 바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지닌 강점이다. 리쾨르의 해석학에 이러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리쾨르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에 비해서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몰트만에 비해서는 여전히 ‘방법’을 피상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 ‘방법’에 대한 리쾨르의 다소 애매한 태도는 그가 ‘진리에 대한 계시’와 ‘진리에 대한 증언’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리쾨르는 종종 철학자의 역할과 예언자의 역할을 구분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한계를 긋는다. “나는 예언의 선포를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때로는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철학자는 결국 예언을 선포하는 사람이 아니다. […] 옛 우상을 부수는 해석학과 케리그마를 재건하는 해석학을 화해시켜 어정쩡한 절충주의에 서는 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다.”(리쾨르, 2001: 500) 그러나 철학자가 예언자처럼 진리를 계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철학자가 진리를 증언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케리그마에 접근하는 철학자’는 예언자가 말하는 진리를 잘 정리하여 명확하고 체계적인 언어로 증언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즉, 케리그마 자체는 철학자가 마음대로 선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리쾨르와 같은 그리스도교 철학자라면, 성서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선포된 복음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케리그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철학자가 끊임없이 고민해해야 할 주제이다. 리쾨르와 같은 그리스도교 철학자라면, 상징으로 제시된 케리그마를 사용하여 우리의 시대를 위한 담론을 구성하고자 해야 한다. 실제로, 성서의 이야기에는 모세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뿐만 아니라 에스라 같은 학자도 등장한다. 심지어 제2이사야는 예언자이면서도 “학자의 혀”(이사야 50:4)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철학자가 예언자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학자의 역할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언자가 계시한 진리를 듣고서도 학자의 혀로 그 진리를 증언하지 않는 것은 철학자의 직무유기이다.

(3) 리쾨르가 제시하는 논의는 종종 상징 자체의 의미를 해명하기보다는 자신이 이전에 성립시킨 ‘의지의 철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리쾨르는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 이전에 ‘의지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적 인간학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가 전개한 의지의 철학은 마르셀과 야스퍼스 등 당대의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 구조를 분석한다. 악의 상징과 희망의 신학으로부터 리쾨르가 이끌어내는 내용 중 상당수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에 직면하여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가령, 인간의 의지와 자유 속에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주장은 이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라는 리쾨르 자신의 이전 실존주의적 저서에서 등장한 논의이다. 신화와 성서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악의 상징』과 『해석의 갈등』은 그 이후에 출판된 책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구조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이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오히려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이 인간의 존재 구조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3 신화와 성서의 이야기에 대한 리쾨르의 독해에는 그의 실존주의적 사유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4)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을 통해 제시된 철학적 인간학이 다른 종류의 철학적 인간학과 적극적으로 비교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아쉽다. ‘정체성’이란 언제나 차이를 통해 성립한다. 한 입장이 지닌 고유한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그 입장을 다른 입장과 대비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몰트만의 경우에는 종말론적 희망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고대 근동의 ‘에피파니의 신들’과 유대-그리스도교의 ‘약속의 하느님’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그는 ‘현재’를 강조하는 신앙과 ‘미래’를 강조하는 신앙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상이한 신관, 우주관, 인간관, 윤리관을 낳는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러나 리쾨르는 자신의 철학적 인간학이 다른 입장들에 비해 어떠한 의의나 특징이 있는지를 그다지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철학적 인간학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비교될 만한 셸러, 플레스너, 겔렌, 사르트르, 카뮈 등 다른 철학자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의아할 정도이다. 가령, 실존에 대한 리쾨르의 관점은 사르트르의 관점과 명백히 대비된다. 리쾨르는 실존을 ‘욕망’과 ‘열정’을 일으키는 상태로 그려내는 반면, 사르트르는 실존을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키는 상태로 그려내기 때문이다.4 이러한 대립으로부터 귀결되는 차이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인데도,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에 대한 리쾨르의 논의에서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동시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리쾨르가 철학적 인간학에서 지니고 있는 고유성이 무엇인지는 결국 독자들이 ‘자비의 원칙’에 입각한 해석을 통해 발견해내야 하는 요소가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리쾨르가 마치 “약속의 땅” 바로 앞까지 다가갔으면서도 그 땅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한 모세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에는 분명히 ‘방법론적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리쾨르는 그 요소들을 우리 자신과 세계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만한 ‘이론’의 형태로 체계화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으로부터 제시한 논의는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a) 다양한 방법론적 해석학을 통과하여 존재론적 해석학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보다는 (b) 애초에 다양한 방법론적 해석학에 충실하게 머무는 방식으로 존재론적 해석학을 수행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리쾨르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여러 가지 해석학들”은 단순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우회로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해석학들”은 우리가 “약속의 땅” 위에 건설하는 도로들과 성읍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약속의 땅”이란 정복이 무한하게 지연되는 유토피아적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공간이 바로 “약속의 땅”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직접 들어가서 약속의 실현을 경험하는 것이다. 해석학에서 중요한 것도 존재론적 진리를 가리켜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세계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참고

