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하는 실존과 반항하는 실존: 실존주의의 두 흐름

(1) 합정역 알라딘에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있어서 충동 구매하였습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반항하는 인간』과 함께 읽었던 책이지만 소장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책에 줄도 그어 가면서 다시 읽어보려고요.

(2) 저는 원래 실존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지금도 제 옛날 노트북 어딘가에는 대학 수시 지원서가 있을 텐데, 거기에는 철학과에 입학해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를 공부하고 싶다는 고등학생 때의 제 포부(?)가 적혀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철학과에 들어와 보니, 실존주의에 대한 논의는 거의 접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틈 날 때마다 실존주의 책을 저 혼자 찾아 읽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3) 흔히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구분을 사용하죠.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문에서 실존주의의 종류를 그 두 가지로 구분한 이후부터, 이 구분은 마치 '정설'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도 종종 나올 정도니까요.

(4) 그렇지만 저는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실존주의를 나누려는 시도가 대단히 오도적이라고 봐요. 가령,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야스퍼스는 사실 무종교인입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도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하기는 하였지만) 반드시 기독교 신앙인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요. 또,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하이데거는 사실 무신론자도 아니고 '실존주의자'라는 용어도 달가워하지 않았죠. 심지어, 사르트르는 말년에 메시아주의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사르트르의 친구였던 베니 레비의 증언이긴 하지만, 정설로 통용되기에는 굉장히 논란이 많죠.)

(5) 오히려 저는 '도약하는 실존'과 '반항하는 실존'이라는 구분을 가지고서 실존주의를 설명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실존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고정된 본질도 없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를 특정한 삶의 방식 속에 가두는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고자 하죠. 그런데 이 거부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다른 삶을 향한 도약'을 통해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 반항' 속에서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려는 시도이죠. 여기서 '도약(leap)'은 키에르케고어의 용어이고, '반항(rebellion)'은 카뮈의 용어입니다.

(6) 저는 '도약'과 '반항'이라는 용어가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구분보다도 서로 다른 실존주의 사조 사이의 논쟁점을 훨씬 잘 잡아낸다고 봅니다. 즉, 우리가 흔히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키에르케고어나 야스퍼스는 현재와는 다른 삶에 대한 전망 속에서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고자 합니다. 지금 주어져 있는 삶보다 더 고귀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곳으로 '도약'하려고 하는 거죠. 반면, 우리가 흔히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르트르나 카뮈는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고자 합니다. 지금 주어져 있는 삶이 위선과 가식을 통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기성의 질서에 '반항'하려고 하는 거죠.

(7) 언젠가 '도약하는 실존'과 '반항하는 실존'이라는 주제로 실존주의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두 입장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그 둘 모두가 극복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도약하는 실존은 그 '도약'의 근거가 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 공허해지고, 반항하는 실존은 그 '반항'의 목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현재로서는 이런 작업을 할 만한 능력과 여유가 되지는 않네요. 그래도 실존주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가 가진 주된 관심사 중 하나인 만큼, 더욱 진지하게 다뤄보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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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 혹시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를 읽어보신적 있을까요? :roll_eyes:

키에르케고어 연구서로 알고 있는데, 리뷰가 마땅히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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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 굉장히 심취했었던 사람으로서 반가운 글이네요. 그런데 제가 마치 생물을 종속과목강문계로 나누듯이 철학적 입장에 대한 강박적인 분류를 시도하려는게 아니라면, 일단 종교를 가지지 않으면서 유신론적 입장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유신론적이라는 것의 의미 설정을 ‘절대적인 가치체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보면요.

또 도약하는 실존과 반항하는 실존이라는 구분도 굉장히 좋은 구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물론 실존주의가 무엇이다라고 규정짓고 고정하는 것 자체가 실존주의적이지 않겠지만, 적어도 삶에 어떠한 고정된 본질도 없다면 야스퍼스나 키르케고르같은 '도약하는 실존' 측에서 말하는 '신에게 귀의함으로서 더 고귀하고 더 가치 있는 삶이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실존주의의 정신과 모순되는 점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아직도 지워지지가 않는데, 동의하시나요?

