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종교인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Drury 1976, 79쪽). 이를 뒤집으면 모든 문제를 무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않겠다는 말이 됩니다. 무종교적인 관점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관점일 것입니다. 세상 뭐 있어? 인생 별거야? 하는 허무주의, 냉소주의, 염세주의 등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되는 이 시대의 태도와 삶의 양식을 비트겐슈타인은 강렬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CV, 38~39쪽).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필연적인 존재사건입니다.“(이승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아카넷, 2022, 442쪽 인용자 강조.)
(1) "모든 문제를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 가지 추가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목록 속에 단순히 형이상학적 실재를 하나 더 추가하는 활동일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은 믿음의 의미와 참/거짓이 대상에 대한 지시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철학자니까요. "신은 존재한다."라는 믿음을 위해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의 신을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는 거죠. 오히려 신을 믿는다는 것이란 삶 전체를 저 믿음에 따라 방향 잡는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죠.
(2) 저는 이런 태도가, 비트겐슈타인만의 독특한 종교관이라기보다는, 실제 일상의 종교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독교인이고 매 주마다 교회에 가지만, 교회 사람들끼리 신 존재 증명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끔 기독교 변증 같은 철학적 논의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증 자체가 신앙 생활에 있어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고요. 제 생각에, 이런 모습은 아주 건전해 보입니다. 신앙은 삶을 새로운 관점에 따라 다듬어 나가는 실천인 것이지, 형이상학 게임이 아니니까요.
(3)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는 얼핏 굉장히 이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런 태도가 사실 제일 속 편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면 자동적으로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지게 되거든요. 열정을 쏟을 만한 일도 없고, 추구하는 가치도 없고,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도 없는 사람일 수록 "세상 뭐 있어? 인생 별거야?"라는 말을 쉽게 내뱉습니다. 이건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철학이라기보다는, 고민 자체를 포기한 결과죠. 그래서 키에르케고어는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정신'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죠. 자기 삶을 의욕하지 못하는 상태가 '절망'이라면, "세상 뭐 있어? 인생 별거야?"라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 개인적으로,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기독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을 '기독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긴 하죠. 그렇지만 저는 사람들이 종종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을 '기독교인'으로 분류하길 꺼려하면서 은근히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를 비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소 불만스러워요. 비트겐슈타인처럼 고차원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평범한 '기독교인'들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느냐는 식의 태도 말이예요. 그런데 종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 정말 일상적인 기독교인들의 관점과 크게 다를까요? 제가 보기에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야 말로 다른 어떤 종교철학보다 일상적인 기독교인들의 관점을 잘 대변하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애초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의 부활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분류할 이유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잘 알지 못하겠어요.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직접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니까요(Drury 1976, 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