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분과 같이 운영하는 기독교 철학 채널에 키에르케고어를 소개하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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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것이냐/저것이냐』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대조가 가장 날카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키에르케고어의 저작이 바로 『이것이냐/저것이냐』이다. 이 책은 제1부에서 심미적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고 제2부에서 윤리적 실존의 모습을 보여주어 독자에게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삶인지 선택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키에르케고어는 독자가 이러한 선택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 책을 굉장히 독특한, 일종의 철학적 소설(?) 형태로 구성하였다. 즉, 본래 키에르케고어는 ‘빅토르 예레미타’라는 가명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책의 서문에서 가상의 인물인 빅토르 예레미타는 이 책을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고 진술한다. 그는 단지 오래된 책장을 구매하였다가 그 속에 들어있던 두 개의 서류 뭉치를 우연히 발견하고서 그 내용을 정리하여 제1부와 제2부로 된 책으로 출간하였을 뿐이다. 책의 제1부에 해당하는 첫 번째 서류 뭉치는 빅토르 예레미타가 편의상 ‘A’라고 명명한 심미가가 쓴 잡다한 단상들과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A 본인보다도 훨씬 극단적으로 향락을 추구하는 인물인 유혹자 ‘요한네스’라는 사람이 쓴 일기가 섞여 있다. 책의 2부에 해당하는 두 번째 서류 뭉치에는 ‘B’라고도 일컬어지는 ‘빌헬름’이라는 이름의 판사가 A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그리고 판사는 편지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친구인 어느 시골 교회 목사가 쓴 설교문을 함께 동봉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는 총 5명의 인물이 출현한다. 편집인 빅토르 예레미타, 심미가 A, 유혹자 요한네스, 빌헬름 판사(B), 시골 교회 목사. 독자는 서로 다른 각각의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그 중 어느 인물의 인생관을 따를 것인지를 고민하도록 요청받는다.
8. 「유혹자의 일기」
『이것이냐/저것이냐』에 수록된 여러 글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유혹자 요한네스가 쓴 제1부 마지막의 일기이다. 소위 ‘유혹자의 일기’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일기는 종종 『이것이냐/저것이냐』에서 따로 떨어져 단독으로 출판되기도 한다. 제1부의 저자인 심미가 A는 자신이 요한네스의 일기를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의 서류 뭉치에 끼워 넣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편집자인 빅토르 예레미타는 이 일기가 아마도 A 자신의 일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유혹자 요한네스는 심미가 A조차도 충격을 받을 정도로 심미적 실존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인물이다. 요한네스는 고도로 지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여자를 유혹하는 데 사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단순히 하룻밤 쾌락을 목적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일반적인 유혹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연애를 추구한다. 육체적 쾌락은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이다. 오히려 한 명의 여자를 완전히 정신적으로 지배하여 그녀가 요한네스 자신에게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열정적으로 쏟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요한네스의 목표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에서 시적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모습을 음미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다시 문학적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요한네스라는 인간의 특징이다. 「유혹자의 일기」는 요한네스가 이러한 자신의 시적-문학적 취향을 성취하기 위해 코데리아라는 이름의 처녀를 유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는 『이것이냐/저것이냐』 제1부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미적 실존의 극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극단이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10. 요한네스의 유혹: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서 주의 끌기
「유혹자의 일기」는 철학적이기 이전에 문학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글이다. 요한네스가 코데리아를 유혹하는 과정은 한 편의 소설로 읽더라도 정말 놀라울 만큼 치밀하다. 어느 날 요한네스는 길을 가다 마차에서 내리는 코데리아의 모습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그는 코데리아의 주위를 몰래 서성거리면서 코데리아에게 다가갈 기회를 노리다가 코데리아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에드와르라는 청년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요한네스는 먼저 에드와르에게 접근하여, 에드와르의 사랑을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에드와르를 통해 코데리아의 집에 방문하기 시작한다. 두 인물은 코데리아의 집에 갈 때마다 서로 역할을 나누어 행동한다. 에드와르가 코데리아와 대화하고, 요한네스는 그 옆에서 코데리아의 숙모와 대화하면서, 숙모가 에드와르와 코데리아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막는다. 겉으로 보기에 요한네스는 코데리아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오직 숙모와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요한네스의 계략이 시작된다. 요한네스는 숙모와의 대화에서 은근슬쩍 코데리아를 무시하거나 코데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발언을 하여 코데리아의 관심을 끈다. 코데리아는 자신과 말 한 마디 섞지 않으면서 에드와르와 자신 사이에 은근히 개입하고 있는 요한네스의 존재를 처음에는 꺼림칙해 한다. 그 다음에는, 순박하지만 지루한 에드와르와는 달리, 요한네스가 놀라운 지적 능력과 재치로 숙모와의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요한네스가 숙모에게 자신이 독신주의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젊은 여자들을 다소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을 때는 기분 나빠한다. 그러면서도 요한네스의 뛰어난 면모에 자극을 받아 그와 경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코데리아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서 코데리아의 주의를 끄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11. 요한네스의 유혹: 우연을 가장하여 인연 만들기
