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철학은 신과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가? (with 랜선교회 오승원, 유한철학회사 윤유석, 로고스서원 김희림)

기독교 철학 채널 Damascus TV에서 주최하는 대담회에 참여했습니다. 아래는 제 발제문입니다.

신앙주의: 신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답변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을 정의하자면?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나 자신의 입장을 ‘신앙주의(fideism)’라는 명칭으로 규정하길 좋아한다. 신앙주의란 이성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서 이성보다도 신앙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정적인 형태로 정의하자면, 신앙주의는 (1) 신앙의 진리를 이성의 진리로 환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2) 신앙의 진리가 이성의 진리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입장이나, (3) 신앙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성의 진리를 확장할 수 있다는 입장에 반대한다. 긍정적인 형태로 정의하자면, 신앙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가 별도의 형이상학적, 자연과학적, 사회과학적 토대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한다. 철학사적으로는 테르툴리아누스,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비트겐슈타인이 대표적인 신앙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내세운 여러 가지 주장 중에서도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테르툴리아누스)와 “믿음이란 사유가 끝나는 곳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키에르케고어)가 신앙주의의 입장을 집약하는 표어로 유명하다. 나는 이러한 신앙주의를 바탕으로 내가 지닌 종교적 관점의 특징을 더욱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리스도중심적: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람이다. 나로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도 우선시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떠한 의미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유혹에 빠져서 그리스도보다 다른 가치를 추구할 현실적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규범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가치와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한다. (따라서 그가 현실적으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따르지 못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였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질렀고,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계시중심적: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가치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계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무슨 의견을 지니고 있는지보다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시하셨는지를 더욱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내가 ‘계시’라는 용어로 염두에 두고 있는 사태는 세 가지이다.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성경, 그 성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선포가 바로 계시의 양태들이다. 이러한 계시의 양태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다른 판단들을 도출해내기 위한 추론의 전제이지, 다른 판단들로부터 도출되는 추론의 결론이 아니다. 계시가 다른 판단들을 정당화하는 토대이지, 다른 판단들이 계시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선포가 다른 토대를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계시에 앞서는 인식론적 근거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함의한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은 계시에 앞서는 다른 근거를 인정할 수 없다.

교회중심적: 계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적 가치를 지향하는 삶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고민되고, 형성되고, 유지된다. ‘교회’라는 상호주관적 지평을 벗어나서는 (그리고 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친교’라는 사회적 실천을 벗어나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따를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상실되고 만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올바른 모습이고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하는 올바르지 않은 모습인지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적 토의를 통해서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1) 그리스도교적 규범이란 저 하늘 어딘가에 떠 있는 플라톤적 이데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관찰한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것이고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발견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2) 그리스도교적 규범이란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데카르트적 본유 관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주관적 감정이나 확신 따위를 근거로 자신이 따라야 하는 규범을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기합리화에 빠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3) 그리스도교적 규범이란 공동체를 통해 성립하는 헤겔적 정신이다.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속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한 그리스도교적 사상, 그리스도교적 예술, 그리스도교적 제도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강제하고, 장려하는 실질적 권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교회를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나는 교회야 말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장소라는 점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혹은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라는 표어를 지지한다.

철학 공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의 차이점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기 전에 객관적 실재, 진리, 합리성의 존재를 마치 자명한 것처럼 믿었다. 신앙의 진리는 이성의 진리와 동일하거나 이성의 진리를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청소년기에 내가 지니고 있던 생각이었다.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당시의 나는 일종의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를 지지하였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물리적 대상이 시공간 속에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주 어딘가에 고정된 형이상학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성경의 내용이 과거에 일어났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역사학적이거나 자연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성경의 내용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러한 실증적 증명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라는 사실을 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지니고 있던 생각이 수많은 형이상학적 독단과 인식론적 편견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내가 이성과 신앙에 대한 플라톤주의와 칸트주의를 벗어나 신앙주의를 지지하게 된 과정에서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들과 논의들이다.

