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종교를 믿는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가?: 틸리히의 설교에 대한 비판

Christianity in the present world encounters several forms of circumcision and uncircumcision. Circumcision can stand today for everything called religion, uncircumcision for everything called secular, but making half-religious claims. There are the great religions beside Christianity, Hinduism, Buddhism, Islam and the remnants of classical Judaism; they have their myths and their rites—so to speak their "circumcision"—which gives each of them their distinction. There are the secular movements: Fascism and Communism, Secular Humanism, and Ethical Idealism. They try to avoid myths and rites; they represent, so to speak, uncircumcision. Nevertheless, they also claim ultimate truth and demand complete devotion. How shall Christianity face them? Shall Christianity tell them: Come to us, we are a better religion, our kind of circumcision or uncircumcision is higher than yours? Shall we praise Christianity, our way of life, the religious as well as the secular? Shall we make of the Christian message a success story, and tell them, like advertisers: try it with us, and you will see how important Christianity is for everybody? Some missionaries and some ministers and some Christian laymen use these methods. They show a total misunderstanding of Christianity. The apostle who was a missionary and a minister and a layman all at once says something different. He says: No particular religion matters, neither ours nor yours. But I want to tell you that something has happened that matters, something that judges you and me, your religion and my religion. A New Creation has occurred, a New Being has appeared; and we are all asked to participate in it.1

(1) 틸리히만큼 심오하고 아름다운 설교를 하는 인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틸리히의 설교에는 언제나 조직신학적 성찰이 깊이 녹아 들어가 있다. 설교 한 편 한 편이 정교하게 구성된 틸리히의 전체 조직신학 체계를 주제별로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흔들리는 터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지금』 같은 틸리히의 설교집은 조직신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설교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조직신학자가 전개한 웅장하고, 치밀하고, 원숙한 사유가 담겨 있다. 10여쪽의 짧은 설교문들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성서 해석의 문제와 현실의 사회적 이슈에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적-철학적 성찰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말하자면, 틸리히의 설교들은 "유한은 무한을 수용할 수 있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라는 표어가 실현된 텍스트 그 자체이다. 루터파 신학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명제이자 틸리히의 조직신학을 대변하기도 하는 이 표어야 말로, 가장 깊이 있는 사유를 가장 쉬운 언어로 녹여내는 틸리히의 설교들을 묘사할 수 있는 문장으로 적합해 보인다.

(2) 그러나 틸리히의 설교들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에서 너무나 명확한 시대적 한계를 갖는다. 틸리히의 사유는 세 권의 『조직신학』 시리즈가 출간된 1951-1963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시대적 문제에 답하고자 하였던 인물이다 보니, 자신이 살아있던 당시의 철학과 종교학에서 주목받은 최신 이론들을 동원하여 조직신학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틸리히의 조직신학에는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존재론, 오토의 종교현상학, 불트만의 신약성서 신학, 융의 분석심리학 같은 지난 세기 사상들의 흔적이 너무 짙게 배여 있다. 1960년대 이후에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종교학적, 철학적, 신학적 발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틸리히가 제시하는 조직신학의 체계는 사실 다소 낡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틸리히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학문적 전제에 의존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3) 가령,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는 설교에서 갈라디아서 6:15에 나타나는 '할례/무할례' 구분의 철폐를 자신의 조직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해설한다. 즉, 바울에 따르면,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특정한 종교적 전통(할례)'을 받아들이는지 파시즘, 공산주의, 휴머니즘, 이상주의 같은 '특정한 세속적 전통(무할례)'을 받아들이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우리 시대에 재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나 의례 같은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요소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존재'이다. 우리 자신이 '용납(acceptance)'되는 경험, 그래서 이전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불안(anxiety)'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화해(re-conciliation)되고, 통합(re-union)되고, 부활(re-surrection)'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경험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경험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고 있을 뿐, 특정한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4) 틸리히의 갈라디아서 해석은 틸리히 자신의 독특한 존재론을 전제한다. 즉, 틸리히에게 '존재(being)'란 '비존재(nonbeing)'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힘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협하는 운명과 죽음, 공허함과 무의미, 죄책감과 정죄에 맞서서 '존재의 용기(존재할 용기, courage to be)'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용기란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용납되었다는 경험에 사로잡힘으로써 생겨난다. 비록 나는 내세울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확신이 나를 사로잡을 때, 나는 나로 존재하길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진리는 바로 이러한 '존재의 용기'이다. 얼핏 표면적으로 서로 달라 보이는 각각의 종교들에서 상징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실재(Realitty)'란 바로 비존재와 싸우고 있는 존재의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의 종교 전통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God)'의 상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힘이야 말로 모든 종교 전통을 넘어서는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이다.

