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건의 『어린이 신학』을 읽었다. 최근에 큐티를 하다가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가복음 19:14)라는 구절에 주목하게 되어서, 이 구절과 관련된 자료를 더 찾아보던 중에 이신건의 책을 접하였다.
이신건의 『어린이 신학』은 '어린이'라는 주제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사실, 어린이들에 대한 환대는 예수의 대단히 특징적인 면모 중 하나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가로막는 모습을 보면서 분개하였을 정도였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어린이의 존엄이나 지위가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게 평가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1세기 유대인인 예수가 어린이들에게 보여준 호의와 관심은 확실히 독특하다. 오히려 2,000년동안 예수에 대해 연구한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동안 '어린이'라는 주제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어린이'를 신학의 중심 주제로 부각시켜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기"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이 책의 기획은 (얼핏 대단히 야심차고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진정으로 고유한 측면에 잘 주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어린이 예수'라는 이미지를 주장하기 위해 이신건이 사용하는 성서적 근거들이 다소 약하다는 점이다. 가령, "아바(abba) 아버지"라는 예수의 어법으로부터 '어린이 예수'라는 그리스도론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여기서 이신건은 '아바'라는 예수의 어법에 대한 요아킴 예레미아스(J. Jeremias)의 분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아마도, 이신건이 조직신학자이고, 이 책의 출간년도가 1998년이다 보니, 1988년에 제임스 바(J. Barr)가 예레미아스에 반대하여 쓴 유명한 논문인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Abba Isn't Daddy)」를 참고하지 못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바'를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예레미아스 이후의 연구들이 '어린이 예수'에 대한 이신건의 주장을 곧바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제임스 바를 비롯한 이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바'라는 표현이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깊은 친밀감과 편안함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다만, 오늘날에 이 주장을 설득력 있게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신건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엄격한 성서신학적 논증들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적 이미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이신건과는 약간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신건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어린이의 이미지를 주로 '작은 자' 혹은 '약한 자'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예수가 어린이를 환대한 것은 약한 자에 대한 환대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마가복음 10장에서의 어린이가 약한 자라기보다는 '성가신 자'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어린이를 가로막은 이유는, 어린이가 쉽게 통제되지 않고, 매번 말썽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주의와 관심을 줘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는 귀찮고,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른들의 질서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어린이를 환대한 것은 (단순히 '약한 자'를 환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자들에 대한 환대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자들, 그래서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만드는 자들, 바로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자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 놓는 일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