키에르케고어: ‘진리’라는 용어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용어와 동일시될 수 없다. 더욱 전문적인 논의 구도를 도입하자면, 진리를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일치라고 정의하는 ‘진리 대응 이론(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은 인식론적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 삶에서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사태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주체적) 성격을 지닌다. 가령,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4,400km이다.”와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는299,792,458m/s이다.”라는 과학적 문장이 ‘진리’라고 해도, 이러한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답을 주는 진리인 것은 아니다. 객관적 사실로서의 진리란 기껏해야 다양한 진리의 형식 중에서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나는 어떤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회사에 취직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등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가 “이 상황에서 무엇이 진리인가?”라고 질문하게 될 때의 ‘진리’란 객관적 사실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에서 우리가 어떠한 세계관을 믿고 따를 것인지 주체적으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선택을 통해 우리가 따르기로 결정한 대상이 우리에게 있어 ‘진리’가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라는 의미 역시 신앙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이 우리가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가치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이란 바로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신앙의 진리가 이성의 진리를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인식론적 편견이다. 참/거짓이란 언제나 각각의 맥락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가령, “경기 중 선수는 공을 손으로 잡아도 된다.”라는 명제는 축구의 맥락에서는 거짓이더라도 야구의 맥락에서는 참이다. 어떠한 맥락을 전제하고 있는지에 따라 동일한 명제는 참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즉, (1) 논의의 맥락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명제의 참/거짓을 검증할 수 있는 일반적 형식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모든 놀이에 적용될 수 있는 ‘규칙 자체’ 따위가 존재한다는 허구적 가정과도 같다. (2) 한 맥락에서 성립하는 참/거짓을 다른 맥락에서 적용되는 규칙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무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축구 선수가 공을 발로 찬다는 사실을 비판하기 위해 농구 선수는 공을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내세우는 억지와도 같다. 마찬가지로, (3) 수많은 맥락 중에서 무엇이 가장 우월한 맥락인지를 따지려는 시도는 무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중에서 객관적으로 더 우월한 종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일반적 이론을 제시하려 하거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기준을 통해 검증하려 하거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다른 수많은 진리들 중에서 무엇이 객관적으로 더 우월한지 따지려 하는 시도들은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는 다른 어떠한 토대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자신의 맥락 속에서 자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형식논리학과 비판적 사고론: 신앙의 진리를 형식논리학과 비판적 사고론에서 제시되는 조건에 맞추어 평가하려는 시도조차 결국 특정한 관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해석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특정한 논증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그 논증이 형식적으로 타당(valid)하고 내용적으로 건전(sound)한지를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 주어진 논증을 형식적으로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지는 해석의 문제이다. 우리가 주어진 논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해당 논증을 강한 방식으로도 약한 방식으로도 재구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 주어진 논증을 내용적으로 어떻게 검토해야 하는지 역시 해석의 문제이다. 우리가 전제의 참/거짓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인 검증가능성, 반증가능성, 설명력, 정합성, 단순성 등은 그 자체로 무엇이 객관적 진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가령, 전제에 대응하는 한 가지 사례가 입증되거나 반증되었다고 해서 그 전제가 입증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을 만족하는 것으로 곧바로 판정되지는 않는다. 또한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이론 A와 B 중에서 A는 사례 a, b, c를 설명하고 B는 사례 b, c, d를 설명할 경우 둘 중 어느 것이 더 설명력이 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가설 h1, h2, h3를 받아들이는 이론과 가설 h1, h3, h4를 받아들이는 이론 중 무엇이 더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서로 다른 이론을 바탕으로 성립된 정합적인 세계관 W1과 W2가 동일한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상황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성서, 간증, 신경,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신앙의 진리가 함의하고 있는 논증들의 형식적 타당성과 내용적 건전성은 얼마든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이데거와 콰인: 하나님, 영혼, 천사, 기적 등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조차 관점을 전제한다. 