(5)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종교학이 각각의 종교들이 지닌 공통점을 하나의 철학적 체계로 요약하고자 하였던 것과 달리, 오늘날의 종교학은 이러한 작업이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지난 세기보다 훨씬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우리 시대의 종교 이론들은 다양한 종교 전통을 하나의 체계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사실 대단한 논리적 비약과 이론적 단순화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religion)'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 사회의 관점에서 형성된 인공적 범주라고 지적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앙 전통을 단일한 개념 아래에 포괄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6) 더 나아가, 애초에 틸리히가 제시하는 존재론을 각각의 종교적 상징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실재'로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매우 불분명하다. 틸리히는 단지 일종의 '인식적 특권(epistemic privilege)'을 내세워 자신의 존재론이 종교적 상징 뒤편의 '실재'를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가 자기 안에서 비존재를 끊임없이 극복해내는 힘이라는 주장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결국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그림'일 뿐이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떠한 관점에서 그림을 그리는지에 따라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그림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다. 가령, 존재를 약동하는 '힘'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그림은 존재를 '자연종'과 같이 엄격하게 구획된 본질적 대상의 집합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그림보다도 더 우월한 것인가? 두 형이상학적 그림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기만 할 뿐, 어느 쪽도 '실재'에 대한 인식적 특권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7) 신약성서 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갈라디아서에 대한 틸리히의 해석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1970년대 말에 제시된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이후로 상당수의 성서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할례/무할례'의 구분에 대한 바울의 비판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법, 음식법, 절기법의 준수 여부를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유대인들 자신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가 민족적 기준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넘어서는 심오한 종교적 경험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정의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적 혈통이 유대인인지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지에 따라 정의된다는 것이다.

(8) 이러한 점에서, 틸리히의 주장과는 반대로, '어떠한 종교를 믿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a) 종교학적으로, 특정한 종교를 넘어서는 일반적 종교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믿든지, 힌두교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이슬람교를 믿든지 개별 신앙 전통을 믿는 것이지 그 모든 신앙 전통을 넘어서는 '하나님 위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b) 철학적으로, 실재를 표상하는 단일한 형이상학적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그려내는 형이상학적 그림이 타종교가 그려내는 형이상학적 그림과 근본적으로 일치할 것이라는 주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b) 신학적으로, 성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정체성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9) 따라서 틸리히 이후의 모든 종교학적, 철학적, 신학적 이론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라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틸리히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오라. 우리는 더 나은 종교이다. 우리의 할례 혹은 무할례는 너희의 것보다 더 수준 높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본질이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성공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하자. 그러면 너는 그리스도교가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게될 것이다."라고 증언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이다.

  1. P. Tillich, "The New Being", The New Being, 2005, Lincoln and Lond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05, pp. 16-17.
4개의 좋아요

우리는 자유주의 세계에서 살다보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거의 직관적으로, 최소한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배타적이지 않은 태도가 배타적인 태도보다 더 좋은 태도라고 느껴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가 생각할 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가 "배타적인 신념체계보다 배타적이지 않은 신념체계가 더 훌륭하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런 명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더 나은 종교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를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종교보다 덜 훌륭하다고 판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기독교 내부적인 반론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저는 기독교 이론을 전혀 모릅니다. 다만 배타적인 성격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1. 기독교는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2.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타종교와 문화를 포섭하고자 하는 것은 배타적인 행동이다.
  3. 기독교적 사랑은 겸손하다. (빌립보서 2:3-8.)
  4. 기독교 사랑은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5. 기독교는 기독교적 사랑을 추구한다.
  6. 그러나 2번과 4번은 양립할 수 없다.

