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개략적 설명

(0) 주위를 보면, 불교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시는 분이 꽤 있어보입니다. 허나 어디서부터 접근해야할지 어려워하고, 그럼에도 불교에 대한 전체적인 아웃라인을 그려주는 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미력하게나마, 글을 하나 남깁니다.

(0) 이 글은 불교의 사상을 다룹니다. (달리 말해, 개별적인 신앙의 대상/신격, 미술, 교단, 정치-사회사 등의 문제를 여기서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지역적 범위는 그 어떤 책보다 넓을 예정입니다. 인도 - 중앙아시아 - 동북아 - 동남아 - 티베트 모두 다루겠습니다.

(1) 들어가기 앞서 알아두면 유용한 사항들.
a) 흔히 불교 문화권은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인도 산스크리트어 문화권. 2. 동북아 한문 - 대승불교 문화권. 3. 티베트 - 탄트라 불교 문화권. 4. 동남아 상좌부 문화권. 다만 이 분류는 편의상의 분류라서, 문제가 좀 있습니다. 예컨대, 동북아에도 탄트라 불교는 있고, 동남아는 단일한 상좌부 문화권이 아닌 것 등등.
하지만 이 문화권 분류라 유용한 것은 바로 '사상의 기반이 되는 언어’를 기준으로 구분되었다는 점입니다.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한문으로,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어로, 동남아에서는 (12세기쯤부터) 팔리어로 된 경전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논쟁을 펼쳤습니다.

b) 수행과 사상, 종파와 학파는 다릅니다. 예컨대, 선은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도, 천태종에서도 선 수행법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공 사상은 사상입니다. 선종에서도, 삼론종에서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종파와 학파의 구분은 좀 미묘한 문제입니다. 여튼, 종파의 구분이 반드시 학파적 구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종파가 다른 이유는 학파적 대립이 아닌, 규율상의 문제가, 단순히 내분(…)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I) 석가모니 ; 석가모니가 사성제, 팔정도, 무아와 연기를 제시했다는 건 대충 다 알겁니다. 근데 이 석가모니가 탄생한 배경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이 드뭅니다.
석가모니는, 당대 의례 위주의 힌두교에 대한 반발로 출현한 일련의 개혁론자 중 한 명입니다. 이 중 일부는 힌두교 우파니샤드로 남았고, 나머지는 '육사외도’라고 불리면서 비-힌두교/비-전통파로 남아있습니다.

이 중 석가모니만큼 중요한 학파는 자이나교와 차르바카/아지위카입니다. 이 둘은 나머지 외도들이 다 망했을 때도, 불교와 함께 큰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차르바카는 유물론자들입니다.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있고, 이 원자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차르바카는 이것 이외의 모든 관념 - 추론되는 지식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자이나교는 일종의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A와 ~A가 동시에 진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한 자의 지식은 모두 세상의 부분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모두 옳다는 (동시에 그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90년대를 기점으로 영미권 학계에 본격화되었습니다. 특히 인도 본토에 남은 자이나교 도서관들을 연구하는게 계기였는데, 여전히 자이나교와 차르바카에 대한 연구는 불교와 힌두교 연구에 비해서 굉장히 드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Oxford Handbook of Indian Philosophy에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의 경전은 팔리 니카야와 한역 아함경이 있습니다.


(II) 부파 불교/아비달마 불교 ; 이제 석가모니 사후 교단이 분열됩니다. 왜? 석가모니가 남긴 견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견해 차이가 발생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견해의 차이일까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제설(Two Truth Theory)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속적 세상/현상적 세상’이 ‘진리’(제가 진실이나 실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걸, 명심해주시길 바랍니다)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적 세계를 드러나게 해주는 더 근본적인 것인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별 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비달마 불교는 이 현상적 세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 단위’[다르마/법]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여기서 '기본 단위’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게 단순히 물질적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존재(원자)는 물론, 마음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 언어의 가장 작은 개념적 단위까지도, 여기 다르마에 포함됩니다.
여튼 아비달마의 각 학파들은 무엇이 다르마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갈립니다. 그래도 여하튼 무언가 최소 단위가 있다는데는 모두들 동의하죠.