존재자를 우리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혼자 고정된 형이상학적 위치에서 머물러 있는 무엇으로 상상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곳에 소위 ‘사물 자체(Ding an sich)’가 놓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필증적(apodiktisch)이지도 명증적(evident)이지도 않은 형이상학적 가정일 뿐이다. 오히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객관적 사물로서의 ‘철수 자체’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수는 단지 우리가 어떠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등의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논증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페가수스’처럼 해당 지칭체의 존재 여부가 논란이 되는 명사를 포함하는 문장을 1차 술어논리를 사용하여 우리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제각각의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페가수스는 존재한다.”에서 ‘페가수스’라는 명사를 기술구로 대체하여 해당 문장을 “날개 달린 단 하나의 말은 존재한다(∃x)[Hx·Wx·(y)(Hy·Wy⊃(x=y)}].”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페가수스’를 “페가수스화한다(pegasize).”라는 더 이상 분석 불가능한 술어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해석하여 “페가수스화하는 단 하나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x)[Px·(y)(Py⊃(x=y)}].”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어떠한 번역을 취하는지에 따라 해당 문장을 긍정하기 위해 속박 변항 ‘x’나 ‘y’가 지칭해야 하는 대상의 범위가 달라진다. 해당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이론이 어떠한 존재론에 개입하는지는 1차 술어논리에 따라 분석된 문장이 어떠한 속박 변항의 값을 갖는지를 통해 표현된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번역의 과정이 결국 우리 자신의 관점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서로 다른 존재론에 개입하고 있는 두 번역은 모두 동일하게 주어진 문장의 진리 조건을 분석한다. 따라서 어떠한 존재론도 그 자체로 다른 존재론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될 수는 없다.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는 우리가 어떠한 관점을 취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헤겔: 진리가 우리가 속한 사회와 역사 바깥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형이상학적 독단이다. 진리를 마치 저 어딘가에 놓인 대상인 것처럼 상정하는 입장은 해결할 수 없는 소위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Aporie des Dinges an sich)’라는 사이비 문제를 발생시키기만 한다. 즉, (1) 이러한 입장은 일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경험이 사물 자체는 아니라고 의심한다. 모든 지식은 철저한 회의의 대상이 되어 우리의 표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2) 이러한 입장은 특정한 경험만큼은 예외적으로 사물 자체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지식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1)과 (2)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지식이 회의되어야 할 경우 어떤 지식도 예외적으로 진리에 대한 인식적 특권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고, 어떤 지식이 예외적으로 진리에 대한 인식적 특권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경우 모든 지식이 회의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 바깥에 진리가 따로 놓여 있다는 생각은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에 따라 모순을 발생시키는 잘못된 전제로서 부정되어야 한다. 오히려 일상의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교육받아, 믿게 되어, 따르고 있는 내용들은 의심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 별다른 정당화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공동체 속에서 형성한 신앙 역시 의심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경우 별다른 정당화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의 진리 바깥에 더 우월한 이성의 진리를 상정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1)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다양한 사태 중에는 객관적 사실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2) 이러한 진리들은 각각의 맥락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의미를 지닌다. (3) 우리는 그 진리들 중 어느 것이 더 뛰어나고 어느 것이 더 열등한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4) 심지어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조차 다양한 진리 주장이 가능할 수 있다. (5) 결국,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문제는 “우리는 어떠한 사회와 역사에 속해 있는가?”라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상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과 교회의 선포가 그 자체로 ‘그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발판삼아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신앙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활동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정당한 활동인 것이다.

