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배우면 실존에 변화가 있다 vs. 없다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항상 모든 글 잘 읽으며 모든 기여하시는 분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대결(?)을 유도하려는 듯한 제목에 대해 먼저 사과드립니다. "변화가 있나요?"라고 하려다가, 보다 선명한 입장을 여쭙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다소 도발적인 표현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전공자이고, 어릴 때 철학자들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이 있어서 모 철학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이런 질문을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고 아마 아래 답변으로 미루어보아 분석철학 계통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을 배우면 삶과 사물을 볼 때 뭔가 다른 것이 꿰뚫어져 보이는(?) 능력이 생기나요?"

이에 그 교수님은 대략 아래와 같이 답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삶과 사물을 볼 때도 어떤 변화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철학을 배우는 목적은 무언가 색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문제의 옳고 그름을 변별하고 찾아가는 능력을 기르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비전공자로서 궁금한 것은 위 교수님의 관점이 실제 철학 전공자 여러분의 컨센서스인지입니다. 분석, 대륙, 동양, 종교 등 분야를 막론하고 최소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일정 수준 이상 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와 같은 철학관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장을 풀어서 다시 여쭙자면, 제목과 같이 '철학을 배우면 실존, 또는 현실(의 세계관)에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까요?' 그리고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이고, 있다면 어떤 변화일까요?'입니다.

특히 선생님 중 한 분의 이 글, '철학은 무엇을 줄 수 있는가'와 댓글들을 재미있게 읽고 나서 더 질문드리고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 의문을 덧붙이자면, 역사상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학자들, 가령 플라톤, 데카르트부터 특히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등은 소위 일반인들도 "우와" 할 만한 '인류/세계에 대한 통찰' 또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 링크 글에서 선생님들의 표현대로 "궁극적 진리"를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이를 지시할 만한 어떤 단서로서의 무언가에라도 천착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런 류의 철학'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세계) 철학계의 합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맞다면 그 합의가 있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령 과학 및 상대주의/다원주의의 발전일까요?

클리셰 질문에 속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선생님들의 좋은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좋은 한 주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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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철학 전공자들의 컨센선스인가?

아마도 많은 전공자분들이 위의 교수님이 하신 말씀에 동의하실 것 같습니다. 철학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을 내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최근에 기독교인들과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나 맡게된 게 있는데, 그 강의에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내용도 이 점이었습니다. 강의안 중 일부를 여기에 옮겨보겠습니다.

현대철학은 종종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준다. 현대철학을 통해 실존, 타자, 무의식, 사회, 폭력, 정의, 법 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가진 사람들 중 대부분은 20세기 이후에 출판된 고전적 철학 텍스트를 실제로 읽고 나서는 허무해한다. 가령,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는다고 해서 죽음과 불안을 바라보는 대단한 실존적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마치 컴퓨터처럼 논리적으로 빠르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과 같은 텍스트가 지닌 깊고 넓은 의미가 훤히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레비나스를 읽는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푸코를 읽는다고 해서 사회 곳곳에 숨겨진 권력과 폭력의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라캉을 읽는다고 해서 인간의 심리를 꿰뚫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각각의 텍스트가 너무 어려워서 우리가 핵심을 놓치다 보니 텍스트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철학은 실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철학은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이론적 문제를 다룬다. 즉, 우리가 실천적으로 어떠한 윤리를 따라야 하는지, 어떠한 정당을 옹호해야 하는지, 어떠한 법을 수립해야 하는지, 어떠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지는 안타깝게도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주된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고전적 철학자 중에서 실천적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오히려 현대철학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론적 가정에 주목한다. 가령, 영미권 정치철학에서 1980년대 이후 부각된 소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을 떠올려 보자. 해당 논쟁은 현실 정치에서 정치인이나 정당이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는다. 시장의 자유를 확대해야 하는지 복지를 확대해야 하는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해야 하는지 반대해야 하는지, 모병제를 실시해야 하는지 징병제를 실시해야 하는지와 같은 구체적 문제에 대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해당 논쟁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소 실망할지도 모른다. 해당 논쟁에서 쟁점이 되는 사안은 사회와 문화의 맥락에 국한되지 않는 관점의 존재 여부이다. 즉, ‘인간의 본성’, ‘합리적 선택’, ‘정의의 원칙’처럼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실천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의존하고 있는 이론적 개념이 과연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지가 논쟁의 대상이다. 해당 논쟁 자체만으로는 현실정치에서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가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 것이다.

