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논고 新 영역본 출간

Damion Searls이라는 분께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새로운 영어 번역본을 출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번역본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셨는데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시는 듯 합니다.

Overall, the language of my new translation makes more sense than the Ogden version. Such normalcy might be off-putting to anyone who knows and loves the Tractatus in English already, but this is indeed how Wittgenstein originally sounded, even the Wittgenstein of much of the Tractatus* .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7절 내용인

Worüber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은 기존의 번역문인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보다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는게 더 낫다고 하네요.

We mustn’t try to say what cannot be said.

제가 뭐 이쪽 논쟁에 숫가락을 얹을만한 입장은 전혀 아니기는 합니다만, 워낙 번역 관련한 얘기가 많았던 한국 철학계다보니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재밌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좀 차이가 나는 것은, 위 Daily Nous 댓글창에서도 나타나듯 독일어 원어민 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이 영어 번역에 대해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네요. 이걸 옆에서 지켜보는게 좀 꿀잼이기는 하네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이 본 포럼에 많이 계시니만큼, 아무쪼록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어도 재밌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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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번역자 분의 자신감이 대단한 것 같네요. 저로서는 위의 두 문장만 보았을 때는 두 번역이 근본적으로 다른지 다소 의문스럽긴 하지만요.

  • 그나저나, 댓글들이 재미있네요.

But being a native German speaker, reading this new English translation makes me feel like I don’t know German anymore.

Supposedly Germans will often grab the Norman Kemp Smith translation of Kant when they have to read him because it’s easier that way than reading him in German. I’ve never met a German who actually admitted to doing this, but I did know a native German speaker from South Tyrol who told me he read Kant pretty much all his Kant in Italian since the translation was a lot easier than the German.

I have a German friend who much prefers reading Kant and Hegel in English

독일 사람들도 번역본으로 칸트, 헤겔 공부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저의 허접한 어학 실력을 오늘도 합리화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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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정도 내내 TLP만 읽고 있었는데 들어와 보니 TLP 관련 내용이 떡하니 있어서 잠시 웃었습니다.

저 역시도, "침묵"과, "말하려고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됨"의 수준만큼 다르지 않을까 하고(i. e. 보고 바로 생각하자면 잘 모르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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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번역을 읽어봐야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기사와 에세이만 놓고 봤을 때는 이 번역자 분이 공언하는 만큼("Featuring a preface by eminent Wittgenstein scholar Marjorie Perloff, this bilingual, facing-page edition promises to become the standard for generations to come")의 퀄리티는 결코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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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는 입문 단계고, 비트겐슈타인은 아예 모르지만 왜 번역자가 자신의 번역을 좋아하는지 예측해보겠습니다. 일단 지금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schweigen의 정의를 보자면,

nicht [mehr] reden; nicht antworten; kein Wort sagen

이네요. nicht mehr reden이라던가, nicht antworten 과 같은 워딩을 보면, schweigen은 마치 여태까지 말해왔지만 (nicht mehr reden), 혹은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nicht antworten; antworten은 답장한다는 뜻이니깐요) 하지 않는 경우로 해석되네요.

하지만 American Heritage 에서 silent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1. Marked by absence of noise or sound; still: the silent forest. See Synonyms at quiet.
2.
a. Not inclined to speak; not talkative: He's the strong, silent type.
b. Not speaking or refraining from speech: Do be silent.
c. Not saying anything about a particular matter; making no mention: The poem is silent on the reason for the speaker's sadness.

아마 지금 맥락에서는 위 정의의 2a,b,c가 적합한 것 같습니다. 2번의 정의를 채택할 경우, silent라는 말은 특정한 맥락없이 말을 하지 않는 경우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schweigen과 be silent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Schweigen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침묵하다, 그리고 be silent는 일반적인 침묵하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영역본으로 돌아오자면,

은 일반적인 침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Duden의 정의와 American Heritage의 정의를 제대로 해석했다면, 이 번역은 원본에서 갖고 있는 schweigen의 맥락을 가져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를 보게 되면, 말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한다고 읽히네요. 전 이 부분이 마치 말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한다와 같이 읽히네요. 그렇다면 이 새 번역은 be silent가 포함하지 못했던 schweigen의 뉘앙스를 어느 정도는 내포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번역을 옹호할만큼 비트겐슈타인을 알진 못하지만, 그 차이가 뭔지, 또 왜 번역자가 새로운 번역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지 예측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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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단 저는 다른 역자의 번역을 깎아 내리면서 자기 번역을 홍보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번역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으로 [이방인] 사건이 있었죠). 자기가 좋은 번역을 했다면, 굳이 밝히고 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 알아볼 것입니다. 특히 한 문장, 한 단어도 소홀히 읽지 않는 철학도들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 번역자 Damion Searls와 서문을 단 (개인적으로 서문을 다는 것도 웃기는 짓이라 생각하지만) Marjorie Perloff는 모두 영문학 PhD로 (Searls는 BA를 철학으로 한 것 같습니다만), [논리-철학 논고]를 '제대로' 번역할 만한 충분한 철학적 배경지식을 지니고 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좀 시니컬하게 말하면, "독일어 원문이 지닌 '문학적 미묘함'을 제대로 포착할 능력이 없는 철학과 교수들이 직역으로 망쳐 놓은 번역을 자신이 구제해 보겠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책을 팔아먹겠다는 의도로밖에 안보입니다. "And so I have retranslated the book, paying special attention to where the assumptions of typical academic philosophy translation would lead us away from expressing Wittgenstein’s thought in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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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로 에세이를 읽어보면 Searls는 [논고]의 번역사에 대해 거의 아는게 없어 보입니다. 예컨대 그는

"Decades of accrued tradition, of philosophy professors and their students grappling with the English of the Ogden version and building arguments and interpretations upon it, don’t change these facts, although of course they do make it harder to accept that the existing translation is flawed."

