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2)
|
|
0
|
291
|
5월 1, 2023
|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1)
|
|
0
|
630
|
4월 14, 2023
|
말년의 양식 ; 분석 철학에서도 대작은 나온다
|
|
3
|
935
|
4월 21, 2023
|
현대철학의 문제들: 미셸 푸코
|
|
5
|
1591
|
4월 16, 2023
|
'강단철학'과 학계의 권력
|
|
3
|
1566
|
4월 9, 2023
|
니체의 삶-긍정(life-affirmation)과 삶-강화(life-enhancement) 개념 구별
|
|
3
|
803
|
4월 8, 2023
|
Preliminaries to Tugendhat's theory of Self-consciousness: Dieter Henrich's criticism on the previous theories of the Self-consciousness
|
|
4
|
330
|
4월 6, 2023
|
현대철학의 문제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
|
1
|
951
|
3월 24, 2023
|
현상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
|
|
2
|
680
|
3월 19, 2023
|
아시아의 분석철학: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
4
|
1276
|
2월 3, 2023
|
전기 푸코의 칸트의 니체화 전략과 그 실패 - 권력과 저항 中
|
|
0
|
402
|
2월 3, 2023
|
현대철학의 문제들: 위르겐 하버마스
|
|
2
|
989
|
1월 29, 2023
|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 출판
|
|
6
|
1194
|
1월 25, 2023
|
[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8)
|
|
0
|
740
|
11월 22, 2022
|
<차이와 반복> 강독 소개
|
|
1
|
1363
|
10월 8, 2022
|
니체의 투쟁 개념 해석과 아곤적 투쟁의 메커니즘에 관한 두 입장
|
|
2
|
1055
|
9월 29, 2022
|
"제 얘기를 이해하질 못하시네요."
|
|
13
|
1677
|
9월 2, 2022
|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국내외 연구자들의 견해
|
|
14
|
2554
|
8월 30, 2022
|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그 죽음(Sterben)은 그 죽음(Ableben)이 아니다!
|
|
2
|
3950
|
8월 29, 2022
|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Sterben과 Ableben의 차이
|
|
8
|
2547
|
8월 29, 2022
|
현상학의 두 가지 의미: 응용현상학과 초월론적 현상학
|
|
3
|
1670
|
7월 6, 2022
|
현대사회에서 '등에'의 말본새: 철학자는 어떻게 소통해야하나?
|
|
4
|
558
|
6월 4, 2022
|
[이 책이 대단하다!] 두 가지 크로스오버: 이승종의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
|
1
|
934
|
6월 1, 2022
|
[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6)
|
|
2
|
780
|
5월 22, 2022
|
<차라투스트라> 강독 소개
|
|
1
|
592
|
5월 18, 2022
|
지금이 바로 철학의 황금기?
|
|
2
|
805
|
5월 18, 2022
|
[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5)
|
|
3
|
1018
|
5월 18, 2022
|
[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2)
|
|
2
|
1158
|
5월 18, 2022
|
'참인 모순'과 동상이몽
|
|
5
|
1217
|
5월 10, 2022
|
창조적 오독의 좋은 사례: 로티의 데리다 해석
|
|
3
|
1532
|
5월 7,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