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융엘의 기독교 신앙의 언어론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구성된 개신교 신학 안에서 언어와 종교라는 두 단어는 매우 어울려 보이지만 신학사적으로 이 두 단어는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종교개혁 이후 17세기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학을 교회 권위 아래 잘 이해된 성서 문자에 대한 습득으로서 파악했다. 신학의 목적은 성서의 문자를 인식(notitia)하고 동의(assensus)하고 신뢰(fiducia)하는 것 이기 때문에 신학은 성서해석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 본질로서 이해된 성서의 재현을 지향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구프로테스탄트의 문자적 이중영감론이 붕괴된 이후로 개신교 신학은 학 문으로서 신학의 방법론으로 종교개념을 도입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성서언어의 재현이 아니라 종교적 이념의 묘사 또는 실현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신학과 철학은 종교개념 이 인간의 소질인 이성, 행동 그리고 감정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신칸트 학파 철학자 빈델반트는 종교개념을 이성, 행동 그리고 감정의 근본구조인 초월성에 분류시켰다. 하지만 20세기의 전환기에 이 인간학적 종교개념은 소위 변증법적 신학의 하나님 말씀 신학에 의해 거부되었고, 다시 언어적 인식이 신학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특히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 학 I/1에서 1장의 제목을 “하나님 말씀론. 교의학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교회적 언어를 신학적 인식론의 중심으로 다시 제시하였다. 바르트가 이렇게 다시 신학을 교회적 언어론으로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신학적 환경 안에서 교 회적 언어론으로서 신학은 다른 문화적 언어와의 대화를 차단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따라서 오늘 날 신학적 상황은 소위 문화적 전환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종교와 문화의 의미이론적 관계에 집중한다.
최근 독일어권 신학이 언어보다 종교와 문화의 의미론적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 도 우리는 결코 언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언어, 의미체계 또는 의미적 코드를 통해 자기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오늘날 상황 안에서 나타나는 바르트 신학의 문 제점은 바르트가 교회라는 매우 개별적 공간 안에서 신학적 언어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문화적 상황 안에서 종교문화 또는 종교이론과 언어에 대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에버하르트 융엘은 20세기 후반에 신학의 언어성을 해석학적으로 탐구했다. 물론 그는 언어를 종 교이론적 구성 안에서 탐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69년 그의 논문 “Gott- als Wort unserer Sprache(우리의 언어로서 하나님)”에서 일반언어성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언 어의 관계를 살펴본다.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어사건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통해 신앙의 언어와 세계의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우리의 언어로서 하나 님이라는 단어의 진술 가능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며 언어 상실은 기독교 신앙의 위협이
다. 이런 점에서 융엘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기 위한 시도이다. 융엘은 방법론적으로 언어의 기능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게르하르트 에벨링이 이 단어를 보편적 인간경험의 장소에서 언어사건으로 제시한 생각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에벨링은 말씀을 언제나 시간적 상황과 연관해서 고려한다. 그에게 인간의 말씀상황이 하나님 진술의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인간의 경험지평에서 다뤄져야 했다. 그러나 융엘은 하나님의 자기정체성이 인간의 말씀 또는 언어 상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융엘은 에벨링과 다르게 하나님이 언어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이미 구체적인 언어 사건이다. 에벨링에게 실존적 상황으로서 인간의 말씀상황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언어적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어의 전제이지만, 융엘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언어 사건에 상응한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사건으로서 언어의 상응으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은 단순한 정보전달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말씀은 우리의 언어와 세계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고, 우리 언어의 한계를 통해 해석된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융엘에게 사건으로 진리는 언어와의 관계 안에서 접근 가능하며, 하나님 말씀의 사건은 인간적 언어의 관계 안에서 성립한다.
융엘은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언어를 경험지평 또는 문화적 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계시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언어사건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으로 침투함으로써 언어적 신-진술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에서 인간에게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담화행위이다. 하나님이 계시 가능한 존재라면 그때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말씀 안에 현존하며,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인식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객관적 존재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게 된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입술로 언급되는 사건이 신앙이다. 이제 융엘은 신앙과 하나님 진술가능성을 일치시키면서 하나님이라는 단 어의 사용을 오직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오직 신앙에 의한 진술 안에서 하나님은 입증되며, 따라서 신앙 밖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말 할 수 없다. 융엘에게서 이 신앙 안에서 계시, 언어 그리고 사유는 일치 또는 상응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을 통해 인식되는 신인식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제한되며,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융엘에게 신앙 안에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융엘에게 있어서 언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신앙의 현실성의 일치를 의미한다. 융엘의 언어이해는 근본적으로 신앙 안에서 하나님 존재의 자기계시로부터 형성된 계시와 언어의 일치를 의미함으로써, 언어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적 언어로 이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인간적 언어적 기능 안에서 이해됨에도 불 구하고 융엘은 언어와 하나님의 존재를 일치시킴으로써 언어는 근본적으로 신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인간적 언어 안에서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일상 언어적 기능을 가질 수 없다. 융엘의 종교적 언어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 언어를 통해 표현 가능하지만 언어의 기원과 속성은 인간적 언어를 넘어서 탈세계적(überweltlich)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선포사건에 서 출발하는 바르트 신학을 사색적으로 전환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융엘의 종교적 언어는 이 사색적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의미집단들 사이 의사소통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에버하르트 융엘은 아마도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우선 불트판 학파의 배경 안에서 형성되었고, 따라서 그는 20세기 후반 신학의 언어성을 푹스와 에벨링과의 연결 속에서 해석학적으로 탐구하였다. 그와 함께 융엘은 그의 책 “Gottes Sein ist im Werden”에서 불트만 학파와 바르트주의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는 후기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과 바르트의 신학적 데카르트주의의 비판을 결합함을 통해 근대 안에 주관적 자기의식에 반대한 신인식의 새로운 기초를 세웠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신인식의 근본난제는 하나님 사유불가능성으로부터 신학의 무언어성이 야기된다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융엘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말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결합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형성된 신앙의 언어론을 그의 신인식의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신은 자기자신을 통해 계시한다”는 신인식의 명제를 그는 “신은 신으로부터 형성된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다”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신 인식의 고유한 장소는 근대의 주체성이 아니라 언어이다.