가령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것이, 결국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체계에 종속되는 것과 다를게 뭘까?라는 제 개인적인 의문이 아직도 해결되지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신에 대한 단독적 대면이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하리라' 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반박이 들어온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주체적이며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왜 마지막에, 또한 그렇다면 굳이 '신' 앞에 서야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사라지지가 않거든요. 제 이러한 개인적 견해가 ’반항하는 실존‘에 해당되는 까뮈나 사르트르의 것들을 더 지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마지막 문단에서도 극복의 필요성을 언급해주기도 하셨지만, 저는 실존주의의 가장 최소한의 모티베이션(고정된 본질, 추구해야할 절대적 가치가 없다)을 결론에 가서 무마시켜버리는 ‘도약하는 실존’이 실존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적 유신론자들에게 가하는 아주 흔한 비판이겠지만(저는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자신만의 주체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펼쳐나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고 무한한 자유를 내려놓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반항하는 실존 측에서도 무조건적인 반항 뒤에 어떤 새로운 삶에 대한 제시가 없다면 그것도 비판점이 될 수 있겠지만요. 이런 모든 생각들을 종합해보면 저는 니체가 '도약하는 실존'과 '반항하는 실존'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는 실존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니체는 먼저 기성의 가치체계를 부시고, 그 다음 폐허 위에 실존적인 인간의 가치를 새로 쌓으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끼는데요, 이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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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 흥미를 느끼고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친구들을 여럿봤는데요. youn님이 말씀하셨듯이 막상 철학과를 들어와서 수업을 들을때는 실존주의를 주로 다루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실존주의는 미끼상품(?)마냥 예비 철학도들을 현혹하기만 하는걸까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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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실존철학 공부하기 위해 헤겔 공부 중인데, 헤겔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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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서관에서 저 책의 몇몇 챕터를 읽었던 것 같기는 한데, 오래 전이라서 잘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저자가 키에르케고어 총서 편집자인 만큼 내용은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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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문제들을 제기해 주셨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도 많은 분들이 (저로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표현인)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입장에 대해 비슷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요. 다만, 이 의문들이 통상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데 비해, 실제로는 여러 가지 개념적 오해들이 겹겹이 쌓여 제기된 의문이다 보니, 사실 말씀하신 내용들에 대해 대답하려면 수많은 배경 논의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여기서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만 간략히 지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1) '유신론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 주장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어요.

(a) 유신론적?: 우선, '유신론적'이라는 표현이 너무 자의적으로 정의되고 있어요. 물론, 철학적으로는 어떤 용어에 대해서든지 글을 쓰는 사람이 처음에 자신의 정의를 밝히기만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적어도 말씀하신 정의가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대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이 유신론과 무신론이니까요. 그래서 별도의 정의 없이 "절대적인 가치체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 유신론"이라고 당연하게 전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이건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fallacy of illicit redefinition)'를 범하는 셈이죠.

(b) 절대적 가치 체계?: 게다가, 저는 유신론자이고, 기독교인이고, 복수전공으로 종교학을 공부하였지만, '유신론'이 반드시 '절대적 가치 체계'를 상정하는 입장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그 '절대적 가치 체계'가 일종의 윤리적 실재론이나 보편주의나 의무주의를 함축한다면, 저는 그런 가치 체계를 믿지 않아요. 실제로, 키에르케고어나, 야스퍼스나, 틸리히나, 마르셸 같은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도 그런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죠. 유신론을 그런 종류의 가치 체계와 연관 짓는 것이 종교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해요.

(c) 종교?: 더군다나, 철학에서 논의되는 종교 담론들에는 대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이 점은 제가 종교학도 출신이라서 더욱 심각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철학 전공자들이 많은 경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종교'를 세워두고서 종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하곤 해요. 종교철학의 담론들이 대부분 '허수아비 논증(straw man argument)'에 빠져 있다는 거죠. 가령, '유신론'이라는 말에서 '신'은 어떤 신인가요? 기독교 전통 내부에서조차 성서 속 야훼를 어떤 신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어요. 유대교와 이슬람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 내부에서도 신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다르고요. 여기에다, 기독교 바깥의 다른 신앙 전통을 논의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죠. 그래서 저는 이런 다양성을 쉽게 '유신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걸 매우 경계해요. (심지어 종교학에서는 '종교(religion)'라는 범주조차 서구 근대성의 산물이라는 논의도 있는 걸요.)

(2) 실존주의는 규정할 수 없는 사조일까?

저는 이 부분도 통속적인 오해라고 생각해요. 물론, 철학적 범주나 개념들은 많은 경우 유동적이지만, 그 사실이 그 범주나 개념에 대한 규정 자체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a) "실존주의는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다."라는 주장과 (b) "실존주의는 규정 자체가 불가능한 사조이다"라는 주장은 서로 구분되어야 하죠. 특별히, 저는 후자의 주장이 실존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요. "실존주의는 합리성에 반대한다." 혹은 "실존주의는 형식화된 강단철학에 반대한다." 같은 다소 인상비평적인 소개들로부터 "실존주의는 규정 자체가 불가능하다."와 같은 잘못된 결론이 통용되었다고 보는 거죠.

오히려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다른 어떤 현대철학자들보다도 글을 명료하게 잘 써요. 개념들을 잘 규정하고, 논의 전개의 서순을 잘 지키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거죠. 가령, 키에르케고어만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저술을 보면 글이 굉장히 논술적인 스타일로 진행된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어요. (니체가 함축적인 아포리즘 형식으로 대부분의 글을 쓴 것과 달리, 키에르케고어의 글들은 대부분 설교문과 논문으로 되어 있어서 글이 명료한 편이에요.) 더군다나, 야스퍼스는 애초에 '이성'과 '실존'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는 걸 자기 사상의 핵심으로 강조한 철학자죠. 말년의 대표작 제목이 『이성과 실존』일 정도로요. 타인에게 소통불가능한 진리는 애초에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야스퍼스의 주장이죠. 그 밖에도, 노벨 문학상 제의를 받았던 사르트르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카뮈의 글이 훌륭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두 사람이 쓴 논문 형식의 글들은 동시대의 다른 어떤 고전적 철학 텍스트보다도 깔끔하고 이해하기 쉬워요.

(3) 신을 믿기로 하는 것은 주체적이지 않은 선택일까?

