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다루는 최근의 주요 저술들 중에는 철학자가 쓴 것은 하나도 없다."


더글라스 알렌

"[…] 내가 연구하는 철학 분야의 관점에서 보면, 192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의 저술들이 출판된 이후로, 신화에 관해 책을 쓴 철학자들이 매우 드물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신화에 관한 자료집들을 보면, 인류학, 사회학, 문학, 역사학, 종교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의 글을 포함하고 있으나, 철학자들의 글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철학이 신화를 철학 이전의 것, 철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여 배제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를 비롯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학자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에 나타나듯이, 최근의 철학은 진리, 객관성,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 방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해왔다. 예를 들어 철학과 문학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으며, 서술적 담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신화를 다루는 최근의 주요 저술들 중에는 철학자가 쓴 것은 하나도 없다. (더글라스 알렌, 『엘리아데의 신화와 종교』, 유요한 옮김, 이학사, 2008, 22-23쪽.)

철학자들이 신화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네요. 제 학부시절 부전공이 종교학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철학이 신화를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작업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특별히, 서로 다른 신화들로부터 서로 다른 인간관과 세계관을 이끌어내는 작업에 철학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19세기 말만 하더라도 고대 근동 신화 연구에서는 환원주의적 경향이 강했죠. 『지우수드라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 『창세기』에서 모두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사실로부터, 이 신화들이 결국 동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근거하여 동일한 주제나 교훈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신화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연구가 훨씬 일반적이죠. 같은 홍수 신화라도, 『지우수드라 서사시』에서 홍수가 일어나는 이유(노역으로 인한 인간의 불평불만)와 『창세기』에서 홍수가 일어나는 이유(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으로 인한 성적 타락)는 꽤 다르거든요. 당연히, 각각의 텍스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도 다르고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얼핏 유사해 보이는 신화들이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지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많아요.

저는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오늘날 신화 연구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종교학 연구 일반의 경향이라고도 생각해요. 엘리아데 이후로 그 어느 종교학자도 종교에 대한 거대 담론을 구축하는 작업을 수행하려 하지 않죠. 물론, 종교학자들이 지나치게 실증적 연구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엘리아데가 그동안 신화 사이의 차이나 종교 사이의 차이를 쉽게 지나쳐 버렸다는 지적도 분명히 정당하죠. 조너선 스미스는 신화와 종교에 대한 비교 연구에서 차이에 주목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비교가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공리와도 같은 것이리라. 비교는 차이를 지적 흥미의 근거로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 또 일정한 인식론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 차이를 제어하는 방법론을 요청한다. 비교의 문제는 차이에 대한 판단의 문제이다. (조너선 스미스, 『자리 잡기』, 방원일 옮김, 이학사, 2009, 45쪽.)

아마 차이에 대한 강조는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철학으로부터 종교학으로 파생된 경향일 거예요. 레비스트로스나 푸코 등의 연구에 자극을 받은 종교학자들이 각각의 신화와 종교의 아래에 놓인 서로 다른 구조적 틀에 주목하게 되었겠죠. 실제로, 철학이 종교학에 미친 영향은 브루스 링컨에게서 뚜렷하게 확인되죠. 링컨은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을 벗어나 신화에 대한 이데올로기 분석을 수행하기 위해 푸코와 바르트의 철학을 자신의 논의에서 사용하거든요. 이 점만 보더라도, 철학이 종교학 연구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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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미스


브루스 링컨

하지만 '동일성'과 '차이'라는 주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각각의 신화와 종교 사이의 차이로부터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일 거예요. 신화들을 발굴하고, 해독하고, 나열하는 작업이야 고고학자, 인류학자, 종교학자가 할 수 있겠지만, 그 신화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는 작업은 철학자가 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20세기에 프로이트, 융, 카시러, 엘리아데, 틸리히, 캠벨 같은 (넓은 의미의) '철학자'들은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이런 작업을 수행하려 했죠.

물론, 이 인물들은 여전히 '동일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종교학 연구가 이루어진 시대를 살았죠. 그래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 인물들의 작업을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이 인물들의 기획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엄격한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되는 오늘날이야말로 신화와 종교로부터 철학적 의미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철학과 종교학을 쌓아올린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가 아닌가 해요. 신화와 종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 그나저나, 더글라스 알렌이 위키피디아에서 '철학자'로 분류되네요. "내가 연구하는 철학 분야의 관점에서 보면"이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나듯이, 본인 스스로도 철학자라는 정체성을 지닌 것 같고요. 저는 이 사람 이름을 주로 엘리아데 연구에서 봐서 종교학자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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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건 다 제쳐두고, 신화가 무엇인지 정의하기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이 신화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이유 같습니다.

종교의 정의와 범위 자체도 논쟁적이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대충 아 이게 종교다 하는 패러다임티컬 케이스들이 있는데, 이제 신화는 그조차 불가능한 것같아요.

(2)

단적으로 <산해경> 같은 중국 고대 신화는 서사가 아닌 백과사전인데 이것도 신화인가? 고대 이집트에서 쓰여진 소설과 신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종교성의 유무? 그렇다면 신종교 중에서 외계인과 뱀파이어를 믿는 사람들의 내러티브 역시 신화인가?

작업정의조차 합의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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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드시 정의가 필요할까요? 오히려 '작업 정의'라는 말 그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관심대로 신화를 정의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가령, 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Mythologies)』라는 책은 자기 시대의 프랑스 문화를 일종의 '신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잖아요. 심지어 융의 『현대의 신화(Ein Moderner Mythus)』라는 책은 UFO 신드롬을 우리 시대의 '신화'로 해명하고요. 물론, 이런 식의 접근들이 대단히 자의적일 수 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겠지만, 뭐 철학하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참신하고 유의미한 결과물만 뽑아내면 되는 게 아닐까요?!?! (게다가, 어떤 점에서 '신화'라는 용어는 애초에 문학적 범주보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범주에 가까워보이기도 하고요. '한 개인이나 사회를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 정도의 의미로요.)

종교학자들께서 철학을 많이 이용해주신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네요. 그런데 이게 노파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저는 철학자가 타 분야에 직접 소매를 걷고 뛰어드는 것은 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철학자들이 타 분야에 어깃장을 놓는 것에 대해서 삐딱하게 보는 시각은 산재하고는 하니까요.

이건 또 위와는 독립적인 작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 한 가지 의문은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측면은 과연 신화가 다른 서사, 요컨대 소설이나 영화 등에 비해서 더 주목할만한 내재적인 가치가 있냐는 점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역사적/통시적 가치야 비할 바가 안되겠지만, 순수하게 '이게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살고 이해하는 바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말이죠. 요컨대 동등한 정도의 서사적 울림을 갖는 두 이야기 A, B 가운데 A는 고대 신화고 B는 현대 창작물이라고 한다면, A가 B보다 더 주목할만한 이유가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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