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철학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네 편에 대한 철학적 해설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다.”라는 소개는 굉장히 역설적이다. 나는 키르케고르가 자신에게 따라붙는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 앞에 다시 ‘실존주의’ 혹은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추가적인 명칭이 붙는다고 해도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애초에 철학적 입장, 이론, 체계 따위를 세우려고 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모든 작업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적 구조 일반에 대한 분석이나 ‘신’이라는 개념의 형이상학적 함의에 대한 분석은 결코 키르케고르의 관심이 아니다. (적어도, 이러한 논의가 키르케고르의 1차적 관심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가장 싫어했을 방식으로 키르케고르를 소개하고자 한다. 즉, 그를 한 명의 ‘현대철학자’로서 다루고자 한다. 심지어 그가 덴마크 국교회를 대상으로 쓴 네 편의 기독교 강화를 마치 강단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논문인 것처럼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나는 현재 대학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내가 전제하고 있는 ‘철학적’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키르케고르의 가장 기독교적인 강화조차 가장 철학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둘째로, 키르케고르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키르케고르에게 철학적 측면이 없다는 결론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키르케고르의 저술에는 이전까지의 철학에 도전하는 수많은 혁명적 통찰이 내재되어 있다. 셋째로, 키르케고르는 실제로 현대철학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저술들이 20세기 철학의 흐름을 뒤바꾸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오독에서 발생한 해프닝 정도로 여겨질 수 없다.

1. 키르케고르와의 만남

내가 키르케고르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당시의 내 신앙에는 (교회에 오래 다닌 신앙인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받아들일 법한)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전형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가령, (1) 하나님은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져볼 수는 없는 분이시라고 하더라도 저 어딘가 초월적 세계에 분명 존재하신다. (2)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신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 책이다. (3) 성경의 내용은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지식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스스로에 대한 부풀어 오르는 자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던 청소년기의 나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을 적극적으로 변증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득했다. 나는 그 시절에 잡다한 교양 철학서들과 변증 서적들을 찾아 읽으면서 내 신앙에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 대해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베드로전서 3:15)하였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신앙에 대해 내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든 철학자였다. 나는 ‘키르케고르’라는 이름을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 참고서에서 접했다. 참고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한 ‘아케다(Aqedah)’ 사건에 대한 소개와 함께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대한 (더 정확히는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었다. 즉,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세기 22:2)라는 목소리가 정말 하나님의 목소리였는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정말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자신이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 아닌지, 악마의 거짓된 속삭임을 들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따르기로 선택하였을 뿐이다. ‘신앙’이란 바로 누구도 정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따를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신앙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과점은 나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는 키르케고르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이 혼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실존적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비록 기독교인은 아케다 사건과 같은 신앙의 문제를 통해 실존적 상황을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독교인만 실존적 상황을 체험한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신념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실존적 상황을 체험한다. 가령,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 A 대학에 지원해야 하는지 B 대학에 지원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보자. 둘 중 어느 대학으로 지원하는 것이 그 고등학생의 삶에서 가장 올바른 길인지를 결정해줄 객관적 지표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와 학원에서 지난 5년 간 두 대학의 입시 평균경쟁률을 알려주고, 장학 제도를 알려주고, 교수 목록을 알려주고, 졸업생 취업률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학생이 그렇게 주변으로부터 받은 객관적 지표 자체가 그 학생에게 어느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결국 마지막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온전히 그 학생의 몫으로 남는다. 그 학생은 어떠한 객관적 지표에도 의존할 수 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놀랍도록 새로운 생각 역시 들어있었다. 나는 키르케고르를 통해 ‘진리’가 단순히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을 통해 밝혀지는 실증적 사실에 국한될 수 없다는 점을 배웠다. 즉,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상황에 직면한다. 작게는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어야 할지 짬뽕을 먹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부터 크게는 A 대학에 지원해야 할지 B 대학에 지원해야 할지, A 회사에 취직해야 할지 B 회사에 취직해야 할지, A와 결혼해야 할지 B와 결혼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말이다. 여기서 자연과학과 역사학이 알려주는 실증적 사실은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4,400km이다.”라든가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다.”라는 지식들은 적어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는 진리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진리란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따르겠다고 선택한 대상이다. 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선택한 신념이 ‘진리’이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는 진리란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인 것이다.