이 점도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라는 입장에 대해 제기되는 통상적인 오해에요. 아마도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을 '명령들'과 '규범들'의 집합체라고 보는 오해 때문에 신앙이 실존주의와는 대립된다는 편견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몇 가지 예시만으로도 금방 드러날 수 있을 거예요.

가령, 어떤 학생이 미술가가 되기로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고 해봐요.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게 학생의 본분이야!"라고 말하지만, 이 학생은 그런 통념들과 싸우면서 "나는 미술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할래!"라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죠. 이때, 이 학생은 미술가가 되기 위해 학교 공부만큼이나 혹독한 수련을 통과해야 하죠. 좋은 작품을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요. 즉, 이 학생이 미술의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해서, 이 학생이 자기 마음대로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요. 반대로, 이 학생이 미술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엄격한 수련을 받는다고 해서, 이 학생이 주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고요. 자신의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능동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거죠. 바로 그 책임 중 하나가 혹독하고 엄격한 수련의 과정인 거고요.

신앙도 예술과 마찬가지에요. 세속인들은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다들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을 뿐이야!"라고 말하지만, 신앙인은 그런 통념과 싸우면서 "나는 신앙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할래!"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가죠. 이때, 이 사람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키에르케고어가 성서 전통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라고 표현한) 혹독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죠. 세속인들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세속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즉, 누군가가 신앙의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요. 반대로, 누군가가 신앙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거스르면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고요. 즉,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결단한 사람이 아무런 질서도 없이 반드시 무정부주의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인이 세속과는 다른 가치를 지향하면서 살아간다고 해서 그가 실존적으로 살지 않는 것도 아닌 거죠.

오히려 '실존주의'라는 사조는 종교 전통에서 (특별히, 기독교 전통에서) 등장한 사조인 걸요. 종교 전통을 제외하고서는 실존주의 자체를 이야기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요. 애초에 실존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루터, 키에르케고어 등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연원을 두고 있는 사조잖아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친구였고, 소위 '성서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으로 유명한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어요.

사실 인간의 실존은 신약성서의 도움 없이는 발견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현대철학은 신양성서 및 루터와 키에르케고어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As a matter of fact it [the existence of human beings] has not been discovered without the aid of the New Testament, for modern philosophy is indebted both to it and to Luther and to Kierkegaard.

Rudolf Bultmann, "The New Testament and mythology", Kerygma and Myth, Hans Werner Bartsch (ed.), Reginald H. Fuller (trans.), New York and Evanston: Harper and Row Publishers, 1961, 26.

애초에 '실존(existence)'라는 개념 자체도 중세철학의 'existentia' 혹은 'esse'에서 나온 개념이죠. 신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결코 스스로 형이상학적 토대를 지닐 수는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 사상 중 하나에요. 이런 '무로부터의 창조' 사상이 출현하고 나서야 '실존(esse, 존재)'과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 구분이 철학에서 등장한 거죠. (그 이외에도, 실존주의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인격', '의지', '우연성'이라는 개념들도 중세철학의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등장한 개념들이에요.)

그래서 저에게는 기독교에 근거한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실존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이 굉장히 이상해 보여요. 오히려 실존주의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매우 기독교적인 사상인데도, 기독교와 실존주의를 어떻게든 분리시켜 보려는 통속적인 시도들이 대단히 자의적이라고 느껴져요. 정리하자면, 그런 시도들은 (a) '종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b) '실존주의'에 대해 다소 왜곡된 인상을 가지고 있고, (c) 기독교 전통과 실존주의 사이의 긴밀한 역사적-철학적 연결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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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유신론에 대해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네요. 또한 ‘종교’에 대한 정의도 잘못 되었네요. 제가 말했던 종교는 ‘세계의 문화들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 체계들의 집합(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등...)‘인데 근본적으로 종교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니 유신론자이면서 무종교인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말씀하셨듯이 ‘종교’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조차도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전처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표준국어대사전를 인용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의미에 대해서도 완벽히 동의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고만 알아주세요.)

또 전반적인 답변에 대해서 전부 동의합니다. 다만 인간이 신앙의 길을 걷기로 한 결정 자체는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이 맞겠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이라는 가치 자체가 있다고 믿는 이미 상정된 전제(가다머 식으로 말하면 권위(Authorität)를 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저는 이런 경우에 출발점부터 잘못 뗀 것이 아닌가?라고 보는 거죠.

성경이라는 것도 처음에 여러 명의 저자들이 성령의 말씀에 따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이 저자이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런 ‘전승되는 텍스트들’에 대해 권위를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이에요. 물론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롤플레잉 게임의 태생을 정하듯이 ‘응애’하고 태어날 때부터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체계들에 대한 탐색과 숙고 끝에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것이겠고, 그 속에서는 성경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회의도 모두 수반되겠지만, ‘신에 대한 의심과 회의조차도 모두 기독교 가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버리면 유신론자가 아닌 사람들은 황당해질 수 밖에 없을 거에요. 그거야말로 기독교인들의 자의적인 의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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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지만, 상대를 완전히 설득시키기에는 어딘가 약해보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특히나 "종교" 자체가 가지는 무게감을 trivialize 시킨다는 인상을 줍니다. 만약 신을 믿기로 하는 것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과 동등한 수준의 실존적 선택이라면, 당연히 신을 믿기로 한다고 해서 주체적이지 않다는 오명은 없겠지요. 그러나 이 전략은 역설적으로 신을 믿기로 한 선택을 사소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Youn 님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의도와는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을 단지 직업을 선택하는 층위와 동일시하지는 않아보이기에,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공격받는 지점은 어딘가 다른 지점이 있어 보이는 것이죠. 예컨대 종교인들은 세속인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규범성들을 (그것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따르고 있는데, 바로 이 종교인들만의 규범성이 실존적 주체성을 해치지는 않느냐 하는 의심이겠죠. 이 규범성을 Youn님은

