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으로서의 사랑: 언약신학을 통해 바라본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

이 글은 IVP와 성서신학연구기금에서 주최하는 연구자 공모전인 제2회 ‘온 세상을 위한 신학과 영성’의 연구 계획서로 작성되었다. 나는 이 연구 계획서가 공모전에서 당선되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공모전의 당선 여부와 상관 없이, ‘언약에 근거한 사랑’은 내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진 연구 주제 중 하나이다. 여기에 쓴 내용들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실제 논문이나 단행본으로 구체화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연구 계획서의 내용을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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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 주제

본 연구는 하나님과 인간이 약속의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다고 강조하는 성서적 ‘언약 사상’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증언하고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즉, 성서적 언약 사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의와 반항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와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지키셨다고 증언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바로 이러한 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성서적 언약 사상과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성립한다. 언약은 자신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이 쏟으시는 사랑의 근거이고, 사랑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교가 성서적 전통에 따라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내기 위해 매 순간 끊임없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노력인 것이다.

2. 연구 목적

그동안 ‘언약’은 수많은 신학자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주제로 강조되었다. 16세기 개혁주의의 언약신학으로부터 20세기 발터 아이히로트 이후의 구약성서신학에 이르기까지,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성서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된 동력이라는 사실에 광범위하게 동의하였다. ‘사랑’ 역시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 가치로 널리 알려졌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13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교는 사랑이야 말로 여러 가지 은사와 덕목 중에서도 가장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언약’과 ‘사랑’ 각각에 대한 오랜 신학적 고찰의 역사에 비해 성서 속에 나타난 그 둘 사이의 상호 규정적 관계는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다.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언약’과 ‘사랑’이 마치 서로 별개의 사안인 것처럼 따로 떨어져서 논의되고 있는 오늘날의 신학적 풍경은 다소 어색하다. 특별히, 성서 전통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는 매우 빈번하게 결혼 관계로 비유되는데도, 정작 언약 사상에 근거하여 결혼이나 성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이 거의 제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대단히 아쉽다. 결혼이나 성이야 말로 언약 사상을 통해 다루어질 수 있는 사안인데도, 우리는 성서가 직접 말하고 있는 사안에 직면해서조차 언약 사상을 너무나 자주 망각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세속 사회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상실한 나머지 사랑을 피상적 층위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오늘날 사랑이란 한 순간 불처럼 미친 듯이 타올랐다가 사라져버리는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이야기되고 있고, 연인을 찾는 과정이란 상품 시장에서 우리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재화를 찾는 과정에 비유되고 있으며, 연인에 대한 의무나 책임이란 우리 자신의 자유를 억지로 제약하는 속박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을 회복하는 작업이란 이러한 피상적 사랑 개념에 맞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약속이고, 연인은 상품이 아닌 인격이며, 상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우리 자신의 자유보다도 소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귀중한 통찰인 것이다.​

3. 연구 내용 및 차례

(1) 본 연구는 세속 사회의 사랑 이해를 드러내기 위해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과 고전적 사회 연구에 대한 분석을 함께 수행할 것이다. 우선, 오늘날의 드라마, 영화, 소설, 가요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묘사를 분석할 것이다. 특별히, 지난 30년 동안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작품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가 사랑을 ‘시장경제의 모델’과 ‘낭만적 사랑의 모델’에 따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즉, 현대사회에서는 연인 관계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성적 열정을 수반하는 자아실현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회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강조될 것이다.

(2) 본 연구는 언약 개념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지니는 의의를 주로 20세기 이후 구약신학의 연구 성과를 통해 강조할 것이다. 즉, 고대 근동의 언약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창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메시아 언약을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으로 전제할 것이다. 또한, 유대-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는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언약 사상 자체에 대한 분석은 본 연구의 주된 과제가 아니다. 본 연구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이 지닌 철학적 의의를 언약 사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언약 사상에 대한 배경 논의는 발터 아이히로트의 『구약성서신학』 및 피터 J. 젠트리와 스티븐 J. 웰럼의 『언약과 하나님 나라』에서 수행된 기존 연구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3) 본 연구는 ‘언약’과 ‘사랑’ 개념에 기여한 고전적 철학자와 신학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전개할 것이다. 특별히, 칼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제Ⅳ권에서 제시한 화해에 관한 교의는 언약 사상과 사랑 개념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위한 중요한 단초를 제시한다. 바르트의 교의학에서는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랑의 행위를 위한 근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교의학을 중심으로 삼아, ‘약속’의 윤리적 중요성을 강조한 임마누엘 칸트, ‘결혼’의 의무에 대해 묘사한 쇠얀 키에르케고어, ‘언약’과 ‘사랑’과 ‘고통’이라는 주제를 하나로 연결시킨 위르겐 몰트만의 사상이 비판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4. 연구 결과의 기대 효과

(1) 본 연구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신학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역할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윤리학이 주로 ‘정의’나 ‘해방’과 같은 사회정치적 사안에만 지나치게 편중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중요하다. 즉, 성서 전통과 그리스도교 내러티브가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면, 정의나 해방 자체가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중심 주제인 것처럼 부각되는 오늘날의 경향은 다소 교정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증언하고자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나 해방이 무엇인지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언약에 근거한 사랑’에 대한 고찰은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조차 종종 간과되어버리는 사랑의 신학적 의의를 우리가 되돌아보도록 자극한다.​

(2) 본 연구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이 지닌 독특한 의의를 드러내는 철학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세속 사회는 사랑이 언약을 통해 성립한다는 생각에 익숙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계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동거 관계나 결혼 관계조차 성서 전통에서 강조되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당사자 사이의 신의성실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였을 때에도 언약 자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랑이란 세속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을 증언하고 실천하는 활동은 성서 전통을 계승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따라서 ‘언약에 근거한 사랑’에 대한 고찰은 그리스도교가 지향해야 하는 고유한 신앙의 가치를 밝히는 작업에 기여한다.

​(3) 본 연구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개념에 근거하여 우리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실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연애, 결혼, 봉사, 업무 등에서 타인을 사랑으로 대하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는 만큼,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서 매우 중요하기도 하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일상적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는지가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에 근거한 사랑’에 대한 고찰은 작게는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문제 상황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고, 크게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점차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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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계획서를 읽다보니 본문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도 몇 가지 레퍼런스들이 생각납니다. 이미 읽어보셨을 것 같지만 '사랑'과 관계하여 자본주의적 진술이 필요하시다면 콜린 캠벨의 학술서적인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과 조금 대중적이지만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와 같은 책들도 함께 권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도, 낭만인(?)으로서도 선생님의 연구가 잘 성사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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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사회학 논의들은 깊이 알지 못해서, 말씀하신 텍스트들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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