2. 키르케고르의 사상

따라서 나는 키르케고르가 우리 삶의 실존적 상황에서 우리가 진리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철학자라고 이해한다. 비록 키르케고르가 기독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언어를 따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주체성’과 ‘진리’의 문제에 대해 다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키르케고르를 반드시 기독교에 국한된 문제를 다루는 인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나는 ‘실존’, ‘절망’, ‘불안’, ‘순간’, ‘죄’, ‘신앙’이라는 키르케고르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독해하고자 한다. 즉, (1) 모든 사람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존재 방식인 ‘실존’을 지니고 있다. (2) 자신에게 찾아온 선택의 상황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 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모방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망’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 (3)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대신하여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선택을 내려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4)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는 ‘순간’을 체험한다. (5) 그의 새로운 정체성은 그가 이전까지 지닌 ‘죄’를 폭로하여 그를 부끄럽게 만들지도 모른다. (6) 그럼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혹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실존: 실존이란 선택의 갈림길에 끊임없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이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문제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미적 향락에만 집중하고자 할지도 모른다(심미적 실존). 다른 누군가는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문제를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동의하는 윤리, 법, 질서, 관습 따위에 의존해서 결정하려고 할지도 모른다(윤리적 실존).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이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문제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결국 어느 순간에 우리 스스로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즉, “인생의 모든 곳에는 갈림길이 존재한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처음으로 갈림길에 선다. 이것이 그의 완전성perfection이나 장점은 아니다. 그가 마지막에 선 자리는 그의 선택과 그의 책임이다. (마지막에는 갈림길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이방인의 염려』, 64)

절망: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선택을 피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혼자 서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해버린다. 즉, 그들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문제를 결정하는 ‘단독자’가 되려 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맞추려 하는 ‘군중’이 되려 한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사는 ‘이방인’이 되려 한다. “세속적이면서도 겁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을 상상해보라. 모든 것에서 그들의 최고의 법칙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비굴한 배려slavish regard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모든 곳에서 그들이 칭찬받고자 하는 저 비기독교적 관심이다. 결국 그들의 칭찬받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는 데 있다.”(『기독교의 공격』, 245) 주목해야 할 사실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포기하는 모습이 바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군중’과 ‘이방인’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사람은 사실상 자기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든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든지 인생에 대해 절망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러한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일컫는다.)

불안: 진정으로 실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이 놓인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대신하여 인생을 결정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낀다. 즉,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불확실성이란 단순히 자연과학과 역사학이 가르쳐주는 실증적 사실을 모으는 것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실증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확실성에도 의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마도’라는 말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아마도’라는 말에 담겨 있는 근본적 불안은 누구도 없앨 수 없다. “여태껏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도, 여태껏 살았던 가장 부족한 사람도, 다음 순간을 장담하는 문제일 때 동일하게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최소한의 작은 사건을 설명하는 문제이더라도 동일하게 멀리 갑니다. 그들은 동일하게 ‘아마도’에 도착합니다. […] 죽을 운명인 어떤 인간도 이 ‘아마도’를 돌파한 적도, 단절한 적도 없습니다.”(『성찬의 위로』, 58-59)

순간: 불안 속에서 자신이 믿는 진리를 향해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은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는 순간을 체험한다. 그는 그동안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맹목적으로 반복되던 일상을 벗어나 삶을 자신이 선택한 무한한 가치로 가득 채우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실존의 모습을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을 통해 묘사한다. 즉, 이러한 실존에게는 이제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이 열린다. 이전까지 그가 살아온 삶은 언젠가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릴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가 살아갈 삶은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을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된다. 따라서 영원한 가치 앞에서 시간적 삶은 하나의 ‘순간’으로 체험된다. 여기서 ‘순간’이란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 앞에서 시간적 삶을 지나가버릴 하나의 순간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바로 그 지나가버릴 하나의 순간 속에서 시간적 삶이 영원한 가치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체험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이해할 때, 시간은 순간이다. 영원히 이해할 때, 순간은 단 한 번이다. 시간은 무익하게 중요해지길 바란다. 순간들을 계산하고 또 계산하고 순간을 추가한다. 그러나 영원이 다스릴 때, 시간은 한 번 그 이상 멀리 갈 수 없고, 한 번 그 이상이 될 수도 없다.”(『고난의 기쁨』, 52)