이렇게 표현해주셨네요. 따라서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답변은, 바로 이 "세속인들과는 다른 가치"가 실존적 주체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종교의 규범성이 어떤 측면에서 주체성을 해친다고 주장되는지가 먼저 명료하게 드러나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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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체성과 권위는 대립하는가?

저는 주체성과 권위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봐요. 위에서 미술가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학생을 예로 든 것처럼, 주체적 선택을 내리는 사람도 결국 그 선택에 따라 특정한 권위를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어요. 미술가가 되기로 결단했다면 미술계의 권위에 따라 자신의 실존을 만들어나가야 하고, 무도인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무도계의 권위를 따라 실존을 만들어나가야 하고, 대학원생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학계의 권위에 따라 실존을 만들어나가야 하고, 신앙인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교회의 권위에 따라 실존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거죠. 어떠한 주체적 선택을 하든, 권위에 대한 존중과 복종은 필수적이에요. 즉, (a) 기성의 질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주체적인 삶이라고 해서 (b) 아무런 질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무법자처럼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이 주체적인 삶인 것은 아니에요.

사실, 이 점이 대중적으로 실존주의가 이야기될 때 자주 혼동되는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아마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말고 너 자신의 길을 가!"라든가 "너만의 가치를 찾아!"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실존주의에 대한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여요. 실존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건, (a) "우리 삶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나 진리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이지 (b) "우리 삶의 가치를 우리가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가 아니에요. 사르트르조차도 '결혼'이라는 예시를 들어서 이 점을 이야기하고 있죠. 즉, 우리는 결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일단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의 상호구속 관계에 참여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혼을 해야만 하는 형이상학적 당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단 결혼을 한 사람에게는 그에 따르는 책임과 규범과 의무가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신앙인이 종교적 권위에 따라 자기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여전히 주체적이고 실존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어떤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즉, 미술가가 되기로 결단하거나, 무도인이 되기로 결단하거나, 대학원생이 되기로 결단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런 종류의 '권위'를 결코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요. 바로 이 이유에서 무조건적인 '반항'은 무의미한 것이고요. 실제로, 무조건적인 반항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르트르나 카뮈조차 주체적 선택에 수반되는 책임, 규범, 의무와 같은 요소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그와 같은 요소들이 우리 자신에게 '권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인정하고 있어요.

(사실, '권위'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는 실존주의를 넘어서 더 자세하게 해야 하는 이야기가 많아요. 제가 전공하는 철학적 해석학에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가 바로 이 '권위'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 철학자이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헤겔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분석철학자인 브랜덤이 바로 '상호 인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권위에 대한 인정과 자율성이 어떻게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기도 하고요.)

(2) 실존주의는 신앙을 사소하게 만드는가?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저는 종교를 믿는 것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오타쿠 취미를 선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이 점은 폴 틸리히(P. Tillich)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틸리히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개신교 신학자와 종교학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고, 흔히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이지만, '종교' 혹은 '기독교 신앙'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다른 세속적인 종류의 결단들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즉, 우리가 궁극적 관심을 쏟는 대상이 우리의 '신'이 되고, 그 대상과의 관계가 우리의 '종교'가 된다는 게 틸리히의 유명한 종교 정의에요.

가령, 우리가 '돈'을 삶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돈이 우리의 신이 되고 우리의 종교는 '물신주의(物神主義, fetishism)'가 되는 거죠. 또한, 우리가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삶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히틀러가 우리의 신이 되고 우리의 종교는 '나치즘(Nazism)'이 되는 거고요. 즉,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 같은 전통적 종교와 물신주의나 나치즘 같은 세속의 사회 현상은 적어도 '형식'에 있어서는 구분되지 않아요. 다른 말로 하면, 지극히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조차 실제로는 매우 종교적인 형식을 지닌 현상으로 분석될 수도 있다는 거고요.

물론, '궁극적 관심' 개념을 이용한 팉리히의 종교 정의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 정의는 '종교적' 현상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꽤나 통찰력이 있죠. (실제로도, 이 정의는 꽤나 많은 종교학자들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정의이기도 해요.) 그리고 저도 이 점에서 종교를 믿는 것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오타쿠 취미를 선택하는 것과 형식적인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봐요.

