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질문

  1. 현재 '삶의 의미'에 관심을 두고 여러 책을 읽어나가는 중인데, 지금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좀 긴가민가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영원성' 과 '변증법적 종합'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죽음을 이르는 병>은 아시다시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自己다. 그런데 자기란 또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 혹은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이 관계의 속성이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의 사태이다. 인간이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종합,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 그리고 자유와 필연의 종합, 간단히 말해 하나의 종합이다. 종합이란 두 가지 사이의 관계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은 아직 ‘하나의 자기’가 아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두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둘을 종합해내지 못했다는 거죠. 여기서 '종합'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비롯된 용어로, '변증법적 종합'이란 어떤 무언가A, 그리고 그 무언가에 반대 되는 무언가 B가 존재한다면 이 둘 중 어느것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좋은(?) 부분을 합쳐 새로운 C로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변증법에 대한 오해라고들 하는 것 같던데 일단 저는 "변증법적"이라고 하면 대충 저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이 논리를 저 문장에 적용하면, 인간은 대립되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둘을 종합해 C에 이르지 못했는데,<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C는 '(두 대립되는 측면을 모두 올바르게(?) 갖춘) 진정한 자기'라는 것이죠.

여기서 첫번째로 이런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맞는 것인지, 키르케고르가 "변증법적" 이라고 하면 대충 저런 의미로 이해하고 가도 되는 것 인지 여쭙고싶네요.

두 번째는 영원성에 대해서 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는 줄기차게 '영원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죠.

다시 <죽병>(다 쓰기 귀찮으니 줄이겠습니다) 첫문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저는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自己다. 그런데 자기란 또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 혹은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이 관계의 속성이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의 사태이다

이 부분을 "내가 나 자신 스스로에게 관계할 때, 파악하는 나와 파악 당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키르케고르는 ‘자기’라고 말한다."고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파악하는 나'는 '나'를 무언가 기존의 자신을 넘어서는, 가능성있는 존재인 '나'를 생각하며 자신을 살펴보지만, '파악당하는 나'는 그런 가능성 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체 사이의 괴리가 절망을 낳는다, 저는 대략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성'은 가능성 있는 존재인 '나' 에 가깝겠죠. 그런데 저는 왠지 이런 이해가 '영원성', 나아가 키르케고르의 논의에 대한 예시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그래서 저의 이런 이해가 과연 맞는지, 나아가 '영원성'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하는지 좋을지에 대해 조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1. 이건 오랫동안 키르케고르를 알아보며 가져왔던 궁금증인데, 내친김에 여기다도 써봅니다.

현재 정리한 <죽병> 제 1부 3장 2.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 하에서 고찰된 절망 에서 키르케고르는 가능성의 결핍이 필연성의 절망을 낳는다 말하며, 이런 절망에서 구원받기 위해선 가능성의 모태(이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인 신을 믿는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신을 믿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오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죠. 즉 절망에는 합리나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신앙의 영역에 들어서, 자신의 구원을 신에게 맡기는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미진한 이해력, 그리고 신앙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 부분이 좀 캥깁니다. 첫번째로는 절망에 벗어나기 위해서 왜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고 가능성의 모태인 신을 믿는 것으로 넘어가야 하는지, 두번째로는 오성을 포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라 볼 수 있는지 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을 위해 신이 부도덕적인 짓을 지시한다면 그대로 따르는것이 옳은 일일까요? 혹은 과정이야 어찌 보이든 신이 부도덕한 짓을 명령할 리 없다고 믿는 게 신앙이라 봐야하는 걸까요?

키에르케고르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헤겔에 대해서만 코멘트를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오해 같네요. 특히 좋은 부분을 합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습니다. 마치 변증법을 진행할 때 헤겔이 좋은 것은 무엇이고 나쁜 것은 무엇인지, 일종의 옳음에 대한 기준을 갖고 시작한다는 뜻 같은데... 이에 동의할 헤겔 학자는 제가 보기에 없을 것 같네요.