: 새로운 가치 앞에 서게 된 사람이야 말로 이제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이전까지 자신이 무비판적으로 살아온 안일한 삶에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도록 요구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거기에는[복음의 요구에는] 또한 무거운 짐이 존재한다. 세속적인 어떤 힘도 당신 어깨 위에 이 짐을 지게 할 수 없다. 또한 당신이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없듯 어떤 사람도 이 짐을 가져갈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죄책guilt과 죄책에 대한 의식이다. 혹은 더 무겁게, 죄sin와 죄의식이다.”(『성찬의 위로』, 89)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만이 우리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만든다고 하기는 어렵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가지겠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가지는 모든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령,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로 결단한 사람은 아직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자애로운 부모가 되기로 결단한 사람은 아직 자녀에 대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현명한 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사람은 아직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구체적인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로 결단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신앙: 따라서 키르케고르에게는 삶에 만연해 있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결단한 진리를 끝까지 따르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라고 일컬어진다. 한편으로, 신앙은 우리 삶을 모두 던져서라도 선택해야 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우리는 열정과 기대 속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 가져다 줄 무한한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앙은 어떠한 진리도 실증적 사실 위에서 입증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가 받아들인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 즉, “믿음이란 확신이요, 복된 확신으로,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존재한다. 믿음을 한 측면에서 볼 때, 천상의 것이, 영원한 구원이 반사된 모습reflection이 그 속에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단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순전한 두려움과 떨림이 보인다.”(『기독교의 공격』, 71) 여기서 ‘신앙’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신앙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학자가 아직은 결과가 불투명한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실험에 전념한다면, 그는 이미 일종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방관이 생명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목숨을 내놓는다면, 그는 이미 일종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사가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일종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틸리히가 강조한 것처럼,)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궁극적 대상을 향해 던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신앙에 따라 (혹은 신념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키르케고르가 쓴 네 권의 기독교 강화 역시 단순히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으로 읽힐 필요가 없다. 기독교 강화는 기독교인들을 넘어서 철학자들에게까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물론, 기독교 강화가 1차적으로 당대 덴마크 국교회를 대상으로 쓰인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보여주고자 한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란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호소력이 있다. 따라서 나는 키르케고르의 가장 기독교적 저서들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권의 기독교 강화를 가장 철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1) 『이방인의 염려』는 실존적 선택을 포기하고서 세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과 실존적 선택을 떠맡아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대비시키고 있다. (2) 『고난의 기쁨』은 자신이 선택한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3) 『기독교의 공격』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주체의 관점에서 삶을 만들어나가길 포기한 군중에 대해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4) 『성찬의 위로』는 자신의 진리에 대한 신념을 지닌 사람이 얻게 되는 위로를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의 염려』: 키르케고르는 마태복음 6:24-34에 등장하는 ‘이방인의 염려’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을 날카롭게 대조한다. 즉,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대한 염려는 모두 이방인의 염려이다. 이방인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정을 얻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들은 실존에 만연해 있는 불안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삶을 든든하게 보장해 줄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방인의 염려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이 생계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이방인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삶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하지 못하는 새나 백합과는 달리) 자신이 선택한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이방인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자유롭다. “새의 가벼움과 비교한다면, 이방인은 돌처럼 무겁고 괴롭게 짓눌려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비교한다면, 새는 여전히 중력의 법칙에 영향을 받고 있다.”(『이방인의 염려』, 69) 이러한 ‘이방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대조가 바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과 자신이 선택한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 사이의 대조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안정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잡다한 모든 노력들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난의 기쁨』: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신앙에 따라 살기 위해 반드시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본래적 실존은 세상 속에서 신념에 따라 살기 위해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혹은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지향하는 영원한 가치 앞에서는 시간 속에서 당하는 고난이 단지 한 순간 겪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영원 속에서 모든 순간들은 언제나 상쇄되고 만다. 그런 식으로 순간들은 불과 한 번이 되고 만다. ‘단 한 번만 고난을 당한다’는 이 건덕적인 위로를 결코 놓지 말라. 이것으로, 곧 영원으로 당신 자신을 보호하라. 당신의 삶에서 한 번 그 이상 고난당하는 일이 없도록 당신 자신을 보호하라.”(『고난의 기쁨』, 57) 따라서 고난이란 자신의 실존을 떠맡고자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부정적 영향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누군가가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진리를 향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고난은 영원한 가치를 향한 ‘기쁨’을 일으킨다. “환난은 소망을 구해온다. 기독교는 진리가 고난당해야 하는 모든 반감과 핍박과 불의를 통해 정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듯이(결론에 도달하는 얼마나 놀라운 방식인가!), 환난의 극한 상황에서도 마치 이와 같다. 환난이 가장 끔찍하게 압박할 때, 거기에는 이런 결론, 이런 그러므로ergo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소망을 품을 만한 영원이 존재한다.”(『고난의 기쁨』, 94-95)