이 부파불교에 속하는 종파-학파로는 상좌부, 설일체유부, 경량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니카야/아함경을 바탕으로 정리한 논장이라는 이론서들과 각각의 계율서들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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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논리학을 모순허용 논리(p ^ ~p =/ ϕ)로 설명하는 그레이엄 프리스트 같은 논리학자도 있더라고요.
몇 가지 근본 모순을 허용해야 된다는 입장인데, 형식논리학의 난점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글자수 제한 때문에 댓글에 내용을 이어서 쓰시는 거라면 글을 새로 만들어서 시리즈물로 써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또 내용이 불교 공부에 대한 팁을 넘어서 불교 자체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보니 ‘종교철학’ 항목에 글을 올리셔도 적절할 것 같아요.

좀처럼 보기 드문 주제로 글을 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사 재학 시절 참여했던 컨퍼런스들 가운데 불교철학에 관한 논문발표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단편적이지만 불교철학의 철학함philosophizing에 대한 접근은 서양철학의 그것과는 사뭇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양철학의 철학함의 방식과 비교해보면, 문제제기와 달성목표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전개의 기승전결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천주교 혹은 개신교에서 삼위일체의 본질에 대해 다루는 것처럼 '종교성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엄밀학으로서의 과학(strenge Wissenschaft/Rigorous Sciecence)이라는 학문 일반의 이데올로기와는 다소간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불교철학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도 좋지만, 불교철학의 (a)문제의식 (b)문제제기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바 © 방법론 (d) 해결방법이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성과도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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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별도의 글보다는 대댓으로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크루아상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맞는게, 비서양철학의 경우, 제가 앞서 쓴 '비서양철학으로 논문 어쩌고'에도 나와있지만, 철학 작업과 철학사적 작업을 잘 분리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후자의 경우, 신학 혹은 철학사적/문헌학적 작업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교를 응용해서 철학적 작업을 하는 학자들이 넘넘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응용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불교가 현상학과 같은 별도의 방법론이나 문제의식을 가진 체계가 아니다보니, 필연적으로 학자들이 불교를 '도굴하듯'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자들마다 문제의식도, 응용하는 불교의 범위도 다 다릅니다.

대략적으로 요즘 서양 학계에서 보이는 경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불교가 주장하는 무아설과 그게 기반한 인식론/심리철학을 현대 분석 철학 - 인지과학에 응용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인지과학쪽에서, 인간의 자아 - 개별 의식이 인간 심리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는 연구 - 주장이 나옴에 따라, 인간의 개별 자아보다 심층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인식론/심리철학'을 재구성하기 위해 불교를 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Dan Robins, Jonardon Ganeri이 있습니다.

(2) 불교와 인도 철학에서 독자적으로 나온 '인도 논리학 - 언어학 - 인식론'을 응용하는 경우입니다. 인도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성립된 체계입니다. 그러다보니, 기존 서양 논리학 - 인식론에 대한 보완재/대체제로 이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위와 겹칩니다.

(3) 도덕심리학, 윤리학, 행복의 철학, 행복 심리학 등에서 불교의 수행법을 인간의 행복과 연관지으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무아설을 주장한 불교가 실제 생활에서, 다른 통일적 자아를 제시하는 문명권과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얀마 불교법 전공자인 Christian Lamments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무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의 인식론/형이상학/논리학/윤리학 - 법학 등을 서양 철학의 문제점을 공략하기 위해 혹은 지평을 넓히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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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인지라 (...) 격렬하게 딴 짓을 하고 싶어서 관련 논의를 살짝 살펴봤는데, 그레이엄 프리스트가 하는 논리학 관련 논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좀 살을 붙여 말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1) 우선 그레이엄 프리스트가 지칭하는 '불교논리학'은 전형적인 불교 논리학이 아닙니다. 흔히 불교논리학이라고 말하는 학문은, 인명론으로 디그나가/다르마키르티에 의해서 확립된 학문입니다. 이 체제의 경우, 추론과 논법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2) 그럼 그레이엄 프리스트가 말하는 모순율을 허용하는 불교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불교 학파 사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중관 사상을 대표하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을 어떤 '논리학적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3) 여기서 갈리는 학파가 자립논증학파과 귀류논증학파입니다. 자립논증학파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이 ~A를 주장하므로, A가 맞다는걸 보여줬다는 주장입니다. 반대로 귀류논증학파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A를 주장할뿐, A가 맞다는걸 보여주는 것과는 상관 없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프리스트가 말하는 모순율을 허용하는 불교논리학은 이 귀류논증학파의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A = A가 아니므로, 모순율을 허용한다는 해석으로 보입니다.

(첨언하자면, 이 논쟁의 시작은 인도지만 학파가 나뉘고 체계화가 된 것은 티베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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