그나마 이해를 돕기 위해 무언가 [etwas; something] 과 다른 것 [anderes; other]의 변증법을 보도록 하죠. 우리는 사물들을 무언가/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타이핑하고 있는 이 노트북은 제 옆에 있는 물통이 아닌 무언가죠. 그 둘이 다르지 않다면 둘은 같을 테니깐요. 노트북과 물병을 이렇게 봤을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노트북과 물병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시공간전 규정성들이 있으니깐요. 하지만 헤겔은 이 무언가라는 개념을 무언가로 생각해보자고 합니다. 예전에는 노트북을 무언가로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면 무언가와 다른 것은 달라야하는데, 서로를 구분짓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죠. 무언가는 다른 것과 다르다는 것의 규정성을 갖고 있고, 다른 것은 무언가와 다르다는 규정성만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규정성 외에는 구분지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이 두 개념들은, 적어도 개념을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모순을 일으키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규정성을 통해서 이 모순을 해소 [Auflösung] 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 개념들은 사실은 더 상위의 개념을 추상화하면서 얻은 개념이고, 사실은 자기관계 (헤겔에게 진리적 무한입니다. 아마 키에크레고르가 반대하는 부분이 이 부분 같은데, 잘은 모르겠네요) 라는 개념의 일부만 우리가 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물론 무언가/다른 것의 변증법이 바로 진리적 무한/자기관계로 가진 않지만... 일단 이 논의에서 더 엄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관계라는 것이 무언가와 다른 것의 "좋은 부분"만 떼서 봤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과 부정의 관계를 가져야합니다. 즉, A가 자신에게 관계해서 A'가 됐을 때, A와 A'는 무언가와 다른 것의 관계로 완전하게 유지됩니다. 즉, 무언가/다름의 변증법에서 무언가와 다름의 좋은 부분을 떼간 것이 아닌, 무언가와 다름이 완전하게 유지되는 새로운 규정성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3개의 좋아요

1. 인간은 아직 하나의 자기가 아니다.

인간은 유한한 조건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앞에 열려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의 사태"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시면 됩니다.

(1) 인간은 종합 혹은 관계이다: 인간은 유한한 조건과 무한한 가능성 사이의 관계이다.
(2) 자기란 관계하는 관계이다: (1)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인용하신 문장에서 굳이 헤겔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종합(synthesis)'이라는 말이 반드시 헤겔의 변증법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는 표현은 피히테가 사용한 것이지 헤겔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단순히 (a)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자기 창조의 과정은 (b) 유한한 삶의 조건에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키에르케고어 연구자인 고든 마리노(Gordon D. Marino)의 논문 " Anxiety in The Concept of Anxiety"에 대해 정리한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죄에 빠지는가: 키에르케고어와 불안의 개념
https://blog.naver.com/1019milk/220514791787

2. 영원성과 절망

키에르케고어는 '영원'이라는 표현을 맥락에 따라 약간씩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만, 인용하신 부분에서는 '가능성'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님처럼 "가능성 있는 존재인 '나'"라고 표현하신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절망'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계십니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 채, 주변 사람들이 명령하고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절망'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하고 결단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삶을 방관하고 포기한다는 것이고, 삶을 방관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아래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원 논문 공모전에 제출했던 글(나름 최고 등급인 A등급으로 판정된 글입니다?!)과 <오늘의 신학공부>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요청을 받아 만든 글입니다.

3. 절망과 오성

키에르케고어는 오성을 포기하고 신에게 구원을 맡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키에르케고어에게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치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절망에서 벗어나는 상태라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 되기를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어가 '그리스도교'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벗어나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키에르케고어가 보기에)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규범, 제도, 선입견, 당위를 벗어나서 자신의 불안을 짊어지고서라도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실존적 가르침이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도 예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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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정신현상학 1, 2장을 읽었는데 대강 저런 식으로 진행됐던게 기억나네요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해하고 있던 부분이 교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