(2) 철학자는 "인류/세계에 대한 통찰"을 주는가?

아마 "인류/세계에 대한 통찰"을 기대하시고 철학을 공부하게 되시면, 실망을 하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줄 수 있는 통찰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통찰들 중 일부가 역사 속에서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세계관'이나 '패러다임'을 주는 것은, 철학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종교나 예술의 역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날의 전문화된 강당 철학에서는 세계관이나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를 찾기는 다소 힘듭니다. 굳이 말하자면, 오늘날의 철학은 명시적으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작업보다는, 각각의 패러다임에 들어 있는 형이상학적-인식론적 가정이 무엇인지, 논쟁에서 각각의 입장이 문제 삼고 있는 쟁점이 무엇인지, 각각의 입장들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3) 철학을 배우면 실존에 변화가 있다?

굳이 "있다/없다" 둘 중에 하나를 이분법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없다"라고 보는 쪽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가장 밑바탕에 있는 토대 믿음들은 철학적 논증으로 도출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철학적 논증을 시작하기 위해서조차 미리 전제된 토대 믿음에 의존해야 합니다. 즉, 어떠한 믿음을 내 삶의 가장 기초적인 신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확실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결단의 문제입니다. 철학은 우리가 그 신념들을 받아들였을 때 어떠한 다른 신념들에도 추론적으로 개입하게 되는지(가령, "양적 공리주의의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도 정당하다고 말해야 한다.")를 성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개념적 장치들을 제공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비슷한 주제로 토론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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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항상 바쁘실 와중에 정성어린 답글 주셔서 보물을 받은 것처럼 정말 감사합니다. 인용하신 강의는 올해 하신 랜선신학교 강의인지요? 늦게 발견해서 보고 싶은데 주최측이 특정 기간만 오픈하는 걸로 하셔서 아쉬웠습니다 ㅠㅠ 이미 이 내용으로 강의까지 하셨었다니, 제 질문이 적절한 질문이었다는 뿌듯함을 얻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이처럼 차가운(?) 리얼리티체크 내지 빨간약의 견해를 주시리라 이미 예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의문으로 남는 부분은, "철학보다 종교나 예술의 역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라는 언급에서처럼, 소위 "궁극적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지는 않으시는 듯한, 어떤 형이상-주체적 온기(?)를 느끼게 되는 점인 것 같습니다. 위 '철학은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서 TheNewHegel 선생님이 피력하신,

이같은 전적인 회의주의 입장과는 대비되는 듯 보입니다. 비록 윤 선생님도 위 글의 댓글에서 "환상, 어처구니 없는 생각" 등 강도 높은 표현으로 동조를 표하신 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어떤 지시 가능성의 여지를 두신다는 온건한 인상을 얻게 되는 건 아마 윤 선생님께서 기독교인이시고 유신론자이시기에 비롯되는 차이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1·2차 철학 텍스트들 뿐 아니라 단적으로 이곳 사이트에서의 여러 글, 토론이나, 윤 선생님의 블로그 글을 통하여도 많은 '실존적 통찰'의 자원을 얻은 경험이 있기에 더 의문의 여지가 남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스스로도, 헤겔 철학의 세계를 접하셨을 때를 "회심"이라고 표현하실 만큼 "감동으로 마음이 벅차오를 정도였다"고 회상하시고 (독일관념론 수업에 대한 회상), 키르케고르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한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든 철학자였다"고 예찬하고 계시지 않으신지요? (신앙은 철학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네 편에 대한 철학적 해설)