리쾨르, 폴, 『해석의 갈등』, 양명수 옮김, 아카넷, 2001.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과 인문학적 변주』,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 2017.
정기철, 『폴 리쾨르의 철학』, 시와진실, 2016.
Grondin, J. “Do Gadamer and Ricoeur Have Same Understanding of Hermeneutics”, The Agon of Interpretations, M. Xie (ed.),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4, 43-64.
Vanhoozer, K., Biblical Narrative in the Philosophy of Paul Ricoeu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https://blog.naver.com/1019milk/223011063842


  1. 그롱댕 역시 리쾨르의 해석학이 ‘방법론적’이라기보다는 ‘현상학적’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즉, 어떻게 우리는 주석을 위한, 다시 말해 텍스트 해석을 위한 원칙을 제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역사적 학문들을 자연에 대한 엄격한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정초할 수 있는가?’ 리쾨르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방법론적 해결책을 제공하는가? 이 점은 분명하지 않다. 그의 해석학은 그러므로 방법론적이기보다는 현상학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최소한, 이것이 반드시 곤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선뜻 인정한 것보다는 덜 방법론적이다.”(Grondin, 2014: 56)

  2. 나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리쾨르 연구자들이 이러한 점으로 인해 악의 상징 해석과 희망의 신학이 리쾨르의 방법론적 해석학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밴후저는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리쾨르의 ‘성서적’ 혹은 ‘신학적’ 탐구를 배제한 상태에서 단순히 리쾨르의 해석 이론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Vanhoozer, 1990: 3 참고).

  3. 윤성우는 악의 상징에 대한 리쾨르의 해석이 의지에 대한 리쾨르의 이전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한다. ““악의 상징(la Symbolique du mal)”이라는 타이틀은 『의지의 철학 2-2권』(Philosophie de la volonté Ⅱ-2)의 부제목에 해당된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더구나 이 저서는 『(의지의 철학 2-1권) 잘못할 수 있는 인간』(Philosophie de la volonté Ⅱ-1: L’homme fallible: HF)이라는 저서와 동시에 출간된 것이다. 따라서 ‘잘못할 수 있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틀릴 수 있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분석이 그의 상징론과 신화론에 이론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선행한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윤성우, 2017: 68)

  4. 리쾨르와 사르트르 사이의 대비는 밴후저와 정기철의 논의를 참고한 것이다. 다만, 밴후저와 정기철이 이러한 대비를 위해 주목하는 문제는 서로 다르다. 밴후저는 리쾨르와 사르트르가 인간의 삶에 대해 서로 대비되는 관점을 제시한다고 지적하고, 정기철은 그 두 인물이 자유와 책임의 문제에 대해 서로 대비되는 입장을 취한다고 지적한다(Vanhoozer, 1990: 6; 정기철, 2016: 5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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