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는 더 용감하게 말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근래에 읽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저의 생각을 주절주절 써볼까 합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일심이문一心二門” 혹은 “불이법문不二法門” 등으로 요약되곤 한다. 이는 자체이자 근거로서의 일심一心과, 이를 두 가지 층위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심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에서 분석하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도식화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식화 하면 좌측에 속하는 것들과 우측에 속하는 것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좌측에 속하는 것들은 긍정적이고 우측에 속하는 것들은 부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의 체계 내에서 이 둘은 결코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승 이전의 불교는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를 이원화하여 중생적 생사를 버리고 깨달음에 의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 반면 대승은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문에 따라 중생의 생사까지도 긍정하고자 한다.” (한자경, 『대승기신론 강해』, 불광출판사, 2013, 29쪽.) 다시 말해 대승 이전까지는 좌측에 속하는 것들을 긍정하고 우측에 속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방식을 취해왔으나, 대승은 이 둘을 포괄하고 긍정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를 포괄하고 있는 ‘일심’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에서는 왜 마음의 현상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일까? 마음의 현상적 측면에 다양한 오류가 있을 순 있지만, 그렇다고 이 현상적 측면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은 마음의 현상적 측면이 지니고 있는 2가지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첫째, 마음의 현상적 측면은 마음 그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心生滅者. 依如來藏, 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為阿梨耶識.
마음의 생멸적 측면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생멸하고 변화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불생불멸하는 진여적 측면’과 ‘생멸하고 화합하는 생멸적 측면’은 동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니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마음의 현상적 측면은 이 현상을 발생시키는 근거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를 “여래장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마음의 현상적 측면은 마음 그 자체의 발현이자 작용이라는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마음의 현상적 측면은 부정하면서, 마음 자체를 긍정하는 두 가지 태도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마음의 현상적 측면은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불교는 열반과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열반과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방법을 제시하였다. 『대승기신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마음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양상을 해체시키고 분석하는 서술전략을 채택하였다. 「현시정의」는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저술된 챕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전략은 마음의 현상적 측면이 갖고 있는 첫 번째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마음의 현상적 측면이 마음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면, 현상적 측면은 마음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질그릇과 진흙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 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皆同真如性相.
예를 들어 각종 질그릇[瓦器]은 모두 진흙[微塵]의 속성 및 모습과 동일하다. 이처럼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이 만들어내는 각종 업과 환망[幻]은 모두 진여의 본성 및 상과 동일하다.
이렇게 현상적 측면이 본체적 측면에 근거하고 있으며 본체적 측면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마음이 생멸하는 과정을 해체시킴으로써 우리는 마음 자체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청정함이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회복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과 변화의 현상세계는 허망한 생각[妄念]에 의한 것으로서, 이를 여의게 되면 차별과 변화 또한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일체의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평등 불변의 존재로서, 이는 다름 아닌 일심(一心)의 세계이다.”(권오민, 『인도철학과 불교』, 민족사, 2004, 324쪽.) 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마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은 우리가 열반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현실적 계기로서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현상적 마음을 ‘불각不覺’과 ‘본각本覺’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분석한다.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불각이란 범부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명無明’에 의해 염오된 중생들의 현실적인 상태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는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 범부가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러한 매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所謂眾生依心, 意·意識轉故. 此義云何? 以依阿梨耶識, 說有無明, 不覺而起能見·能現, 能取境界, 起念相續, 故說為意.
소위 “중생은 마음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뢰야식에 의거하여 무명이 있게 된다. 불각의 상태에서 인식주관과 인식의 재현을 발생시킨다. [그리하여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취하게 되면, 염을 일으키고 [염이] 상속하게 되니 그러므로 ‘의意’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무명으로부터 비롯된 불각의 상태는 중생으로 하여금 인식주체로서의 ‘자아’가 실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만들고, 인식주체를 상정하게 되면 인식주체가 인식의 재현을 발생시킬 것이며, 인식의 재현이 특정한 생각[念]을 산출하게 되며, 특정한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산출시켜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두컴컴한 곳에서 새끼줄을 뱀이라고 오해하는 상황을 상정해보자. 불각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새끼줄이라는 특정조건[緣]과 상호작용해서 ‘뱀이다!’라고 떠올리는 것은 인식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뱀’이라는 인식대상을 산출하고, 이것(뱀)이 마치 외부에 실재한다고 오해하게 된다(혹은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인식대상에 집착하게 된다면 ‘으악! 도망가자.’라고 하는 생각이 발생할 것이다. 이는 염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망가자’라는 염은 ‘이 곳의 출구는 어디에 있지?’하는 또 다른 염을 산출시킬 것이다. 결국 외부의 실체로서 뱀을 상정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허둥지둥 거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각을 회복해야 한다. 본각이란 본래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로서 진여의 평등성을 깨친 상태이며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불각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상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로서 ‘의식의 전변’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하지만 만약 이러한 불각의 마음조차 떠나버린다면 진정한 깨달음[眞覺]의 자체적인 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若離不覺之心, 則無真覺自相可說.]라고 말하였다. 즉, 위와 같은 경험은 인식의 내용이란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알게 하는 계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뱀으로 오해한 것이 결코 외부의 조건만으로 산출될 수 없다는 점에서, 뱀이라고 오해한 상황은 내가 진정한 깨달음 즉 모든 인식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무분별성을 깨닫게 되는 유일한 계기일 수밖에 없다.
『대승기신론』에서는 현상적 마음에 발생하는 두 가지 계기, 즉 본각과 불각이 전변하는 과정을 ‘훈습’으로 설명한다. 본각 → 불각으로 전변하게 하는 훈습을 ‘염법훈습染法熏習’이라 하며 불각 → 본각으로 전변하게 하는 훈습을 ‘정법훈습淨法熏習’이라고 한다. 이로써 현상적 마음은 특정원인[因]과 특정조건[緣]과 상응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불각의 상태에서 본각의 상태로 전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약해보자면, 『대승기신론』은 경험적 자아를 해체시킴으로써 현상적 마음과 진여적 마음을 구분하고, 이를 다시 하나의 체계로 재조직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대승기신론』은 현상적 마음을 딛고서 진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