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1)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요약

31(1):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는 하이데거 자신에 의해서나 하이데거 연구자들에 의해서나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특별히, 두 인물이 ‘이론(theory)’과 ‘실천(praxis)’, 혹은 ‘소피아(σοφία)’와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쟁점이다. “그 주제는 또한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결정적이다. 이 철학이 시작부터 삶 및 행함(πράττειν)의 세계로부터 고립된 이론적 활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기성의 이해를 극복하려는 시도인 한에서 말이다.”(Thanassas, 2012: 31)

31(2)-32(1): 하이데거의 목표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때―여기서 모든 학자들은 동의하는데―‘이론’과 ‘실천’ 사이의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대립을 넘어서는 삶의 진정한 형식을 추구한다.”(Thanassas, 2012: 31)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결코 일방향적 수용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학자들 사이의 다른 합의점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과의] 직면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곧 구분과 평가에 대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에 대한 생산적 적용과 재해석이라는 사실이다.”(Thanassas, 2012: 31-32)

32(2)-33(1): 볼피는 『존재와 시간』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사이의 다양한 ‘상동 관계(homology)’를 처음으로 지적하였다. 다만, 그의 해석은 하이데거의 1919-1926년 강의들이 출판된 이후로 더 넓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필요에, 또한 더 적절하게 교정되어야 할 필요에 직면하였다. 그동안 학자들 사이의 의견 차이도 발생하였다. “분석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는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 학자들이 이끌려진 많은 갈라지는 설명들에 대한 고려로부터도 분명하다.”(Thanassas, 2012: 32) 가령, 볼피는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직면하여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들러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루터적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철학이 단순히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일 뿐만 아니라 ‘반아리스토텔레스적’라고 주장한다. 타미니오는, 아렌트의 비판적 기획을 이어받아, 하이데거의 철학이 정치적 요소나 행위의 장을 이론적 반성의 통치 아래에 종속시키는 ‘플라톤적 편향’ 혹은 ‘초플라톤주의’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하이데거가 소피아와 프로네시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다. “연구자들 사이의 매개되지 않는 갈등의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사례는 소피아와 프로네시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이슈에, 그리고 하이데거가 이 관계를 수용하고/거나, 전유하고/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에 놓여 있다.”(Thanassas, 2012: 33) 가령, 볼피는 하이데거가 프로네시스에 주도적 역할을 주면서 소피아를 프로네시스의 양태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곤잘레즈는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서 프로네시스에 대한 소피아의 우위성을 읽어낸다. 콘토스는, 보피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소피아가 비본래성의 형식이기는커녕 최상의 본래성의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로젠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소피아가 프로네시스로 동화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곤잘레즈는 프로네시스가 소피아로 동화된다고 주장한다.

33(2)-34(1): 타나사스는 이와 같은 혼란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일적인 것으로 보고자 하는 학자들 사이의 암묵적 가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내 의견으로는, 그러한 혼란은 광범위한 다수의 학자들에게 (물론, 정당성이 입증되지 않은데도)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가정에서 생겨난다. 이 가정은 바로 하이데거의 철학이 균일하고, 동질적인 자료를 구성하며, 그의 사유가 선형적이면서도 균일하게 진화한다는 확신이다.”(Thanassas, 2012: 33)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은 결코 선형적이고 균일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교전의 중요성을 평가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사유의 길에 있는 주요한 표지물들을 재구성해야 하며, 특별히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자취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 해석의 방향성이 지닌 (종종 이질적인) 다양성을 제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Thanassas, 2012: 34)

34(2)-35(1): 이 논문에서 타나사스는 하이데거가 프로네시스와 소피아를 어떻게 평가하고, 수용하고, 전유하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이 하이데거의 텍스트 중에서도 (I)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1922), (Ia) 「참됨과 현존재」(1923/24), (Ib) 「『수사학』에 대한 강의」라고도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의 기본 개념』(1924), (II) 『플라톤의 『소피스트』』(1924-25)에서 주로 다루어진다고 지적한다. 특별히, 그가 초점을 맞추는 텍스트는 I과 II이다. “Ia는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Ib에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에 대한 언급이 다소 부차적이며 프로네시스의 이슈에 대한 구체적인 영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I과 II에 우리의 주의를 맞출 것이다. 비록 마지막 섹션(Ⅲ)에서 우리는 『존재와 시간』을 간략히 언급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시도할 것이지만 말이다.”(Thanassas, 2012: 35)