다만, 내용적으로 본다면, 저는 기독교가 가지는 무게감을 여전히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만일 저에게 "왜 수많은 궁극적 관심의 대상 중에서 굳이 예수를 믿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요. 예수의 비유가 얼마나 놀라운 통찰과 혁명적 사유로 가득한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소위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가 대안적 공동체로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무엇보다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삶을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어떻게 제가 실제로 체험하였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에요.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은 '종교'나 '유신론'이라는 형식적 틀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예수'라는 고유명사와 '기독교'라는 구체적인 신앙 전통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인 거죠. 그리고 저는 기독교 신앙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의가 "왜 굳이 예수를 믿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하고, 그 대답이 사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무게를 준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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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의 의견과 YOUN님의 의견의 핀트가 약간 틀어지고 있는거 같아요. 제가 지적하려는 것은 ‘권위와 주체성의 상생가능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YOUN님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권위에 대한 존중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며 주체성과 권위가 충분히 상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전통들에 대해서 누가, 어느 정도로의 권위를 부여할지에 대해서 저는 실존주의적 입장을 가지는 것이죠. 즉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실존적 결단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런데 YOUN님은 어째서 ‘인간 전반이 이미 기독교적인 가치에 권위를 부여했다고 상정한 상태에서 실존주의를 전개해나가는가’에 대한 것이에요.

즉,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 권위를 주고 말고의 권한은 각자 개인에 달려있으며 내가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 권위를 부여했음에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적 가치는 전통으로서만 남아있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권위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기독교적 가치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고 많은 영향을 끼치며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로서 존재하는 것과, 개인이 그 가치를 받아들여 권위로서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실존주의와 기독교적 가치의 연결성을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죠.) 수정 :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제 말에 걸려 넘어지고 있네요. 실존주의와 기독교적 가치의 연결성 자체는 역사학적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어요. 다만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치에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고 한 발 후퇴해야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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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간 전반이 기독교적인 가치에 권위를 부여했다고 상정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기독교는 하나의 선택지인 거죠. 누군가는 이 신앙에 삶을 걸어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있는 선택지요. (다만, 저는 삶을 걸어본 쪽에 속할 뿐이에요.)

그래서 기독교 자체에 가치가 미리부터 있거나 사람들이 미리부터 기독교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에요. 심지어 성경조차 “믿을지 말 것인지는 너희가 알아서 선택하라.”라고 말하죠. 여호수아기에 있는 유명한 구절이 말이에요.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기‬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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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런 생각이시라면...오히려 YOUN님의 선택이 제일 실존주의적인 결단으로 보이네요. 조금 납득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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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 실존주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굉장히 흥미가 생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다 보니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1) '실존적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주체적인 결정을 의미한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글을 읽으니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의 결정 같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youn님이 예시로 든 미술계의 권위, 무도가의 권위, 학계의 권위라든가 혹은 결혼이라고 하는 상호간의 약속도 내가 주체적으로 동의하거나 인정한다면 '실존적 선택을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2) 내가 정말로 실존적 선택을 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건가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학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선택이 정말로 주체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의하여 유도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건가요? 만약 저의 질문이 실존주의의 논점에서 벗어나고 있어서 질문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에 대해서 지적해주셔도 좋습니다.
(3) 나의 실존적 선택의 대상이 비도적적일 경우, 실존주의는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합니다. 글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삶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히틀러가 우리의 신이 되고 우리의 종교는 '나치즘(Nazism)'이 되는 거고요."라고 한 대목에서 이러한 질문이 들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비도덕적이다'라고 흔히 평가하는 가치를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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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맞습니다. 물론, ‘실존적 결정’이라는 말이 반드시 고정된 전문 용어로 사용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저는 댓글에서 ‘주체적 결정‘ 혹은 ’자유로운 결정‘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2) 말씀하신 내용이 실존주의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비판 중 하나에요. 순수하게 자유로운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저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의 문제 앞에서의 고민이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설령 우리가 여러 가지 구조나 조건에 제약된 주체라고 하더라도, 실존적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제기된다고 봐요.

(3) 이 점도 실존주의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질문 중 하나에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실존주의 자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엄밀한 이론적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도덕적 실재론이나, 보편주의 윤리나, 의무론 등에 대해 이론적 비판이 이루어진 결과로 도출되는 입장이 실존주의라고 설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존주의자들 스스로가 도덕철학적인 세밀한 논쟁에 직접 개입하는 경우는 찾기 힘든 것 같아요. 다만, 그 논쟁에서 ‘실재’, ‘법칙’, ‘규칙’ 등으로 도덕을 해명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게 된 이론철학자들은 실존주의적인 입장 공감하는 양상을 자주 보이곤 해요. (가령, 로티 같은 인물들의 윤리적인 견해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죠. 물론, 로티 본인은 자신을 ‘실존주의자’라고 직접 명명하진 않지만요)

(3‘) 나치즘과 관련해서는 퍼트남과 로티 사이의 흥미로운 논쟁이 있어요. 퍼트남은 소위 ‘사실의 문제’에 근거해서 나치즘과 우리들의 도덕관 중 무엇이 더 나은지를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로티는 퍼트남이 일종의 ‘신의 관점(God's eye-view)’를 무비판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비판해요. 물론, 로티 자신도 당연히 나치즘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치즘에 대한 비판이 보편적 사실 따위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라는 거죠(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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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링크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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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내용이라 저도 한마디 보태 봅니다.