그런 점에서 감히 거친 수사로 표현하자면, 큰 철학(uppercase Philosophy)에 대한 이런 일련의 포기 흐름이 어쩌면 '형이상학적 사다리 걷어차기' 또는 패배주의의 결과로 비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건설적 우려를 조심스레 애정을 담아 표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소위 도사들의 폐해를 잘 알고 있기에 (그중에는 정통 철학자 출신도 계시겠지요), TheNewHegel 선생님과 윤 선생님 등의 진정어린 순수이성비판(?)에 십분 공감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글을 쓰기 앞서 선생님이 마지막 제시하신 글('신앙주의')을 이미 꼼꼼히 읽었었습니다. 사족으로, 저는 더 이상 종교인은 아니지만, 윤 선생님은 MZ 세대의 강영안, 어쩌면 당연히 그 이상의 어떤 거목이 되실 분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워낙 소수에게만 주어진 콜링이라 남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고독하시겠지만 시대와 역사를 위해(?) 계속 정진해주시길 응원드리겠습니다. 갈수록 가벼움이 지배하는 시대에 여전히 "궁극적 진리"를 갈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잘 아시리라 믿으니 학계 밖의 대중과도 끈을 놓지 마시고 계속 귀중한 소통 이어가주세요. (유튜브 다음 업로드 빨리 부탁드린다는 뜻입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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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드리고 싶은 답변은 @YOUN 님께서 남기신 답변과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상반된 답변이지만, 또 사실 뿌리에선 별 이견이 없는 생각이지 않나 싶습니다.

"철학을 배우면 삶과 사물을 볼 때 뭔가 다른 것이 꿰뚫어져 보이는(?) 능력이 생기나요?"

이 질문엔 저도 그 교수님의 답변에 동의합니다. "꿰뚫어져 보이는(?) 능력"이라는 말도 정의하기 나름이긴 할텐데 ... 그런 비슷한 능력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고분자물리학/사회복지학 등 타 학문들 또한 그런 비슷한 능력을 충분히 배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철학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대답을 내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 즉, 우리가 실천적으로 어떠한 윤리를 따라야 하는지, 어떠한 정당을 옹호해야 하는지, 어떠한 법을 수립해야 하는지, 어떠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지는 안타깝게도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주된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고전적 철학자 중에서 실천적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대의 고전적 철학자"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피터 싱어를 위시한 현대 실천윤리학의 거장들은 위 답변에 대한 단적인 반례인 듯 싶습니다.

더불어 언어철학, 형이상학등 보다 "이론적"인 영역에서도 보다 실천적인 교훈을 끌어내려는 시도들이 학계 거물들 사이에서도 점점 잦아지는 것 같습니다 (예. 제이슨 스탠리).

역사상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학자들, 가령 플라톤, 데카르트부터 특히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등은 소위 일반인들도 "우와" 할 만한 '인류/세계에 대한 통찰' 또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 링크 글에서 선생님들의 표현대로 "궁극적 진리"를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이를 지시할 만한 어떤 단서로서의 무언가에라도 천착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그런 류의 철학'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세계) 철학계의 합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데이빗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평행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일반인들도 "우와"할만한 주장이지 않나요? (그게 "우와!"일지, "우와..."일지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shushing_face:)

저는 사실 좀 아닙니다만,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인류/세계에 대한 통찰', '패러다임 전환', '궁극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공유하는 생각은 다만 ''궁극적' 문제를 한 큐에 해결하려는 시도는 지금껏 죄다 실패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 진리'를 쪼개서 차근차근 각개격파를 할 필요가 있다.' 인 듯 싶습니다. 그렇기에 분업화가 받아들여지는 것이구요.

