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관념론 수업에 대한 회상

(1) 지난 주에 고향 집에 내려갔다가 학부 2학년 시절에 수강했던 '독일관념론' 수업 자료와 필기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2012년 2학기에 들었던 강의이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이네요. 저에게는 이 강의가 (그리고 동일한 교수님께서 하셨던 대학원 '헤겔연구' 강의가) 제가 서강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들었던 가장 유익한 강의들 중 하나였습니다.

(2) 수업을 진행하신 분은 독일에서 헤겔의 『논리의 학』을 전공하신 K 선생님이셨어요. K 선생님이 수업 첫 시간에 항상 강조하셨던 점 중 하나가, 독일관념론이나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네요. 대부분 '독일관념론'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강의들이 (특히 학부 강의들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만 한 학기 내내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아쉽다는 게 교수님이 이야기하셨던 내용이었습니다. 강독 수업도 분명한 장점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방학 때는 종종 『논리의 학』 독일어 강독을 직접 여시기도 하셨지만,) 자신은 학생들에게 18-19세기 독일철학의 전체적인 면모를 알려주고 싶다고 말씀하셨거든요.

(3) 덕분에 학부 '독일관념론' 강의와 대학원 '헤겔연구' 강의를 통해 칸트와 헤겔 철학의 큰 그림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유익하였습니다. 학부 수업에서는 중간고사 이전까지 칸트의 철학을,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피히테, 셸링, 헤겔의 철학을 배웠어요. 대학원에서는 한 학기동안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었고요.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K 선생님이 임석진 교수님의 『정신현상학』 한길사 번역본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셨다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임석진 역이 다소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번역은 자신이 수업에서 교정을 해줄 테니, 우선 '전체'를 보기 위해 독일어 원문이나 영어 번역본보다는 임석진 역으로 『정신현상학』을 읽자고 하셨거든요.)

(4) 사실, 저는 이 두 강의 이전에는 헤겔에 대해 딱히 관심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헤겔이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니 언젠가 공부해보아야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헤겔이 무슨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헤겔의 철학에서 제가 무엇인가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죠. 강의를 수강한 것도, 이전 학기에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 강의를 모두 들어보았기 때문에, 철학사 순서대로 '독일관념론'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정도였습니다.

(5) 그런데 두 강의를 듣고 나서는 헤겔이 제가 관심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네요. 강의가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저는 헤겔의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회심'(?)한 정확한 날짜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대학원에서 '헤겔연구' 강의를 들었던 2015년 11월 19일이었어요. 교수님께서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을 다루시면서

헤겔이 결국 말하는 건, 인간이 자신만의 문화세계를 건립하는 존재라는 거에요. 인간은 문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계속 새롭게 만들어나간다는 거죠.

라고 하셨는데, 이 설명에서 그동안 들었던 헤겔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세계가 고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문화를 통해 변혁시켜나갈 수 있는 지평이라는 거구나! 그래서 헤겔의 철학이 자유의 철학이고, 혁명의 철학이구나!'하고요. 인간의 활동과 분리된 대상을 남겨두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참 매력적이었어요. 수업이 끝난 다음에 뭔가 감동(?)으로 마음이 벅차오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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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 만나서 좋은 수업 듣고 또 좋은 생각을 갖게 되는 건 커다란 복인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가 운이란 것이 지혜와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어쩌면 개인의 지성에 달린 문제인지도 모르겠지요. 갑자기 몇몇 선생님들과 그분들이 이끌었던 대화들이 떠올라 새삼 감회에 젖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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