Ⅰ. 프로네시스의 해체

35(2)-36(1): 하이데거가 아주 이른 시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록 하이데거 자신은 그의 사유가 처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당시의 하이데거에게는 기독교 신학을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그[하이데거]의 첫 번째 걸음은 본래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에 의해, 그리고 특별히,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경험된 원래성을 향한 탐구에서, 종교성을 향한 현상학적 접근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적 전통을,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그리고 플라톤적) 형태의 철학적 전통을, ‘그리스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운, 원래의 기독교 신학을 향한 길’을 형성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장애물로 여겼다.”(Thanassas, 2012: 36)

36(2)-37(1): 아리스토텔레스는 1921년 말에서야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종교적 현상이 제공할 수 없는 “철학함의 진정한 길”(Thanassas, 2012: 36)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만난다.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목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하이데거는 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역사성(historicity)’과 실존의 ‘현사실성(facticity)’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삶과 철학의 역사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삶과 철학에 대한 현재의 방식이 형성된 역사적 시점을 찾아서, 하이데거를 과거로 향하게 한다. 게다가, 1919년 이후로 하이데거의 주된 과제, 곧 ‘이론적 요소의 총체적 체제’를 벗어던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천과 이론 사이의 구분을 처음으로 만든, 그리고 후자의 영역에서 수행되는 활동을 특별히 우수한(par excellence) 탁월성으로 인식한 철학과의 만남으로 이끌었다.”(Thanassas, 2012: 36-37)

둘째로, 하이데거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이 우리와 세계 사이의 이론적이지 않은 관계에 대한 기술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은, 적적으로 이론적이지는 않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주목할 만한 가능성을 열어준다.”(Thanassas, 2012: 37)

37(2):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 자신의 해석을 위한 스케치를 제시한다. 특별히, 그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형이상학』 A권 1-2, 『자연학』 A-E권에 주목한다. 그가 다루는 텍스트의 목록은 다소 의아하지만,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기획은 뚜렷하다.

이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텍스트의 첫 문단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그의 해석은 “윤리학의 구체적인 문제를 일시적으로 제쳐놓을” 것이다.
  2. 그는, 소피아와 프로네시스가 “누스를 현실화하는 본래적 양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섯 가지 지성적 탁월성에 주목할 것이다.
  3. 그는, 지성적 탁월성과 ‘존재론적 문제’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면서, 소피아와 프로네시스가 지시하는 존재자의 성격을 강조할 것이다.

(Thanassas, 2012: 37)

37(3)-38(1): 하이데거는 프로네시스와 소피아를 진리의 문제와 연결짓는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누스의 현실화로서, 프로네시스와 소피아가 진리를 획득하는 방식이다.”(Thanassas, 2012: 37) 그는 프로네시스를 도덕적 측면에서 떼어내어 알레테우에인(ἀλήθεύειν, 진리임)의 형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우선, 하이데거의 해석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치(adequatio)로서의 진리 개념을 처음 제시하였다거나 판단(Urteil)을 진리의 장이라고 보았다는 전통적 관점이 거부된다. 오히려,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 진리)의 의미는 망각이나 은폐로부터의 빠져나옴이라고 해명된다. 이때, 프로네시스는 ‘행위의 실현된 목적’을 구성하는 존재자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다만, 실천적 이성은 ‘인지적’ 혹은 ‘이론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38(2)-39(2): 하이데거가 프로네시스에서 진리 요소(veritative element)와 ‘조명(illumination)’이라는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해서, 그가 프로네시스를 이론적 관조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프로네시스가 ‘품성상태(ἕξις)’인데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인간의 삶에 대한 설명과 분리시켰다고 비판한다. “[…] 하이데거의 비판을 유발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품성상태로서, 프로네시스는 ‘인간 삶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ἐνδεχόμενα ἄλλως ἔχειν)’에 대한 언급을 통해 규정된다.―즉, ‘움직여지는 존재에 대한 생각의 존재론적 급진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 결과는, 하이데거에 의해 철학에 부과된 주요한 (혹은 고유한) 과제, 곧 삶의 고유한 실존론적 운동에 대한 자기 해석으로서, 다시 말해, 삶 내부로부터 기원하는 삶의 해석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한, 인간의 실존과 그 분석에 대한 일종의 이질적인 규정이다.”(Thanassas, 2012: 38-39)

