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자바라: 로티와 바티모 이후 해석학계의 중심 인물인가?!

2000년대 무렵까지 출판된 대부분의 철학적 해석학 교과서들은 슐라이어마허부터 가다머 혹은 리쾨르까지의 흐름을 해석학의 역사로 제시하였습니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 제2권 제1장 '역사적 준비'에서 다루었던 해석학의 대표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그 뒤에 가다머와 리쾨르라는 두 명의 현대적 인물들을 덧붙였던 셈이죠.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는, 1961년에 출판된 리처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1972년에 출판된 에머리히 코레트의 『해석학』, 1991년에 출판된 한스 인아이헨의 『철학적 해석학』과 장 그롱댕의 『철학적 해석학 입문』이 모두 이런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로는 '가다머 이후' 해석학에 대한 논의들이 교과서들에도 본격적으로 수록되기 시작합니다. 가다머의 강력한 논쟁자들 중 하나였던 자크 데리다라든가, 가다머를 훨씬 급진적으로 계승하려고 하였던 리처드 로티와 잔니 바티모 같은 사람들이 해석학의 역사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인물들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가령, 2017년에 출판된 장 그롱댕의 『현대 해석학의 지평』이라든가, 2018년에 출판된 존 카푸토의 『포스트모던 해석학』이 이러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로티와 바티모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그 두 책이 완전히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말입니다. 그롱댕은 로티의 '유명론적 해석학'과 바티모의 '허무주의적 해석학'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고, 카푸토는 그 입장들에 대해 대단히 옹호적이죠.)

물론, '가다머 이후' 해석학의 흐름은 훨씬 더 세분화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가다머-하버마스 논쟁으로 유명한 것처럼, 하버마스 역시 가다머의 대표적인 비판자이자 (9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글을 계속 써내고 있듯이,) 해석학적 철학 전통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서 중요하게 거론될 수 있죠. 영어권에서 가다머를 수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들인 도날드 데이비슨,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로버트 브랜덤, 존 맥도웰도 철학적 해석학의 역사를 구성하는 부분들로 종종 언급되고는 합니다. 해석학이 종교, 정치, 예술 분야에 끼친 파생적 영향들을 따라서 현대 해석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시도들도 많이 있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가다머 이후'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거장들로 잔니 바티모와 에른스트 투겐트하트를 꼽습니다. 바티모는 가다머의 제자 중 하나이지만 가다머보다 더욱 급진적인 입장에서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해석학을 제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고, 투겐트하트는 하이데거의 마지막 제자군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하이데거를 떠나 비트겐슈타인과 스트로슨의 논의를 바탕으로 해석학을 언어 분석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인물에 대해 공부하다보면 항상 마주치게 되는 이름 중에 '산티아고 자바라(Santiago Zabala)'가 있더라고요. 저는 본래 이 이름을 The Hermeneutic Nature of Analytic Philosophy라는 투겐트하트에 대한 연구서의 저자로 대략 6-7년 전에 처음 접하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연구서라 오래 기억에 남았죠. 더군다나, 투겐트하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이 책이 유일하기도 해서, 저는 요즘도 종종 이 책을 다시 살펴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바라는 종교에 대한 로티와 바티모의 글을 묶은 책인 The Future of Religion의 편집자이기도 하고,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이후 50년 동안의 해석학적 성과들을 다룬 논문집인 Consequences of Hermeneutics도 제프 말파스라는 다른 유명한 연구자와 함께 공동으로 편집하였더라고요. 또, 최근에 바티모에 대한 글을 찾다 보니, 바티모의 70세 생일 기념 논문집인 Weakening Philosophy도, 바티모의 책 Art's Claim to TruthBeing and Its Surroundings도 이 사람이 편집하였고요.