따라서 "'그런 류의 철학'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에서 "불가능"은 일종의 사회적/공학적(?) 불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게 좀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불가해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어 전 철학 영역의 문헌을 섭렵해 종합하고 그에 비춰 전 철학 영역을 통합한 체계를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야 그는 분업에 의존할 필요도 없겠고, 곧 자기 혼자서 '그런 류의 철학'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철학을 배우면 실존, 또는 현실(의 세계관)에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까요?' 그리고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이고, 있다면 어떤 변화일까요?'

전 실질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건 철학이 특별한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학문을 배우면서도,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게임을 하면서도 충분히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환각제 사용이 철학적 믿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본 포럼에서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철학, 혹은 최소한 강단에서 '철학'이라고 불리는 활동이 할 수 있는 기여가 있다면 이런 실존/세계관/그 변화의 이유에 대해 따져묻고, 각각의 근거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한때 유행했던 밈 중에서 '디자이너 vs 엔지니어' 밈이 있었죠. 대략

디자이너: 내가 ~~~한 기능을 갖는 제품을 만들어봤어.
엔지니어: 오, 신박한데. 그거 어떻게 작동하는거야?
디자이너: 그건 니가 생각해야지
엔지니어:

로 흘러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유비에 빗대자면 철학자의 역할은 엔지니어의 역할에 가깝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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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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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온갖 일로 사람이 달라집니다. 배움도 그 온갖 일 중 하나입니다. 철학 공부도 배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을 위하는 이유는 배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고 배우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호기심이 충족되기 때문이고 그 배움으로 삶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단순히 나 자신만의 삶이 아닙니다. 내 삶은 수많은 타자들의 삶과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옳고 그름을 변별하고 찾아가는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란 표현은 다소간 애매합니다. 그 표현의 의미가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라면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입니다. 철학만 그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표현의 의미가 '철학은 올바른 것을 찾아가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만 그런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만이 길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궁극적으로 배움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고 배움은 객관적으로 호기심이 충족되고 삶이 개선되는 효과를 냅니다. 물론 그 충족과 개선은 상대적이고 유한합니다. 더 알면 궁금해지는 것이 더 많아질 수도 있고 삶이 개선되면 삶에서 바라는 것이 더 많아져 삶이 더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철학은 자신의 전문적 주제들과 진행방식들을 갖고 있지만 철학의 목적은 결국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과 동일하게 호기심을 충족하고 삶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배워도 안 바뀔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을 포함해 대다수의 사람은 지와 행이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지에 함축되어 있는 행을 알아내기 어려울 수도 있고 동시대 철학자들의 통찰이 특히 그런 류의 지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철학 공부로 사람이 바뀌는 것은 가능하고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철학 공부 외의 다른 공부들이, 그리고 어떤 일상적 경험과 깨달음이, 예술/문학 경험이 알게 모르게 그 철학 공부와 합치될 때만 바뀝니다.

동시대 철학은 확실히 과거의 철학만큼 야심 만만하지 않습니다. 헤겔, 칸트, 하이데거 같은 규모의 철학자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큰 함축을 갖는 큰 얘기를 하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철학자가 '자유주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600쪽 이상의 책을 썼다면, 그 정도도 상당히 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적)민주제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최선의 정치체제라는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이거나 적어도 가장 발전된 나라들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틀짓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그 철학자가 지배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속속들이 논파해서 플라톤식 철인정치의 바람직함을 논증하거나 새로운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내놓는다면, 소수나마 일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람들의 정치적 신념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이름이 온갖 군데서 등장하는 모습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그만큼 뻗어나갈 수 있는 방향이 많은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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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by사람인듯합니다. 저는 사회철학, 윤리학 공부하면서 이전의 저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철학, 윤리학 공부가 어떤 실존적 지침이나 확답을 내려주지는 않지만, 사회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에 관해 성찰하는 기회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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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bunny, Sellars, cittaa, sophisten 선생님 모두 감사합니다. 보다 온건한 의견부터 "없다"는 단정적 말씀까지 모두 소중한 견해로 (또 역설적으로 귀중한 '통찰'로) 받아들입니다. ^^