그는 1969년 그의 논문 “Gott- als Wort unserer Sprache”에서 일반언어성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종교적 언어의 관계를 살펴본다.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어사건으로써 이해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통해 신앙의 언어와 세계의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의 언어로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진술 가능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며 언어 상실은 기독교 신앙의 위협이다. 이런 점에서 융엘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기 위 한 시도이다. 그는 게르하르트 에벨링이 이 단어를 보편적 인간경험의 장소 안에 있는 언어사건으로 제시한 생각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에벨링은 말씀을 언제나 시간적 상황과 연관해서 고려한다. 그에게는 인간의 말씀상황이 하나님 진술의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인간의 경험지평에서 다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융엘은 하나님의 자기정체성이 인간의 언어 또는 언어적 상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에벨링과 다르게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어의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이미 구체 적인 언어 사건이다. 에벨링에게 실존적 상황은 인간의 언어적 상황이고, 이 언어적 상황 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진술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어의 전제이지만, 융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언어사건에 상응한다.
융엘은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언어를 경험지평 또는 문화적 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계시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언어사건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으로 침투함으로써 언어적 신-진술은 하나님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일방적 담화행위이다. 하나님이 계시 가능한 존재라면, 그때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말씀 안에 현존하며,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인식된다. 하나님의 객관적 존재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사건이 신앙이다. 이제 융엘은 신앙과 하나님 진술가능성을 일치시키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오직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오직 신앙에 의한 진술 안에서 하나님은 입증되며, 따라서 신앙 밖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말 할 수 없다. 융엘에게 이 신앙 안에서의 계시, 언어 그리고 사유는 상응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통해 인식되는 신인식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제한되며,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융엘에게 신앙 안에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의미한다. 따라서 융엘의 언어이해는 근본적으로 신앙 안에서 하나님 존재의 자기계시로부터 형성된 계시와 언어의 일치를 의미함으로써, 언어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적 언어로 이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언어적 기능 안에서 이 해됨에도 불구하고 융엘은 언어와 하나님의 존재를 일치시킴으로써 언어는 신앙의 비추론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융엘에 따르면 이 존재와 언어의 상응 안에서 신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관적 소질을 통해서 파악될 수 없다. 신학적 인식은 인간적 삶과 죽음의 은폐성 안에서 계시 가능한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신앙 안에서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서 신학은 계시를 사유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계시의 비추론성으로 인하여 신은 더 이상 필연적이지 않게 되고, 우연성은 더 이상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연적인 것 보다 더 크다.” 따라서 하나님은 강림의 사건으로부터 사유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심을 숙고하는 인식으로서 신학은 신앙 안에서 고유한 방법을 가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세 계-, 그리고 인간의 자기관계를 변혁시킴으로서 신학은 사유의 혁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융엘은 우선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책임적 진술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창조와 피조물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신학적 인식의 새로운 가능성인 하나님 사유가능성과 진술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와 함께 신앙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희망의 근거로부터 행동한다. 상호적 타자존재의 공동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행위의 근거이기 때문에 신앙은 탁월학 사회적 사건이며, 신앙인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실존한다. 그러므로 융엘에게 있어서 인간은 이 신앙 안에서 하나님에게 상응하며, 그런 점에 있어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부터 인간은 고통에 침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수난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원 한 긍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은 이 고통 가운데 개인의 참여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을 하나님 자기자신의 계시로서 언어 안에서 진술하는 것이다. 융엘의 책임적 하나님 진술로서 신학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언어와 존재의 일치를 통한 하나님 진술가능성을 의미한다. 결국 융엘의 신앙의 언어론으로 신학적 인식론과 종교철학은 다종교적 다문화적 현실 안에서 다양한 의미집단과의 대화원리를 보편적 원리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적 구조 안에서 대화원리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는 언어철학적 전제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언어적으로 서술하는 그리스도교의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교와 다른 문화적 의미집단 사이의 대화를 위한 그리스도교적 언어론을 구성한다. 주체와 타자의 구분과 상호 인정은 결국 주체의 명확한 자기이해 안에서 구성될 수 있지 자기 자신의 포기 안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융엘은 이 그리그도교적 주체존재의 확립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구성을 내적인식에 따른 그리그도교적 언어론의 구성을 시도했다. 물론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그는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그의 언어론을 너무 사색적으로 구성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신학의 대상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이며, 이 그리스도교는 오늘날의 내부자적 관점에서 언어적으로 서술된 언어적 구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언어적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자기이해의 반성적 서술을 의미함으로써 그리스도교라는 언어공동체가 신론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엘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이 하나님이 언어적 존재라고 진술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언어적 본질규정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