39(2): 소피아 역시 현사실적 삶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이데거는 소피아가 현사실적 삶의 염려로부터 생겨난 순수 이해(pure understanding)이라고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첫 번째 책에서 소피아의 기원을 설명한 방식이 이를 뒷받침한다. “더욱더 아는 것(μᾶλλον εἰδέναι)을 갈망하면서, 현사실적 삶은 실천적-생산적인 활동에 대한 염려를 버린다. 염려는, 자율성을 갈망하면서, 자신을 아는 것(εἰδέναι)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확실히 현사실적 삶 자체에 의해 제시된 운동이며―이런 의미에서, 이론적 태도와 경향성은 최소한 실천적-생산적 활동만큼이나 근원적이다.”(Thanassas, 2012: 39)

39(3)-40(1):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A권 1-2를 다루면서 ‘신적인 관조함(θεωρεῖν)’과 ‘신적인 것(θεῖον)’이라는 개념이 신학적 성격이 아니라 존재론적 성격을 갖는다고 강조한다. “그것들은 종교적 경험 속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운동에 대한 존재론적 개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Thanassas, 2012: 39) 특별히, 신학을 순수하게 존재론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입장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회가 한창 이루어지던 2년 후의 글에서 더욱 뚜렷하게 발견된다.

40(2):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 하이데거의 궁극적 입장이 무엇인지는 편집자가 『선집(Collected Works)』에 추가한 보충적 원고 속에 드러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a) 소피아와 프로네시스를 삶의 두 가지 근본적 방향으로 제시하고, (b) 프로네시스 속의 진리가 테오레인(θεωρεῖν, 관조함) 속의 진리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거기서, 한편으로는, ‘로고스에 선행하는…, 소피아-프로네시스라는 자신의 두 가지 방향에 따라 삶의 이동성의 가능한 방향을 나타내는’ 누스의 우선성을 만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네시스는 참된데 왜냐하면 그것은 프라테인(πράττειν, 행함)의 원리에 대한 충분한 전유를 성취학기 때문이다. 프로네시스 속의 알레테우에인은 관조적 삶(θεωρεῖν) 속의 것보다 더 근원적인데, 후자는 알레테우에인을 ‘관점적으로(perspektivisch)’ 성취하는 반면, 프로네시스는 그것을 ‘각자적으로(respektivisch)’ 성취하기 때문이다.”(Thanassas, 2012: 40) 그러나 보충적 원고의 마지막에는 소피아와 테오레인 사이의 차이에 대한 다소 놀랍고 당혹스러운 구별도 존재한다. “테오레인은 파생적이며 빠져 있음의 사례인 반면, ‘소피아는 반대로 체류(Aufenthalt)―테오레인의 급진화, 테크네로부터 기원하며 ‘이론적’인 것만큼이나 근원적으로 ‘실천적’인 것을 구성하는 ‘배려(Besorgen)’의 한 방식―를 통과했다.’”(Thanassas, 2012: 40)

40(3)-41(1):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정통적 해석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체(destruction)’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와 삶의 현사실성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목표이다. 특별히,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윤념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소피아에 비해 프로네시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수십년동안 간과된 점인데, 하이데거가 여기서 소피아에 대해서만큼이나 프로네시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놀라면서 인정했다는 점에서 가다머는 옳았다.”(Thanassas, 2012: 41) 두 번째는, 하이데거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해석이 [친밀함과 거리 사이의] 균형을 성취한다고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가까움보다는 거리를 더욱 추구한다.”(Thanassas, 2012: 41)