철학 공부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바뀌지 않은 생각

철학 공부를 통해 나의 신앙 자체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철학 공부는 신앙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바꾸어주었다. 그러나 철학 공부가 내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철학을 전공한 이후로 내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철학을 전공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모두 동일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몰트만이 추가한 것처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쫓겨난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을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으키시며, 모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나는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철학은 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늘려줄 수 있을까?

철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결코 늘려줄 수 없다. 철학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월권행위이다. 철학이 우리가 믿어야 할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즉, (1) 이러한 생각은 철학이 사회와 역사의 맥락을 벗어나 저 어딘가에 형이상학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신에 대해 합리적 논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공동체에서, 어떠한 정체성을 받아들여,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해명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애초에 “신은 존재한다.” 혹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 무엇이 ‘진리’인지 말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2)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교회와 무관한 장소에서 객관적 지식의 형태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교회가 실제로 말하는 하나님에게 투영하고자 하는 시도는 독단일 뿐이다. 따라서, 파스칼이 강조한 것처럼, “철학자의 하나님과 과학자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다. 철학자의 하나님과 과학자의 하나님에 대한 탐구는 허상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 안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오직 교회 속에서 계시를 통해 알려진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과 교회의 선포로부터 배워야 한다.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셨고,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교회를 세우셨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심지어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만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조차도 알 수 없다. (신이 전능하지 않다고,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만물을 하찮게 여긴다고 믿는 종교는 수없이 많다. 유대-그리스도교 이외의 대부분의 고대 종교에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라는 신 관념이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과 교회의 선포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에 대한 증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신학이다. 당연하게도 신학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속에서, 교회에 의해,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지는 학문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맥락과 의미와 진리를 지닌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학문적 의미에서 확장되고 비판되는 활동이 신학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학 입학 이후에 내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학문은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었다. 내가 신앙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문들은 조직신학과 성서신학의 논의들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다음은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주로 고민한 문제들과 내가 신학에서 발견한 잠정적 대답들이다. (나에게는 신학의 전문적 논의를 설명할 권한이나 능력이 없다. 내가 제시하는 내용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논의들일 뿐이다. 나는 내가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 신학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그러한 의견들이 제시되는 상황에서는 내 의견을 바꿀 의향 역시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충돌하는가?: 나는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창조론(doctrine of creation)’을 지지하기 위해 창세기 1-3장의 내용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을 지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창세기는 세상의 기원에 대한 실증적 설명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창세기는 「에누마 엘리쉬」 같은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들을 고려하면서 쓰인 책이다. 가령, 하나님이 “혼동과 공허”(창세기 1:2)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세기의 증언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최고신인 마르둑이 태초의 혼돈의 신 티아마트의 몸을 갈라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에누마 엘리쉬」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창세기에 사용된 ‘혼돈’이라는 히브리어 ‘테홈’의 어원이 ‘티아마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를 읽는 과정에서 창세기가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들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차용하였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 창세기는 고대 근동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신화를 바탕으로 창조의 과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유대교의 독특한 관점에서 기존 신화 속 신 관념과 인간 관념을 거부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마치 천체물리학이나 생물학 교과서처럼 읽으려는 태도는 창세기가 지닌 문학적 특징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천로역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그리스도교 문학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을 발견해내고자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엉뚱하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죄가 형이상학적 실체나 윤리적 위반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죄는 ‘거룩/세속’과 ‘정결/부정’이라는 유대교의 종교적 범주를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특별히 구분된 사물이나 사람은 ‘거룩한’ 것으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남겨진 나머지 사물이나 사람은 ‘세속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세속적인 것들 중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의 관념에 부합하는 사물이나 사람은 ‘정결한’ 것으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남겨진 나머지 사물이나 사람은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다. 성경에서 죄란 부정의 한 유형이거나 부정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성서에서 누군가가 죄인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종종 그가 어떤 구체적인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닌지와 무관하기도 하다. 던이 지적하는 것처럼, ‘죄인’이라는 개념은 그 사람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종파적(factional)’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의 소유물로 선택된 거룩한 백성 바깥에 놓인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 ‘죄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령,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 유대 민족이 아닌 모든 이방인을 그 자체만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십자가와 부활은 ‘거룩한 백성’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한 사건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기꺼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복음 11:19)가 되셨다. 심지어 그분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복음 15:34)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규정하였다. 바르트가 강조한 것처럼, 예수는 단순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인간’이 되셨다. 또한 몰트만이 강조한 것처럼,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혹은 ‘하나님 없는 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예수를 다시 부활시키셔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하였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하였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었던 예수는 역설적이게도 부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의롭다고 선포되었다. (라이트에 따르면, 1세기 유대교에서 부활이란 세상에서 억울하게 고통 받은 사람들에게 종말의 날에 일어날 하나님의 최종적인 칭의 선언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였다는 사실은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 바깥에 놓여 있던 모든 죄인들에게 커다란 구원의 소식이 된다.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짖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목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들의 절규를 인정하셨고,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호세아 1:10; 로마서 9:26)라는 약속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교회는 왜 중요한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경계를 얻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하우어워스와 맥나이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 밖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윤리적으로 완전히 흠 없는 공동체라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다. 교회에는 분명히 수많은 오류와 문제가 있다. 다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어디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지는 윤리적으로 흠이 있는지 없는지와는 무관한 문제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흠 많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나라’로 선언하셨다.) 오히려 교회가 많은 오류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조차 교회가 이미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로부터 비판받아야 한다. 축구 선수가 경기 중에 반칙을 하였다는 사실조차 그가 축구 선수로서 축구 경기에 참여하고 있을 때에야 비판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을 때에야 비판받을 수 있다. 축구 경기의 맥락 바깥에서는 “축구를 잘한다/못한다.” 혹은 “반칙을 하였다/하지 않았다.”라는 평가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맥락 바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어겼다.” 혹은 “죄를 범하였다/범하지 않았다.”라는 평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라 매 순간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종말의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성경이 그리는 종말은 의인에 대한 보상과 악인에 대한 처벌을 넘어서 만물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몰트만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로서”(고린도전서 15:28) 계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악인에 대한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이미 ‘종말론적으로’ 선언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셨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를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하시기로 선언하셨다면, 이제 하나님 바깥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남아 있는 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의 내용이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알려졌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 바깥에 있던, 자신에게 호소하던, 자신에게 반항하던 모든 만물을 위한 하나님이 되신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만물이 거룩하게 회복된다.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만국(에트노스)’을 위해 열려 있을 것이다(요한계시록 21:24). (‘만국’은 이스라엘 바깥의 이방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방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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