『기독교의 공격』: 기독교 신앙은 자연과학과 역사학이 제시하는 실증적 사실을 통해 변증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믿음의 전통은 실존이 추구할 만할 진리가 안정된 토대 위에 성립할 수 있다는 헛된 생각을 애초에 거부한다.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기독교적인 것을 방어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방어가 필요 없다. 어떤 방어로도 도움을 받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공격이다.”(『기독교의 공격』, 5) 즉, 신앙을 가진 (혹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뒤흔들어놓고자 한다. 그들이 서 있는 ‘평화와 안전’이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함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신앙을 가진 (혹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진리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진리에 미치지 못한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말하는 것, 첫 번째로 말해야만 하는 것은 죄다. 당신이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기독교의 공격』, 65) 따라서 신앙이야 말로 (혹은 신념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적인 정신의 활동이다. 자신의 진리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만이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성찬의 위로』: 세상에 맞서 홀로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위로가 주어진다. 그는 결코 엄격한 죄의식에만 매몰되어 삶의 기쁨을 상실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엄격한 자각은 그가 진리를 쫓는 과정에서 누리는 엄청난 기쁨을 덮지 못한다. “기독교는 절대 무거운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기쁜 나머지 모든 무거운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가벼운 마음을 가진 자와 반항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할 뿐입니다.”(『성찬의 위로』, 54-55)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죄’가 심각한 문제인 만큼,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죄의 용서’ 역시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이다. “[…] 성찬대 앞에서 죄와 죄책, 당신의 죄와 죄책에 대한 배상satisfaction이 선포된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요구가 더욱 크고, 이것이 더욱 필요할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한층 더욱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이것을 깨닫는다. 그때, 축복의 필요가 한층 더욱 분명해진다. 혹은 축복이 전부임을 깨닫는다.”(『성찬의 위로』, 213) 이러한 기쁨은 그리스도인처럼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체험된다. 즉, 도달해야 하는 진리의 기준이 높을수록, 그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은 작아진다. 그러나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작아질수록, 도달해야 하는 진리의 기준은 더욱 우리를 매료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자각하면서도 우리가 선택한 진리를 추구하길 포기할 수가 없다. 자신이 선택한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삶인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삶인 것이다.

4. 키르케고르의 영향

키르케고르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제시한 통찰은 이후 20세기 철학의 흐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키르케고르의 논의는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고, 실존의 구조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켰으며, 근대의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다양한 사조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크게 다섯 가지 관점에서 키르케고르가 현대철학에 준 통찰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인간학적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절망과 불안 등 현대인이 겪는 다양한 정서적 체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제시한 ‘심리학자’로 여겨진다. (2)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주목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여겨진다. (3) 현상학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모든 존재자가 우리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현상학 이전의 현상학자’로 여겨진다. (4)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보편적 법질서가 인간과 분리되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법실증주의의 선구적 비판자’로 여겨진다. (5) 언어철학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규범적 질서의 가장 밑바탕에 인간의 실존 방식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프래그머티스트’로서 여겨진다.

인간학: 키르케고르의 저술들은 가장 먼저 인간의 심리적 체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으로 주목을 받았다. 가령, 우리 자신의 실존을 뒷받침해 줄 아무런 객관적 토대도 존재하지 않는 인생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모습, 그 불안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포기하고서 군중 속에 숨어 ‘절망’에 빠지는 모습, 우리 자신이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각에서 ‘죄의식’을 갖게 되는 모습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기술은 20세기의 다양한 문학가와 정신분석학자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그 이외에도, (「유혹자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연애 관계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심리 상태에 대한 재치 있는 묘사 역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심지어 “신은 죽었다.”라는 표어로 잘 알려진 니체조차 덴마크의 저술가인 기오 브란데스를 통해 키르케고르를 ‘심리학자’로서 접하였다. 브란데스는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키르케고르를 “가장 깊이 있는 심리학자들 중 하나”라고 소개해 주었고, 니체 역시 브란데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자신이 “키르케고르의 심리학적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실존주의: 20세기 초반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키르케고르가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 체험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인간의 근원적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가령,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이란 인간이 가끔씩 체험하는 병리적 감정 상태 정도로 그 함의가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을 지지해 줄 아무런 토대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근원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앞에서 근원적으로 불안을 체험한다. 다만, 누군가는 불안을 손쉽게 무시해버리고, 누군가는 불안을 ‘불안장애’ 같은 병리적 현상으로 발현시키고, 누군가는 불안 앞에서 자신의 진리를 향한 실존적 결단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분석은 (야스퍼스와 마르셸의 철학처럼) 서양의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수행될 수도 있고,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처럼) 무신론적 반항으로부터 획득될 수도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키르케고르가 기독교 신앙에 담긴 인간 이해를 철저하게 개진하여 실존주의를 촉발시킨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공통적으로 동의한다.

