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 카테고리의 설명
|
|
0
|
411
|
11월 21, 2021
|
철학계의 비빔대왕, 가다머
|
|
2
|
646
|
10월 8, 2024
|
카르납(Carnap)과 자동차 낮잠 사례(Car Nap Case)
|
|
1
|
294
|
9월 24, 2024
|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
|
|
8
|
819
|
9월 14, 2024
|
실존주의는 본래 무신론적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한 마르셀의 비판
|
|
4
|
480
|
9월 8, 2024
|
Sep '가브리엘 마르셀' 항목에 감탄했습니다
|
|
1
|
384
|
8월 23, 2024
|
1951년 파리의 어느 술집: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또 하나의 갈림길
|
|
5
|
1344
|
8월 11, 2024
|
이화여대 한충수 교수님의 실존주의 강의 영상
|
|
2
|
383
|
7월 29, 2024
|
사변적 연금술로부터 지적 노동으로: 주재형, 「인간적 지식 너머의 지식?: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 비판」
|
|
0
|
872
|
4월 2, 2024
|
Henry Somers-Hall의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을 읽었습니다
|
|
0
|
205
|
6월 21, 2024
|
형식 철학과 증명 보조기
|
|
4
|
820
|
6월 18, 2024
|
(미완성) 들뢰즈와 짧은 동영상(Shorts) '넘김'의 무기력 (1)
|
|
2
|
437
|
6월 3, 2024
|
두 가지 철학의 구별 - <철학은 시가 될 수 있을까>를 읽다가
|
|
6
|
529
|
5월 2, 2024
|
맥도웰, 테일러, 퍼트남의 거북했던 하루
|
|
4
|
1234
|
4월 26, 2024
|
부고: 다니엘 데넷(1942-2024)
|
|
0
|
428
|
4월 19, 2024
|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동국대 김종욱 교수
|
|
1
|
741
|
4월 4, 2024
|
현대철학의 문제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
2
|
1180
|
3월 19, 2024
|
On the Tractarian Concepts of 'senseless (sinnlos)' and 'nonsense (Unsinn)'
|
|
0
|
281
|
2월 28, 2024
|
논리철학논고 新 영역본 출간
|
|
9
|
951
|
2월 16, 2024
|
[성천아카데미 추계강좌] <철학의 길> 제1강과 제12강 발췌문
|
|
1
|
337
|
12월 18, 2023
|
김경만, 「현대성, 합리성, 문화 변동에 대한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
|
|
3
|
596
|
11월 13, 2023
|
VV Mayor, 「Die Idee der Philosophie als Kritik bei Nietzsche und Adorno」
|
|
0
|
246
|
10월 19, 2023
|
비트겐슈타인 연구의 신세대가 출현했다?: 마리우스 바르트만의 책에 대한 단상
|
|
1
|
1777
|
9월 15, 2023
|
표상주의에 대한 로티의 비판에서 핵심은 무엇인가?(feat. 로버트 브랜덤)
|
|
5
|
901
|
9월 12, 2023
|
게메스, 「포스트모더니즘의 니체 이용과 오용」
|
|
8
|
968
|
8월 18, 2023
|
'진짜' 니체는 누구? - '힘에의 의지' 사용과 관련하여
|
|
1
|
563
|
8월 17, 2023
|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적 사기인가?: 로저 스크루턴의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에 대한 단상
|
|
4
|
1426
|
8월 10, 2023
|
언어적 전회 이후의 사회적 전회?!
|
|
2
|
876
|
8월 9, 2023
|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인가, 배반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볼피, 타미니오, 타나사스의 해석
|
|
3
|
663
|
7월 11, 2023
|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2)
|
|
0
|
283
|
5월 1,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