요한네스는 에드와르를 이용하여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그는 문학에 대한 조예가 없는 에드와르에게 젊은 처녀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 있다면서 이 책 저 책을 추천해준다.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영화나 드라마를 추천해주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에드와르는 순진하게도 요한네스의 조언을 받고서는 코데리아에게 요한네스가 추천해준 책들을 빌려준다. 바로 그 직후에 요한네스가 등장하여 코데리아 앞에서 그녀가 최근에 추천을 받아 읽고 있는 책의 일부분을 마치 우연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낭독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코데리아는 마치 운명의 장난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요한네스가 낭독해주는 내용에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이 작전은 결정적이었다. 코데리아는 요한네스가 설치해둔 그물에 걸려들어 요한네스에게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어젯밤 나는 실험삼아 그녀의 마음의 탄력을 확인해 보려고 결심하였다. 에드와르로 하여금 그녀에게 실러(Schiller, 1747-1794)의 시집(詩集)을 빌려주게 하고, 그러고 나서 내가 우연인 듯이 「테클라의 노래」가 있는 곳을 펴서 그 시를 낭독하느냐, 아니면 뷔르거(Gottfried A. Bürger, 1747~1794)의 시를 택할 것이냐에 관해서 나는 적이 망설였다. 나는 후자를 택하였다. [……] 나는 「레노레」각 실려 있는 곳을 펴고, 가능한 한 정념(情念)을 다하여 엄숙하게 낭독하였다. 코데리아는 감동하였다. 빌헬름이 데리러 오는 사람이 마치 그녀 자신이기나 한 것처럼 그녀는 흥분하여 바느질하는 손을 놀리고 있었다. 오늘 비로소 나의 눈은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잠시 눈시울을 무겁게 만들어서 눈을 감게 한다고들 말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시선 역시 코데리아에게 그와 똑같은 작용을 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막연한 요물(妖物)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비록 그녀는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지는 않을망정, 그녀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그녀의 몸 전체를 통하여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 그리고 밤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은 환한 대낮이다.(쇠얀 키르케고르, 『이것이냐/저것이냐』 , 제1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8, 658-659쪽.)
12. 요한네스의 유혹: 편지로 불타게 하였다가 회화로 식히기
그러나 요한네스는 애초에 코데리아와 결혼할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요한네스는 결국 코데리아와 약혼하게 되지만, 그의 목적은 단지 연애 관계에서 처녀가 보여주는 사랑의 절정을 미학적으로 음미하는 것이었다. 결혼은 요한네스에게 의무, 책임, 제약을 부여하는 부담스러운 제도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코데리아에게 시작된 사랑의 감정을 점점 불타오르게 만드는 동시에, 그 사랑이 절정에 이르러 결혼에 도달하기 직전에 코데리아와의 관계가 깨지도록 만드는 일종의 시한폭탄을 둘 사이의 관계에 심어둔다. 여기서 그는 편지를 이용한다. 편지는 당사자가 없을 때 당사자를 상상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따라서 요한네스는 편지를 통해 코데리아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한다. 코데리아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 편지를 통해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요한네스를 실제보다 더 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요한네스는 편지만큼 뜨거운 사람이 아니다. 코데리아는 실제 요한네스와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기대가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것을 느낀다.
[……] 나는 회화로 불타게 하였다가 편지로 식히든가, 아니면 그와 반대의 수단을 쓰든가 어느 한 쪽을 택하게 될 것이다. 후자의 방법이 방법으로서는 가장 좋다. [……] 그녀가 편지를 받고, 그 달콤한 독액이 그녀의 혈액 속에 스며들어가기만 하면, 사랑의 꽃을 피우기란 단지 말 한 마디로라도 충분하다. 다음 순간에는 나의 입에서 튀어나가는 풍자와 냉담성이 그녀에게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도 그녀 자신의 승리감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느끼게 할 만한 정도의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녀는 그 다음의 편지를 받음으로써 더욱더 자신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쇠얀 키르케고르, 『이것이냐/저것이냐』 , 제1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8, 702쪽.)
13. 약혼의 파기
이러한 과정에서 요한네스는 ‘약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을 억지로 고정시킨 형식일 뿐이라는 생각을 코데리아에게 점점 주입한다.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약혼과 같은 하찮은 형식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코데리아는 커다란 자부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요한네스가 제시하는 생각에 점점 동조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그녀는 요한네스와 자신의 사랑이 고작 불완전한 제도 따위에 구속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이 요한네스의 생각을 쫓아가지 못할 경우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염려한다. 결국, 두 가지 생각이 뒤섞여서, 코데리아는 자신 스스로 약혼을 파기하는 것이야 말로 요한네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태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요한네스를 향한 사랑에 불탄 코데리아는 자신이 먼저 요한네스와의 약혼을 파기한다. 그렇지만 요한네스가 계속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과는 달리, 요한네스는 약혼이 파기되자 코데리아를 떠나버린다.