물론 배타적인 행동이라는 의미, 우월성이라는 의미를 조작해서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와 같은 개신교 외에 놓여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좋은 신앙이라면,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생각 자체를 버리고, 함구하며, 우월한 체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고통과 괴로움의 속에서도 욥의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한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힘을 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신앙체계와 문화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랑이라는 제일계명으로부터 멀어질 일말의 가능성을 부담하기보단 말이죠. 하지만 이 또한 신학을 전혀 모르는 채로, 인상 비판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고자 쓴 글도 아닙니다. 다

2개의 좋아요

예전에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인도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종교에 대한 성찰을 담은 꽤나 철학적인 영화인데, 거기서 주인공이 자신은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를 모두 믿는다고 하자 주인공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해요.

"모든 것을 믿는다는 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과 똑같다."

브랜덤의 추론주의 의미론으로 저 대사를 해설하자면, 토의 상황에서 특정한 '주장(claim)'이나 '언명(assertion)'을 제시한다는 것은, 곧 그 주장으로부터 도출되는 다른 추론적 귀결들을 인정하고 그 주장과 모순되는 명제적 내용들은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자신의 주장과 추론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믿음들을 적절하게 인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어게임에서 유의미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거에요.

저는 종교적 '증언', '선포', '설교', '교의' 등도 이런 원칙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봐요. 특정한 종교가 제안하는 믿음에 동의한다는 건, 그 믿음의 추론적 귀결들을 인정하고 그 믿음과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내용은 배제하는 활동에 참여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특정한 종교를 자신의 정체성 속에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종교나 다른 이데올로기와 일종의 경쟁 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과 상대방이 받아들이고 있는 믿음을 끊임없이 비교, 대조, 평가하면서 보다 정합적인 믿음의 체계를 형성하려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거죠.

물론, 저는 경쟁하는 둘 이상의 종교적 진술을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모든 평가는 주어진 토의 상황에서, 평가자가 어떠한 인식적 관심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우리가 심지어 개인의 취향에 대해서조차 "나는 치킨보다 피자가 좋아.", "나는 액션물보다는 로맨스물이 좋아.", "나는 클래식보다는 POP이 좋아."라고 말하면서 그 근거를 댈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이런 정당화, 입증, 논박, 수정 같은 토의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 구약성서 예언자들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공 같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야훼의 뜻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졌을 때, 각각의 예언자들은 그 가운데서 자신들이 전하는 '야웨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거죠. (사족으로, 어빙 코피의 유명한 논리학 입문의 제일 앞장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는 이사야 1:18이 인용되어 있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다른 종교와 싸워서 거짓 믿음을 쳐부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제시했던 것처럼 '생명에로의 초대'라는 개념으로 종교 간의 대화를 이해하는 걸 선호해요. 신앙인이라면 "와서 보아라"(요한복음 1:39)라는 말로 비신앙인을 초대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지닌 가치를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증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개의 좋아요

매우 동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다만 종교의 배타적 성격이, 신앙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다른 추론적 귀결들에 해당하는지, 또 배타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 혹은 약하게 가지는 신앙적 태도를 유발하는 믿음이 특정(아마도 기독교?) 신앙과 배타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 종교를 자신의 정체성 속에 받아들인 사람일지라도, 다른 이데올로기와 일종의 경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특정 종교를 믿는 어떤 태도를 자기 정체성 속에 받아들인 사람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즉 특정 종교를 믿되 문제가 되는 태도를 가지지 않는 경우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치겠지요.
흥미로운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위에 제가 사랑 운운하면서 제 생각을 말했으니 더 말을 붙이진 않겠습니다.
아니면, "배타적임"이라는 태도에 대해서 서로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를 수 있겠지요.
와서 보아라! 이런 것은 제 직관으로는 딱히 배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중점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많은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