현상학적 존재론: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20세기 초반의 현상학 운동과 결합되어 급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일으킨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하이데거이다. 그는 대상이 의식의 지향적 태도에 의존한다는 현상학의 통찰과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키르케고르의 통찰을 자신의 존재론에서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그의 존재론은 (비록 후기 사유에서는 ‘전회’가 일어나긴 하지만) 주체로서의 현존재가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현존재와 독립된 영원한 형이상학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가 무엇을 결단하는지가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좌우한다. 가령, ‘칼’이라는 존재자는 요리사가 되기로 결단한 현존재에게는 요리 도구로서 존재하고, 강도가 되기로 결단한 현존재에게는 범행 도구로서 존재한다. 칼의 의미는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에게 있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를 강조한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현상학적 존재론을 통해 철학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 이외에는 (혹은 ‘나에게 있어 존재하는 존재’ 이외에는) 어떠한 진리도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한 세기 뒤에 출현할 현상학적 존재론을 어렴풋이 예감한 철학이었던 것이다.

법철학과 정치철학: 키르케고르는 20세기 초반의 법철학에서 시작하여 최근의 급진적 정치철학에까지 이어지는 논의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결단주의를 주장한 법철학자인 슈미트가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지목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가 바로 키르케고르이다. 즉, 미리부터 결정된 객관적 법조문을 통해 각각의 사안에 대해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법실증주의의 가정은 완전히 허구이다. 우리는 실증적 사실에 근거하여 법률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무엇이 기존 법이 적용될 수 있는 정상상태이고 무엇이 기존 법이 적용될 수 없는 예외상태인지는 법조문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상상태와 예외상태를 가르기 위해서는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결단’이라는 실존적 요소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이었다. 바로 이러한 입장을 둘러싸고서 ‘법’, ‘예외’ ‘주권’, ‘생명’, ‘폭력’, ‘독재’ 등을 주제로 수많은 정치철학적 논쟁이 벌어진다. 슈미트의 입장이 법규범을 초월하는 주권자의 존재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미트는 초법적 주권자인 히틀러를 옹호한 나치 부역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벤야민, 타우베스, 아감벤 등 슈미트 이후의 정치철학자들은 어떻게 슈미트의 키르케고르적 통찰을 받아들이면서도 슈미트의 국가주의적 면모를 제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언어철학: 잘 알려지지 않은 키르케고르의 은밀한 계승자 중 한 명으로 영미권 언어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키르케고르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지난 세기에 단연코 가장 심오한 사상가였지. 키르케고르는 성자였어.”라고 극찬하였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종종 키르케고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평가가 비트겐슈타인의 윤리관과 종교관을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가령,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그은 뒤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선언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믿음이란 사유가 끝나는 곳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신앙을 사유 너머에 남겨둔 것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법실증주의를 비판한 슈미트처럼) 규칙을 따르는 과정이 ‘삶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지적한 것도 키르케고르가 객관적 법칙에 대한 실존의 우선성을 강조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문헌적 증거를 통해 추적할 수는 없다. (키르케고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은 그의 언어철학 저술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몇몇 핵심적 측면에서 동일한 통찰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둘 사이의 연결성이 정당할 경우 주체적 ‘실존’을 강조하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프래그머티즘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

키르케고르, 쇠얀., 『이방인의 염려』, 이창우 옮김, 카리스아카데미, 2021.

키르케고르, 쇠얀., 『고난의 기쁨』, 이창우 옮김, 카리스아카데미, 2021.

키르케고르, 쇠얀., 『기독교의 공격』, 이창우 옮김, 카리스아카데미, 2021.

키르케고르, 쇠얀., 『성찬의 위로』, 이창우 옮김, 카리스아카데미, 2022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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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잘 쓰신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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