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식론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에 'justification'이 있죠. 우리말로는 '정당화(正當化)'라고 번역되는 단어 말입니다. 이 단어는 굉장히 여러 가지 철학적 맥락에서 (때로는 굉장히 전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단일한 방식으로 의미를 정의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주로 특정한 주장이 이유들로부터 추론적으로 도출될 때 "주장 p는 정당화된다."라고 이야기하죠.
(2) 흥미로운 것은, 'justification'이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단어라는 점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라는 그리스어 단어의 번역어입니다. 우리말로는 '칭의(稱義)'라고도 합니다. '의롭다고 함' 혹은 '의롭게 함'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들을 용서하시면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사건이 바로 '칭의'입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죠.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δικαιοῦται)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δικαιωθῶμεν) 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δικαιωθήσεται)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16)
(3) '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라는 단어는 '정의(justice)'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와 어원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정의의 여신이 '디케(Δίκη)'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시면 그 두 단어 사이의 연관성이 더 잘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정당화(justification)'와 '정의(justice)'가 서로 별개의 문제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저 두 단어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정당화'의 사건이 바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건인 것이죠.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때 이루어지는 정의를 '하나님의 정의(디카이오쉬네 테우,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라고 말합니다. (다만, 영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각각 'righteousness of God'과 '하나님의 의'라고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정의,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로마서 3:21)
(4) 그렇다면 여기에서 '정의'와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우리 철학 전공자들은 정의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상황에서 실현된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받아야 정의롭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정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정의 개념과는 매우 다릅니다. 신약성경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정의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5) 실제로, 에버하르트 융엘은 이 점을 매우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융엘은 하이데거의 제자였고, 리쾨르와 함께 「은유: 종교적 언어의 해석학에 대하여(Metapher: Zur Hermeneutik religiöser Sprache)」라는 논문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판넨베르크 및 몰트만과 함께 20세기 후반의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신학자이죠. 그는 자신의 주저 중 하나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서 하나님 없는 자들에 대한 칭의의 복음(Das Evangelium von der Rechtfertigung des Gottlosen als Zentrum des christlichen Glaubens)』에서 신약성경의 (특별히, 사도 바울의) '정의'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However, Paul's central statements about the righteousness of God are not to be taken simply in that way [Aristotelian way]. It is vital for a correct understanding that the Pauline concept 'never means penal righteousness'. It is, of course, true that in the traditions which Paul used, both Jewish and early Christian, the righteousness of God also meant that righteousness of God by which God himself is righteous. However, the very fact of God's being righteous is given new understanding by Paul; no longer does it have the sense of distributive justice. (E Jüngel, Justification: The Heart of the Christian Faith, J. F. Cayzer (trans.), Edinburgh: T&T Clark, 2001, pp. 61-62.)
그러나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바울의 중심적 진술들은 단순히 그러한 방식으로[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바울적인 개념은 '결코 형벌적 의로움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올바른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물론, 바울이 사용한, 유대적이면서도 초기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의미하였다는 사실도 역시 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그 사실은 바울에 의해 새로운 이해를 얻는다. 그것은 더 이상 분배적 정의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6) 융엘에 따르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정의롭게 함'(혹은 '의롭게 함')이라는 사건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정의란 언제나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관계 없이 혼자만 정의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가령, 혼자서 법에 적힌 규정을 모두 완벽하게 지키고서 "나는 법대로 다 행하였다. 따라서 나는 정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하다. 이제 나에게 법에 적힌 대로 내 몫을 달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굉장히 잘못된 태도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정의이기는 커녕 일종의 교만이라고 비판받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기 혼자서 "나는 정의롭다."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의로운 것은 죄인을 정의롭게(혹은 의롭게) 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Accordingly, God's righteousness consists for Paul in the fact that God is not righteous for his own sake, but that he is only righteous himself in so far as he is the one who provides righteousness for human beings. However, it is at this very point that this is the true righteousness, a righteousness which can never be satisfied with the righteousnesses of those who are righteous. (E Jüngel, Justification: The Heart of the Christian Faith, p. 64)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이 그 스스로는 의롭지 않으며, 오히려 그가 인간을 위하여 의로움을 제공하시는 분인 한에서만 의롭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의로움, 곧 의로운 자들의 의로움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의로움인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Over against the 'legal' understanding of this urge towards universal justice we have now achieved a gospel understanding of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allows us to state the proposition: 'God is righteous because of the fact that he declares or marks [unrigheous people] righteous.' (E Jüngel, Justification: The Heart of the Christian Faith, p. 75)
보편적 정의를 향한 이러한 열망에 대한 '법적' 이해에 반대하여, 우리는 이제 우리로 하여금 다음의 명제를 진술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복음적 이해에 도달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혹은 인준한다는 사실 때문에 의로우시다.'