41(2): 소피아와 테오레인을 대비시키고자 하는 시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소피아는 테오레인에 속하는 지적 탁월성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끊어내어 소피아에 실천적-생산적 기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초점을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에서 『형이상학』 A권 1-2의 소피아의 계보학으로 바꾸면서, 하이데거는 소피아와 테오레인의 근본적 연결을 이 계보학으로 대체하길 시도하고 소피아를 그것의 실천적-생산적 기원으로 환원하길 시도한다.”(Thanassas, 2012: 41)

42(1): 타나사스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하이데거는 소피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위성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는 오히려 프로네시스의 만연성을 선택하는가? 그는 프로네시스를 소피아로 동화시키길 시도하는가 아니면 소피아를 프로네시스로 동화시키길 시도하는가?”(Thanassas, 2012: 42) 그러나 타나사스는 이 질문이 (a)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지닌 내용에 대한 질문으로 제기되면 (두 개념은 어느 쪽이 다른 쪽으로 동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부터 오도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b) 하이데거의 해석적 운동에 대한 질문으로 제기되면 (하이데거가 두 개념에 대해 제시하는 대안적 개념 구분이 무엇인지 우리가 규정하기 전까지는) 설명적 힘을 잃는다고 지적한다.

42(2)-43(1):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존재론화(ontologization)’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용어는 볼피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에 따르면 그 용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한다: (a) ‘모든 존재적 의미가 원리적으로 배제된 그러한 것으로서, 곧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의 방식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적 규정에 대한 해석과 (b) 현존재의 구성에 대한 일련의 규정, 그래서 ‘그것들의 내용은 현존재가 갖거나 갖지 않기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현존재가 추상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Thanassas, 2012: 42) 많은 연구자들이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을 존재론화하였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볼피 이후로 발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개념과 구별이 이미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볼피의 지적조차 자주 망각되곤 한다. “실제로, 인간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 아니라면, 프로네시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존재의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Thanassas, 2012: 43)

43(2)-44(1): 하이데거가 프로네시스 개념에 담긴 도덕적 내용을 무시한다는 점이 옳다고 해도, 그 이유를 단순히 존재론적으로 방향 잡힌 해석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은 ‘이론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이데거의] 무관심을 존재론적으로 방향 잡힌 해석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은 존재론이 윤리학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가정에, 혹은 윤리학은 ‘형이상학 없는 윤리학’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근대적 가정에 근거한다. 이러한 가정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자체가, 실천철학으로서, 여전히 이론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즉 실천적 지침으로 항상 ‘흐르지는’ 않는, 실천적 규정을 항상 목표로 하지는 않는, 오히려 종종 ‘그 자체를 위하여’ 수행되는, 체계적이고 개념적인 해명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프로네시스에 대한 어떠한 존재론적 독해도 ‘이 개념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공유된다.”(Thanassas, 2012: 43-44)

44(2): ‘이론 vs. 실천’ 사이의 긴장이 단순히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으로 인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내부에서도 두 개념 사이의 긴장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아의 우월성에 의해 발휘되는 이론적 끌림과―그 자체로 다른, 원초적, 실천적-기술적 활동의 변형인―사변적 활동이 (a) 이성적인 것의 전체 분야를 포괄하기에, 그리고 (b) 독립적으로 행복을 실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통찰 사이에서 종종 맴도는 사람이다. 에우다이모니아를 위한 탁월성의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것으로서 소피아의 적절성은(1098al7-18), 전체로서의 탁월성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서 프로네시스의 보완성과 직면해 있다(1144a2-5).”(Thanassas, 2012: 44)

참고

P. Thanassas, "Phronesis vs. Sophia: On Heidegger's Ambivalent Aristotelianism",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66(1), 2012, pp. 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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