  1. 우선 실존 개념의 역사적 원천에 대한 건데요.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형이상학> 6권 1장에 따르면 개별 과학은 특정 영역에 속하는 대상들의 본질만 다루고 그 대상이 존재하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은 사물의 존재와 본질 모두 다룬다고 말합니다. 이 구분을 중세철학이 발전시켜 종교적/실존적 색채를 가미한 건 맞겠지만 이 개념적 구분 자체가 '무로부터의 창조'를 전제 조건으로 갖는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1. 다음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관한 얘기입니다. YOUN 님은 주체성과 신앙, 주체성과 권위 간에 애초에 충돌이 없다는 입장인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충돌이 없으므로(용어 관련한 것을 제외하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없다는 입장과, 충돌이 분명히 있지만 모종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YOUN 님은 첫 번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Herb 님이 말한 것처럼 종교를 사소하게 만드는 대가를 치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미술계나 무도계의 권위를 따르는 것과 교회(또는 여타 종교기관)의 권위를 따르는 일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미술계의 권위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경험 가능한 대상에 근거한 권위입니다. 즉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거기에 속한 미술가들의 '실력'에 근거해 있고 이는 그들의 성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미술계의 권위를 따르기로 한다면 각 미술가들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실력 이상의 것을 상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교회의 권위는 상당 부분 경험 가능한 것과 상관없이, 심지어는 보통의 경험에 반하여, 성립됩니다. 교회의 권위가 성서에 기반해 있고 성서의 여러 내용이 상식을 뒤집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요(육화, 부활 등). 따라서 내가 교회의 권력을 따르기로 한다면 애초에 경험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것을 실재한다고 상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체적이라는 말의 뜻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경험이나 검증이 가능한 것에 근거한 것만 인정하는 자세라고 한다면, 교회의 권위를 따르기로 한 결정 자체는 자발적이라 해도 대상의 관점에서는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결단의 대상에 주목할 경우 특정 직업에의 결단과 신앙에의 결단은 그 무게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을 갖습니다(키르케고어의 글들이 온통 종교적 결단의 어려움과 무게를 다룬다고 볼 때 직업에 투신하는 것과 같은 비중을 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예로, 어떤 직업을 택하지 않거나 그 길을 가다가 실패한다고 해서 '영원한 저주' 같은 걸 받지는 않습니다. 반면 신앙을 결단한 사람은 죽음 이후의 운명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현생은 찰나에 불과하고 오히려 사후세계가 '실재'라고 여깁니다. 비슷한 예를 수없이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주체적인 것을 현재에 충실한 자세라 보고 타율적인 것을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르는 어떤 미래 세계에 자기 운명을 거는 것이라고 볼 때, 주체성과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대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의 관점을 가져야 오히려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 같은 답변의 시도는 이러한 애초의 대립관계를 인정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신앙의 실존적 결단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하셨는데요.

궁금해서 찾아보니 네 구절 뒤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알아서 해라'와 '근데 한눈 팔면 끝장이다'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YOUN 님이 강조하려는 점 이외의 측면도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1. 마지막은 실존주의가 철학이 전통적으로 포함했던 두 측면 중 하나를 버림으로써 일방적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인데요. 앞서 말한 대로 존재론은 존재와 본질을 모두 고려하고, 둘은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 사물에 있어서는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 입장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경우 내가 어떻게 사는가와 무엇을 아는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실존적 유신론은 보편적 가치체계나 의무론과 별개라는 것이 YOUN 님 입장인데요.

철학이든 신학이든 신과 세계와 인간을 논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논한다는 것이지 '그냥 나만 그렇다고'가 아닐 것인데, 신을 믿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보편적(이라 믿어지는) 가치체계가 도출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인간이 선해야 할 이유를 성서는 신 자신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의 본성에서 직접적으로 특정한 규범이 도출된다는 뜻이고, 규범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고 임의적으로 돼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가치 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가령 가족에 대해, 친구에 대해, 동료 시민에 대해, 국가에 대해 언제 어느 정도로 의무를 수행할 것인지, 또 어떤 경우에 예외가 인정되는지, 어떤 조건 하에 전쟁이 허용되는지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질 때 선할 수 있다는 얘기로 이해됩니다. 신에 대한 믿음에서 어떻게 자칭 보편적인 윤리체계가 도출되는지는 흔한 조직신학 책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유신론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의 함의들이 보편성은 갖지 못한다는 입장은 그 유신론에 근거한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과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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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 철학사적인 해석의 문제가 개입할 것 같아요. 제가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자신 있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오히려 Arigato 님께서 이쪽 전공자 아니신가요? 그래서 전공자 앞에서 제가 이해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게 민망하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존재(on)'는 일차적으로 '실체(ousia)'를 의미했던 것 같아서요. 반면, 아퀴나스에게서 '실존(esse)'이란 '본질(essentia)'과 함께 '존재자(ens)' 혹은 '실체(substantia)'를 구성하는 원리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라는 개념으로 아퀴나스와 같은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지가 다소 의문스러워요.

가령, 장욱 선생님의 논문에서는 이런 설명이 있어요. (이 논문에서 '존재'는 '존재자ens'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쓰인 것 같네요. '실존'이 'esse'에 대응하는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이해는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가 무엇임과 있음의 결합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을 존재의 내적 구성 원리로 이해하지 않았다. (장욱, 「희랍의 본질의 형이상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형이상학」, 『중세철학』, 제2권, 1996, 66.)