산티아고 자바라의 홈페이지

가다머, 투겐트하트, 바티모에 대한 연구서나 논문에 족족 '산티아고 자바라'라는 이름이 편재해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습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자바라가 바티모의 박사학위 제자더라고요. 지금은 스페인의 폼페우 파브라 대학교 철학과에서 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거나 학계에서 '거장'으로 불리는 철학자들이 대부분 60-70세인 것에 비교해 보면, 이 사람은 1975년 출생이라 아직 50세도 안 되었네요. (생일 전이라면 48세이고, 생일 후라면 49세입니다.) 그런데도 이만큼 철학적 해석학의 온갖 논문집의 편집자와 저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분야에서만큼은 이미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는 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편집한 논문집들이 다들 상당히 권위 있는 책들이기도 하니까요.)

자바라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철학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전공한 철학적 해석학으로부터 어떠한 정치철학적 귀결들이 나오는지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해석학적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내세우기도 하는 것 같고, 우리가 위기를 위기로서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판데믹이나 기후위기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는 것 같은데,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제가 큰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해석학의 이론적 근거에 대해 자바라가 쓴 글들을 보면, 이 사람이 문제의 요점을 상당히 정확히 짚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자바라 본인이 바티모의 제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다머의 해석학이 지닌 약점을 자바라도 바티모처럼 정확히 간파해내더라고요. 해석에서 면제된 순수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위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이 과연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가다머가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거든요. 그리고 이 점에서 자바라는 기본적으로 바티모의 '허무주의적 해석학'을 지지하는 것 같고, 투겐트하트를 통해 제시된 언어 분석적 해석학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자바라의 나이나, 지금까지의 성과들이나, 활발한 학계 활동으로 짐작해 보았을 때, 아마 이후 철학적 해석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 인물들 중 하나로 언젠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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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책들의 편집자로 이름이 워낙 익숙한 분이시네요. 그런데 제 생각보다 많이 젊으시다는게 놀랍습니다. 로티와 바티모의 The Future of Religion 이 2007년 출간이니까 거의 서른살 즈음에 이런 세계적인 학자들의 작업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니... ㄷㄷ

편집자로서 자바라만 읽어보았기에, 그 자신의 사상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말씀해주신 부분이 꽤나 바티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바티모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자신의 '약한 사유'를 사회주의에 적용하기도 하니까요. Weakening Philosophy 서문에 자바라가 바티모의 생애를 간략히 서술하는데요. 관련 내용에 관한 짤막한 얘기가 있네요.
(그리고 방금 관련한 부분을 찾다가 발견한 Hermeneutic Communism: From Heidegger to Marx는 아예 바티모와 자바라가 공저한 책이네요. )

Vattimo’s “hermeneutical political project” for a transparent society is based on the idea that socialism is the destiny of humanity – socialism as intense state control of our collective lives accompanied by an absolute democratization of all institutional and governmental powers. This is possible only in a truly transparent democratic society that leaves an open space even for those who do not want to take part in the social conversation and do not share the common binding principles. In such a society, violence would be defined as “the silencing of questions,” because the greatest moments of violence in history have always been justified by metaphysical structures and ultimate truths. Vattimo’s weak thought can help the world political culture understand that true respect for human dignity is respect for individual freedom, not respect for some preexisting natural or religious metaphysical essence.
Santiago Zabala,et al., eds. Weakening philosophy : essays in honour of Gianni Vattimo (Québec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7), 33.

이건 좀 별개로, 바티모는 자신이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에 비해 오해살 수 있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 의미가 있어서 그런다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요. 이를테면 (정확히 바티모의 용어인지, 자바라의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socialism is the destiny of humanity 이런거요. 형이상학의 약화를 말하는 양반이 데스티니같이 강력한! 단어를 쓰면 모순되어 보이는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바티모의 하이데거 독해를 바탕으로, 인식론적 차원에서 강력한 형이상학들이 허무주의적인 약화를 통해 해석학적으로 되어간다는, 그리고 세상이 충분히 허무주의적이 되었을 때 우리의 보편어koine가 해석학이 될거라는 그런 기본입장을 반영하는 의미에서 쓴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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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능력있는 자기계발 코치의 상인데, 상당히 오소독스한 철학 연구자라니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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