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아직 하나의 자기가 아니다.
인간은 유한한 조건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앞에 열려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의 사태"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시면 됩니다.
(1) 인간은 종합 혹은 관계이다: 인간은 유한한 조건과 무한한 가능성 사이의 관계이다.
(2) 자기란 관계하는 관계이다: (1)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인용하신 문장에서 굳이 헤겔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종합(synthesis)'이라는 말이 반드시 헤겔의 변증법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는 표현은 피히테가 사용한 것이지 헤겔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단순히 (a)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자기 창조의 과정은 (b) 유한한 삶의 조건에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키에르케고어 연구자인 고든 마리노(Gordon D. Marino)의 논문 " Anxiety in The Concept of Anxiety"에 대해 정리한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죄에 빠지는가: 키에르케고어와 불안의 개념
https://blog.naver.com/1019milk/220514791787
2. 영원성과 절망
키에르케고어는 '영원'이라는 표현을 맥락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만, 인용하신 부분에서는 '가능성'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님처럼 "가능성 있는 존재인 '나'"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절망'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계십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 채, 주변 사람들이 명령하고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절망'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하고 결단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삶을 방관하고 포기한다는 것이고, 삶을 방관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원 논문 공모전에 제출했던 글(나름 최고 등급인 A등급으로 판정된 글입니다?!)과 <오늘의 신학공부>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요청을 받아 만든 글입니다.
3. 절망과 오성
키에르케고어는 오성을 포기하고 신에게 구원을 맡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키에르케고어에게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치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절망에서 벗어나는 상태라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 되기를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어가 '그리스도교'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벗어나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키에르케고어가 보기에)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규범, 제도, 선입견, 당위를 벗어나서 자신의 불안을 짊어지고서라도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실존적 가르침이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도 예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