그리고 이 맥락에서 장욱 선생님의 논문에서는 그리스 철학이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아퀴나스의 철학이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구분되더라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본질' 개념을 혼동하였지만, 아퀴나스는 '존재(ens)'를 다시 '본질(essentia)'과 '실존(esse)' 개념으로 구분한다는 점에서 그런 혼동에서 벗어났다면서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희랍 형이상학은 존재를 본질로 오인한 본질주의 형이상학이다. 희랍 형이상학은 영원한 종적 실체(ousia)의 형이상학이나 토마스의 형이상학은 창조된 실체들(substantiae creatae)의 형이상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장욱, 「희랍의 본질의 형이상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형이상학」, 78)

물론, 이 설명이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퀴나스를 통해 비로소 esse와 essentia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설명은 꽤나 일반적인 것 같아요.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관하여』를 번역한 정의채 신부님도 책의 해제에서 비슷한 설명을 제시해서요.

이 서책은 어떤 의미로는 근대와 현대에 횡횡한 서구철학의 본질철학(essentialism)과 존재철하(existentialism)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과 존재 개념이 서구철학에서 토마스에 의해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어 그후 서구철학의 흐름 속에서 존재 없는 본질에 치중한 본질철학과 본질 없는 존재에 치중한 존재철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정의채, 「본 저서의 해제」,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 2004, 17.)

(2-1) 저는 미술계와 교회를 구분하신 점이 다소 자의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아름다움', '미적 감각', '예술성', '작품성', '실력'은 경험 가능한 대상일까요? 반대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초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육화'나 '부활'이나 '영원한 저주'를 믿는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두 질문 모두에 대해 '아니다'라고 생각해요. 사실, 제시하신 내용에는 신앙에 대해 저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주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댓글만으로는 다룰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저는 (a) '검증 가능성'이 결코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과 (b) 초자연적 주장들에 동의하는지 마는지의 문제는 신앙에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가령, 키에르케고어의 글에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사후세계'나 '영원한 저주'나 '초자연적 현상' 같은 것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이 어디에도 없어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야스퍼스는 말할 것도 없고요. 물론, 키에르케고어나 야스퍼스나 기타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성서에 기록된 기적이나 신비 등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런 것들을 믿을지 말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더군다나, 저는 만인구원론적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영원한 저주'를 믿지 않아요. 또 "현생은 찰나에 불과하고 오히려 사후세계가 '실재'라고 여깁니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고요.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도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한데, 예로 드신 내용들에 동의하지 않는 주류 조직신학자나 주류 성서신학자는 정말 많아요. (가령, 위르겐 몰트만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독일 조직신학자이면서도 만유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초대 교부 중에서는 오리게네스가 그랬고요. 또 톰 라이트는 현재의 대표적인 신약성서신학자이면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기독교 내부와 외부의 흔한 이미지가 성서와 맞지 않는다고 강조하죠.)

(2-2) 여호수아서를 인용하신 부분도 '언약(berit)'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왜곡되기 쉬운 구절이라고 생각해요.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당대의 왕과 신하들 혹은 종주국과 속국이 맺었던 언약 관계의 예시를 사용해요. 간단히 말하자면, (a) 언약을 맺을지 맺지 않을지는 자유이지만, (b) 일단 언약이 맺어지고 나면 거기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는 게 당대 사람들의 사고에요.

여호수아 24장도, 여호수아가 "누굴 믿든지 너희 마음대로 하라!"(15절)라고 말하자 백성들이 "우리는 야훼만 믿겠습니다."(16-18절)라고 대답하고, 여호수아는 다시 "너희가 언약을 위반할 시에는 이러이러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19-20절)라고 충고하고, 백성들이 다시 "그래도 우리는 야훼만 믿겠습니다."(21절)라고 대답하는 맥락이에요. 그래서 이런 논의의 결과로 백성들이 결국 야훼와 언약을 성립하게 되고요(25절). 언약을 성립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 앞에서, 백성들이 자유롭게 야훼와 언약을 맺기로 선택했다고 강조하는 내용인 거죠.

이런 언약의 맥락은 구약성서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져요. 가령, 이스라엘이 아직 야훼와 시나이 산 언약을 맺기 전(출애굽기 24장 이전)까지는 이스라엘이 무슨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아도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아요. 오히려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여줘요. 하지만 일단 언약을 맺고 나자,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책임을 물으면서 이후에는 죄에 대해 재앙을 내리죠. 그래서 '언약'이라는 맥락을 놓치고 단순히 축복과 관련된 부분만 떼어놓거나 재앙과 관련된 부분만 떼어놓으면 이야기를 왜곡하기 쉬워요.

계약의 하나님: 발터 아이히로트, 『구약성서신학』 제2장
https://blog.naver.com/1019milk/221360615138

(3) 이 문제도 댓글로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실존주의를 넘어서는 여러 가지 철학적 논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안이라서요. 저는 기본적으로 로티가 말한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 자민족중심주의)'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즉, 규범이란 특정한 문화적 지평을 전제하고서만 유의미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는 주장이에요. 문화적 지평을 벗어난 보편적 규범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자문화중심주의의 핵심 주장이에요.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로티의 글을 정리한 적이 있어요.