(7) 신약성경의 정의 개념은 대단히 급진적입니다. 이 정의는 '법을 넘어서는 정의' 혹은 '법을 부수는 정의'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 속에 만연해 있는 정의에 대한 통념에 도전합니다. 즉, 우리는 흔히 법을 잘 지키는 것이, 혹은 법이 실현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법대로 해라!"라는 말이 정의에 대한 호소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법이 선과 악의 기준이고, 의로운 자와 의롭지 않은 자를 나누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런 정의의 맹점을 돌아보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정의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너무나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 '법'이 과연 정의로운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오히려 그 '법'에 의해 정의롭지 않은 자들로 판결된 사람들을 우리가 다시 포용하는 사건 속에서 법적 정의보다 더 근본적인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바로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서 장 발장은 '법적 정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받아야 하는 범법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법적 정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자베르 형사는 평생을 걸고서 장 발장을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법을 넘어서는 정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작품 속 미리엘 신부를 통해 드러냅니다. 미리엘 신부는 은식기를 훔쳐간 장 발장을 숨겨주고, 더 나아가 그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줌으로써, 장 발장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합니다. '의롭지 않은' 자였던 장 발장은 미리엘 신부를 통해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집니다. 신약성경의 관점을 따른다면, 바로 미리엘 신부가 장 발장에게 일으킨 사건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예수의 비유 중에서도 이런 역설적 정의와 관련된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16에 등장하는 소위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자신의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장터(아고라, ἀγορά)에 나가 일꾼을 모집하는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무 곳에도 고용되지 못하여 '할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아르고스, ἀργός)'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한 데나리온을 줄 테니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오전 아홉 시, 낮 열 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네 번이나 더 장터에 나가 직접 사람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그는 마지막에 온 일꾼들부터 불러서 그날의 일당을 정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늦게서야 일을 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자,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내심 자신들이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한 데나리온만을 주자, 아침부터 일을 한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인의 대답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마태복음 20:13-15)
(10)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포도원 주인의 정의 개념이 우리의 상식을 깬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 포도원 주인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람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고라에 나가 직접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당시 지주들은 청지기에게 포도원과 관련된 실무를 맡겨두고서 자신은 도시에서 화려하게 생활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주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고라로 가서 그 날 고용되지 못한 채 실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자기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이 행동은 이 포도원 주인이 그 마을의 경제적 약자들에게 대단히 관심이 많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압권인 점은, 그가 품꾼들에게 "적당한 품삯(무엇이든지 정의로운 것, ὃ ἐὰν ᾖ δίκαιον) 을 주겠소"(마태복음 20:4)라고 이야기하고서 일찍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 모두에게 그 시대 기준으로 하루치 일당(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일찍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한 만큼 더 받는 것이 '적당한 품삯(무엇이든지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포도원 주인은 모두에게 하루치의 일당을 주는 것이 '적당한 품삯(무엇이든지 정의로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1) 이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몫을 분배하는 공산주의적 경제 체제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핵심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생계를 마련해 주는 일이 바로 포도원 주인의 정의라는 점입니다. 즉, 아고라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실직자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들을 고용한 것은, 단순히 일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그 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직장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는 고용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날을 살아갈 자격을 주는 일이 포도원 주인이 실현하고자 했던 '정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바로 그 정의를 강조하기 위해 매우 의도적으로 일찍 온 일꾼들과 포도원 주인을 대립시킵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정의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는 정의가 바로 예수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의라고 말입니다. 연세대학교 김학철 교수님이 이 이야기를 다음 영상에서 아주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비록 김학철 교수님은 예수의 비유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사이의 유사성에 좀 더 주목한다는 점에서 저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취하지만,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의 요지는 같습니다.)
(12) 실제로, 신약성경의 정의론이 지닌 이런 급진성은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을 통해 자주 발견되곤 합닌다. 데리다가 '법'에 대한 '정의'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벤야민이 법을 수립하는 '신화적 폭력'과 법을 무너뜨리는 '신적 폭력'을 대비시키고, 타우베스나 아감벤이 '예외상태'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법의 지배를 비판할 가능성을 모색할 때, 이 철학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상적 기원으로 유대-그리스도교 성경을 제시하곤 합니다. 이민자, 난민, 불법 체류자 등 기존 법 질서 내에서는 '범법자'로 다루어지는 소수자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하기 위해 유대-그리스도교에서 발견되는 급진적 정의 개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현대철학에서의 '신학적 전회(theological turn)'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13) 물론, 신약성경의 이런 급진적 정의론이 현실의 정치와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준다는 낭만적인 명목으로 우리가 무작정 이민자나, 난민이나, 불법 체류자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우리가 거둬 들일 수 있는 세금도 한정되어 있고,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일자리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단순히 무책임한 일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신약성경의 급진적 정의론이 국가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애초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우리 시대에는 이런 정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것조차 힘듭니다. 심지어, 저는 이런 정의를 개별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14) 오히려, 이런 신약성경의 정의가 실현되려면, 이 정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정의를 점진적으로나마 이루어나가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진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결점이 많고 실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저는 급진적 정의를 위한 희망이 (철학자들의 학회나 정치가들의 의회가 아니라) 교회나 교회에 준하는 신앙 공동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개신교 교회를 포함하여 종교 기관들이 실제 우리나라의 전체 복지 사업에서 담당하고 있는 엄청난 비중만 보아도 증명되죠. 아무리 종교가 오늘날에는 불신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그 종교들이 없으면 복지 사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5) 그러나 급진적 정의의 실현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저는 우선 이런 정의를 사유해 보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는 것이 정의라는 관점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서 의심한 적조차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 개념을 반성해 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몫'으로 상정하고 있는 기준이 과연 정말로 정의로운지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각자의 몫'을 받지 못하도록 배제된 사람들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저는 신약성경의 '칭의론(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이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시대를 위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으로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