Wild 선생님, 특히 싱어, 스탠리, 루이스 등 좋은 실례를 들어주셔서 많이 참고와 배움이 되었습니다. "궁극적 진리"와 '현실적 분업'에 대한 보완적 견지에 공감합니다. 다만 제가 아직도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발전적 관점에서 물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실존의 변화가 (지적·논리적·이성적) 세계관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면, 또 우리가 '개념 밖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면 과연 "다른 학문, 게임, 일상생활, 환각제" 등의 비개념적 내용이 어떻게 실존의 변화("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개념적 내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일례로 @YOUN 선생님은 기독교의 소위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회의를 표하시며 "자연 속에서 우리가 신을 인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계시에 근거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어딘가에서 피력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시는 무엇을 매개로 정당화되어 우리의 신앙 내지 신학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점에서 저는 특히 윤 선생님이 (위 '환각제' 글의 댓글에서도 '정당화'의 문제를 제기하신 것처럼) 개념·비개념 논쟁의 핵심을 간파하고 계시면서도 동시에 "종교·예술(신앙·감성)"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을 날카롭게 나누고 계시는 데 의아함을 느낍니다. 종교에는 신학이란 분업이, 예술에는 (로티의 주장대로) 문예비평이라는 분업이 생겼으므로 철학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당장 성서계시의 제1원리인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명제도 "태초"(시공간론), "로고스"(언어론), "계심"(존재론) 등의 '철학적' 도식 없이는 성립되지 않고, 영화 '기생충'도 공간·계급·운명·관계라는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유기적 이해 없이는 온전히 해석되지 못한 채 클리셰 비평만이 난무하는 '기절한(Ohnmacht) 영화'로 남는다는 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개념·비개념 논쟁이 단순히 협소한 인식론 차원이 아닌 실존적·세계관적 변혁에 기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현대인은 불안·우울·공황·자살사고 등 정신병리적 증상을 만연하게 경험하면서 이를 호르몬 작용이라는 비개념이 내 마음의 개념("나는 죽고 싶다" 등)을 지배한다는 인과론 패러다임을 여과 없이 받아들입니다. 모든 정신의학·심리상담의 접근이 환자의 '감각소여'를 교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철학의 입장에서는 불안을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근거는 애초에 없으며 그 '무언가 꿀렁꿀렁한 감정'은 오히려 자기고양을 위한 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복적으로 선언함으로서 논리적 세계관의 교정을 중심으로 한 실존상담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개인적 감정·심리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소하는 데 성공했기에, 윤 선생님을 비롯한 첨단 철학의 전파자(?) 여러분께 더욱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념 밖엔 아무것도 없다'를 넘어 '철학 밖엔 아무것도 없다'고 선포해버리는 건 너무 발칙한 상상일까요? Wild 선생님께서 마지막에 인용하신 그 밈은 오히려 '지나친 분과주의에 대한 비판'을 위한 반례로서 적합하지 않을까요? 상식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런 디자이너가 있다면 누구나 미쳤다고 하겠지만 '학계'에서는 통용되는 문법이라면 그것은 결국 지양되어야 할 희극인 것은 아닐까요? 저는 더 극단적인 고전유머의 예를 들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친 도식적 표현임을 무릅쓰고, 칸트(주관+객관), 헤겔(물질+정신), 후설(의식+본질), 하이데거(존재+언어) 등 소위 "위대한" 학자들은 모두 '내과+외과'를 통합하는 이념을 제시하기 위해 애썼다는 데 그들만의 특별함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이데거는 극단적 과학·기술문명 시대 앞에서 오히려 "신을 기다리는 철학"을 역설하며 "아직 오지 않은 자의 영혼 앞에 천년을 절한다"는 시인의 실존을 따라야 한다고 강구하기도 했습니다. 분석·종합명제의 경계가 허술해졌듯이, 분석철학을 넘어 철학의 원형(자연학+연금술+신학+⋯)으로서의 종합철학(synthetic philosophy)의 가능성을 탐색해볼 순 없을지, 주제넘는 제언을 나누어봅니다.