리처드 로티의 「연대성이냐 객관성이냐?」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064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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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주의에 갇혔으나 아퀴나스의 창조/실존 철학이 이를 극복했다'는 견해는 질송의 작업으로 널리 알려졌고 아마 인용하신 분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현재에 와서는 질송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많이 이뤄졌고 그가 아퀴나스 사상의 독특함을 강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를 과장했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가령 다음 논문은 아퀴나스에 관한 책에 실렸는데 질송의 견해를 비판합니다.

Bastit, Michel. “Ce qui pour quelque chose est être : l’acte ontique selon Aristote.” In Actus Essendi. Saint Thomas d’Aquin et ses interprètes, edited by Matthieu Raffray, 23–45. Paris: Parole et Silence, 2019.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개념에 관한 다음 논문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본질/존재 구분이 없다는 질송의 견해를 'false'라고 비판합니다.

Menn, Stephen. “Aristotle on the Many Senses of Being.”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59 (2021): 187–264.

  1. 아마도 철학과 종교(기독교)의 접점에 대해 얘기할 때 어려운 점 중 하나가 스펙트럼 또는 종파에서의 차이인 거 같은데요. YOUN 님이 생각하시는 기독교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부활이나 육화는 가령 니케아 신경에서 요약되고 일반적으로 '기독교'라 일컬어지는 종교들에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여겨진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신경에는 무오수태, 죽은 자의 부활, 다가올 세계 같은 초자연적 현상들이 다 언급돼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서문을 인용하는 걸로 충분해 보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며, 인간적으로는 생명이 있는 한에서만 소망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보기에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며, 단지 모든 것 안에 있는 즉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사소한 사건일 뿐이다. 또한 기독교인이 보기에, 죽음에는 인간적으로 봤을 때 단지 생명 자체뿐 아니라 최상의 건강과 왕성함에 이른 생명보다 무한하게 더 많은 소망이 있다(영문판 자체 번역).

즉 죽음이 끝이라고 믿고 절망하는 것이 진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소린데, 그리고 그러한 병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기 위해 책 자체를 쓴 것인데, '적어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런 것들을 믿을지 말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라는 말은 키르케고르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위 인용문을 볼 때 직업 선택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부당해 보입니다.

  1. 그런데 잠시 찾아보니 로티는 종교가 신경들(creeds)을 버려야 하고 내용이나 교리보다는 '사랑이 있냐 없냐를 따지는 인간적 삶'을 강조한 걸로 보이네요. 마찬가지로 경전을 버리고 시나 문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군요. 이런 입장은 키르케고르식 유신론과도 또 달라 보이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절충하려는 입장이 아니신지 모르겠습니다.

(2-1) 우선, 인용하신 키에르케고어 텍스트의 맥락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입니다. 죽음 때문에 절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현상이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또는 사람을 죽은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이에요.

즉,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절망'이란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상태이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상태란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를 원치 않는 상태에요. 군중 속에 숨어서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서 살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의 삶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고, 이렇게 삶 자체를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 바로 '절망'이라는 거죠. 그래서 절망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거고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말은 이 마지막 의미에서다. 그것은 고민에 가득 찬 모순이고, 자기 자신 안에서의 병이고, 영원히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면서도 죽지 못하는 것, 즉 죽음을 죽이는 것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 『죽음에 이르는 병』, 임춘갑 옮김, 치우, 2011, 32쪽.)

[논문] 죄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의 죄 개념(1)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30432067

신앙은 철학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네 편에 대한 철학적 해설
https://blog.naver.com/1019milk?Redirect=Log&logNo=222647653127&from=postView

(2-2) 아울러, 저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칼케돈 신경 등 정통적인 기독교 신경들에 모두 동의합니다. 오히려 저는 초기 교부 시대의 신경들에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가 지금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건, 그 신경들에 나탄나 있는 '육화'나 '이성일인격'이나 '삼위일체' 같은 교리의 맥락을 이 댓글 상에서 다 설명드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에요. 저로서는 제가 예전에 썼던 쪽글로 내용을 대체할 수밖에 없네요.

그리스도론의 역사에서 가장 기적적인 시대: 고전기 그리스도론에 대한 단상
https://blog.naver.com/1019milk/222309787505

그리스도의 인간성: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칼케돈 신경에 따른 단상
https://blog.naver.com/1019milk/222702530307

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3)
https://blog.naver.com/1019milk?Redirect=Log&logNo=220235017145&from=postView

핵심은, 그 신경들이 '초자연적 현상'에 결코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데 있어요. 그 신경들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성령은 누구인가?"를 고백하는 내용들이지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말하고 있지 않아요. 즉, 신경들은 '초자연적 현상'을 믿으라고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을 믿으라고 하고 있어요.

(3) 저는 로티의 종교관에 동의하는 게 아니라 로티의 형이상학적 실재론 비판에 동의해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규범에 대한 로티의 이해에 동의하는 거죠. 둘은 얼마든지 구분될 수 있고, 구분되어야 하죠. 그러니까, 저는 기독교 신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긍정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로티의 실용주의를 통해 주장하고 있어요. 형이상학에 개입하지 않고서도 그 신경의 내용들을 모두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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