14. 가스라이팅
코데리아는 약혼의 파기에 대한 책임을 떠나버린 요한네스에게 물을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요한네스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코데리아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즉, (1) 코데리아가 요한네스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요한네스가 숙모와 재치 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서 요한네스를 뛰어난 인간으로 상상한 코데리아 자신의 책임이다. (2) 코데리아가 요한네스를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것은, 요한네스가 낭독하는 시를 듣고서 우연을 인연으로 상상한 코데리아 자신의 책임이다. (3) 코데리아가 요한네스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 것은, 요한네스가 보낸 편지를 읽고서 요한네스를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상상한 코데리아 자신의 책임이다. (4) 코데리아가 약혼을 파기한 것도, 요한네스의 사상에 동조하여 스스로 약혼을 파기한 코데리아 자신의 책임이다. 어디에도 요한네스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전부 코데리아가 상상하고, 코데리아가 착각하고, 코데리아가 결정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오히려 요한네스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코데리아에게 실컷 휘둘리다가 어느 순간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로 남는다. 모든 유혹을 계획하고 진행한 인물은 요한네스인데도 정작 요한네스는 아무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존재로 남는다. 코데리아 자신조차도 도대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요한네스가 벌인 일이 맞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그녀는 요한네스를 비난했다가도 다시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변호했다가도 다시 비난하는 오락가락한 상태에 빠진다. 요즘 말로 하면, 코데리아는 요한네스에게 철저하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다.
[……] 처녀는 번갈아 금방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상대방을 용서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그를 비난하게 된다. 그러고는 도대체가 그들의 관계라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서는 아무런 현실성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처녀는 항상 사건 전체가 한낱 자기의 공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과 싸워야만 한다. 처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소연할 무엇인가가 없었으니까. 꿈을 꾸었다면 남에게 이야기라도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처녀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처녀가 그것을 말로 토해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풀어놓으려고 할 때에는, 거기에는 모든 것이 무(無)로 화해 버리고, 이야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으로 따져보면 그녀는 그것을 매우 날카롭게 느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포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녀를 무서운 중압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키에르케고어, 2008: 544-545)
15. 심미적 실존의 한계
그러나 바로 이렇게 심미적 실존이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심미적 실존이 직면하는 한계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심미적 실존은 아무런 정체성도 가질 수 없다. 그는 법이 부여하는 어떠한 의무, 책임, 한계도 짊어지려 하지 않고서 끊임없이 향락만을 추구하기 위해 어디에도 고정적으로 머무를 수 없다. 문제는 아무런 정체성도 없이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대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삶이 실제로는 그 자체로 대단히 피곤한 삶이라는 사실이다. 즉, 요한네스는 연애를 통한 극한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극한의 노력을 쏟아 처녀와의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노력의 끝에 ‘사랑의 절정’이라는 순간이 도달하고 나면 결국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전까지 그가 쌓아온 관계는 이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강렬해서 잊어지지 않을 것 같던 향락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다시 새로운 여자를 찾아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여 인내와 고민을 반복하는 것 이외에는 삶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 결국 심미적 실존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무의미한 향락의 운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요한네스처럼 강인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고도의 심미적 실존일수록, 그의 운동은 고도로 심오해지는 동시에 고도로 피곤한 것이 된다. 따라서 「유혹자의 일기」를 발견한 심미가 A는 극단적 심미가인 요한네스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요한네스가 ‘발노성 정신병(發怒性 精神病, exacerbatio cerebri)’에 걸려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요한네스의 의식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요한네스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평가는, A와 요한네스가 사실 동일 인물이라는 편집자의 의심이 정당하다면, 심미적 실존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과연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간주할까 하는 것이 궁금하다. 나는 극가 남을 당황하게 만들었듯이 그도 결국은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남들을 유혹하여 그르쳤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면에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적인 성격을 그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길을 잃은 나그네를 잘못된 길로 인도해 놓고, 그릇되게 인도한 거기에 방치해 버린다면 확실히 그것은 가증스러운 짓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어 버리는 것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길은 잃은 나그네라면 그래도 끊임없이 바뀌는 주위의 새로운 광경을 본다는 위로가 있고, 또 변화가 있을 때마다 빠져나갈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그렇게까지 둘레가 크지 못하다. 그는 곧 자기가 빠져나갈 수 없는 쳇바퀴 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양심이 눈뜨고 이제야 말로 이 미로(迷路)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고 절실히 느낄 그때에 미로에서 탈출하기 위한 연줄을 잃고, 예민한 온갖 지능을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모사(謀士)가 겪는 고민 이상으로 고통스런 상황을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키에르케고어, 2008: 546-547)
참고
쇠얀 키르케고르, 『이것이냐/저것이냐』 , 제1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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