거친 스케치가 많았습니다만 읽어주신 귀한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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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단 이 조건문의 두 조건 모두에 대해서 주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존의 변화가 (지적·논리적·이성적) 세계관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채식주의에 대한 현대 실천윤리학에서의 논쟁은 철학/생태학/경제학/심리학 등 여러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지극히 이론적인 여러 쟁점을 망라합니다. 즉 이런 논쟁 자체는 지극히 "지적·논리적·이성적"인게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채식주의를 시작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 "세계관의 변화"는 사실 이런 이론적인 고려가 아닌 경우가 더 잦은 것 같습니다. 매우 일상적인, 날 것의 체험이야말로 '윤리관을 흔드는' 결정적 동기였던거죠. 위 논쟁에 참여하는 학자들 역시 이런 체험을 통해서 세계관이 변화한 다음에야 비로소 더 이론적인 쟁점들을 고찰하게 되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습니다.

이게 꼭 "일상적인, 날 것의 체험"이 일절 "개념적 내용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지적·논리적·이성적" 영역의 많은 부분은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꼭 필요하진 않은 것 같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개념 밖엔 아무것도 없다

는 말씀은 사실 제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건지는 확신이 덜 섭니다만 ... 저는 잘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두 가지 독법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둘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1. '개념이란 철학자가 사변을 통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선진국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철학자가 '기아', '결핍' 등에 관한 철학적 사변을 제시했을 때, 설령 그 사변의 내용이 옳다한들 과연 그 '바깥엔' 아무 것도 없는걸까요? 실제로 기아와 결핍을 겪었던 사람들의 체험의 지위는 어떻게 되는걸지 저는 잘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2. '개념이란 철학자의 사변을 원리적으로 넘어서는 것이다: 이 독법에 따르면 위 문제는 넘어갑니다만, 이 경우에 철학이 무엇이 제공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존상담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분명 이는 고무적인 일이고, 철학자들 역시 더욱 노력을 해야할 일 터입니다. 다만 한 가지 못내 품는 의심 하나가 있다면, 그런 '효과 사례' 중 많은 경우엔 사실 이미 '해결의 단초'가 그 당사자께 이미 갖춰져 있었으며, 철학의 역할이 있었다면 그건 그저 숟가락 얹는 것에 불과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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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문학을 통해 이런 시야가 열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랭보가 언급한 '바라보는 자(voyant)'가 말씀하신 질문에 더 가까운 답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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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bunny 선생님, 다시 한번 정성어린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개념 밖엔" 표현 등을 너무 맥락 없이 꺼낸지라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이해는 언급하신 감성적 체험의 영역조차 결국 (좌파 셀라스주의를 다소간 확대 적용하여) 실제론 개념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론적∈개념적'인 것이지, '이론적=개념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아래 자료 등을 참고했습니다.

  1. 권영우 논문: 감각소여의 신화와 헤겔적 전회
  2. 윤 선생님의 세미나 ("개념의 공간 바깥은 없다"): 우리 시대의 헤겔: 존 맥도웰의 헤겔(5) - YouTube
  3. 헤겔학회 발표 및 논문: 강순전, '헤겔에 있어서 개념의 절대성과 맥다월의 개념의 무한성 테제' (링크 갯수 제한이 있어서 유튜브에 검색하시면 됩니다)

이런 넓은 논의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혹여 다른 선생님들께도 참고가 되실까 언급했습니다. @cadenza 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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