이와 같이 계속 Ogden 번역을 문제삼고 있는데, 애초에 Ogden 판본이 typical academic philosophy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요? Ogden 번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건 이미 몇십년 전에 (그것도 강단철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것이고,

Searls knows that his translation will have to contend with “the prevalent idea that the English which Wittgenstein saw and approved is his —that the Ogden version is the book Wittgenstein himself wrote.”

오늘날 대다수의 비트겐슈타인 학자들은 전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단철학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밀고 나가고 싶다면, 지금처럼 허수아비를 칠 것이 아니라 (각주로만 살짝 언급하고 있는) Pears/McGuinness 판본을 제대로 문제 삼아야 앞뒤가 맞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지난 몇십년동안 철학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읽고 분석했던 버전이 바로 Pears/McGuinness 판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Kevin C. Klement는 독일어/Ogden 번역/Pears&McGuinness 번역을 한번에 볼 수 있게 편집한 Side-by-Side 버전 [논고]를 냈던 것이고요.

  1. 마찬가지로 에세이를 읽어보면 [논고]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분석철학사에 대해서도 Searls가 전혀 정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논고]의 Sinn(뜻)과 Bedeutung(의미)에 대한 번역을 논하고 있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Gottlob Frege, whom Wittgenstein often refers to and engages with in the Tractatus , drew a famous distinc­tion between Sinn and Bedeutung in his influential 1892 essay, “Über Sinn und Bedeutung ”: these are two different ways to talk about mean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sense” and “refer­ence.” [...] and Wittgenstein sometimes uses this distinction while at other times he seems to be calling a word or proposition “meaningless” or talking about what it “means” more generally, which in German is that same word, Bedeu­tung . The famous paragraph 5.6—“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uses the verb bedeuten , so if Wittgenstein has Frege’s distinction in mind at that moment, he is actually saying that the limits of my language refer to the limits of my world. I believe he is indeed saying that: these are two names for the same thing, referring to the same limits. On the other hand, there doesn’t seem to be any other sense the English verb “mean” might suggest here, so it seems all right to keep the more direct translation. Often, though, where I have wanted to use the general translation “meaningless” or “means anything,” rather than stiff or wordy options such as “has a sense,” “is non-nonsensical,” or “doesn’t refer to anything,” the more specific alternative translation seemed clarifying; I have occasionally resorted to adding it in parentheses.

Searls는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의 뜻Sinn과 지시체Bedeutung의 구분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면서 본인의 독자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애초에 프레게의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이미 1913년에도 그는 한 명제의 뜻Sinn을 그 명제가 갖는 참과 거짓의 양극으로, 지시체Bedeutung를 사실로 간주하였으며, [논고]에 이르러서는 오직 명제만이 뜻Sinn을 갖고, 오직 이름만이 의미Bedeutung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과 영어 번역 모두 Bedeutung의 번역어로 지시체reference가 아닌 의미meaning를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914년 11월 2일 다음의 언급 이후로 뜻(Sinn)과 의미(지시체, Bedeutung)라는 용어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사용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다음과 같지 않은가: 거짓 명제들은 참인 명제들과 같이 그리고 그것의 거짓 또는 참과 독립적으로 하나의 뜻을 지니지만, 어떤 지시체(Bedeutung)도 지니지 않는다? (여기에 “Bedeutung”이라는 단어의 더 좋은 사용이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인은 거짓 명제들의 지시체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제 명제들이 지시체를 지니며 그 지시체가 사실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논고 고유의 ‘뜻’과 ‘지시체’에 대한 사용으로 나아간다. 다름 아니라, 한 낱말은 오직 ‘의미’(Bedeutung)만을 지니며, 오직 명제만이 ‘뜻’(Sinn)을 지닌다는 것이다. “오직 명제만이 뜻을 가진다. 오직 명제 연관 속에서만 이름은 의미를 가진다.”(3.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고에서 “Bedeutung”은 프레게의 생각과 구분하기 위해 “지시체(reference)”가 아니라 “의미(meaning)”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일 (2014).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체에 관하여. 철학사상, 54, p. 143.

Searls의 해설을 읽어보면 그가 과연 이러한 논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he seems to be calling a word or proposition “meaningless” or talking about what it “means” more generally, which in German is that same word, Bedeu­tung." [논고]에서 proposition이 meaningless하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he is actually saying that the limits of my language refer to the limits of my world. I believe he is indeed saying that: these are two names for the same thing, referring to the same limits." [논고]에 따르면 이름은 대상을 의미하고 대상은 이름의 의미인데 (3.203) 뜬금없이 두 개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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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비트겐슈타인을 번역했다길래, 아주 당연하게도 전공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네요. 사실 @georgia15 님의 댓글을 보고도 "설마 그럴리가?" 하고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확실히 학사 이상의 철학 학위는 딴 적이 없네요. 또, 링크를 들어가보니 다른 번역을 깎아내리는 것도 맞고요.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전공자들을 비하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으로써 아주 달갑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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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으로 Searls의 독일어 번역에 대해 몇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논고]의 1번 문장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는 7번 문장과 더불어 [논고]에서 가장 유명한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하기는 가장 어려운) 구절입니다.

실제로, 이 구절에 대한 한국어 번역본 4종의 번역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문장에 대한 영어 번역이 거의 천편일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기존에 나와있는 영어 번역 판본들을 보면,

Ogden The world is everything that is the case.
Pears/McGuinness The world is all that is the case.
Beaney The world is everything that is the case.

보다시피 거의 차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Searls는 이 문장을

The important point is that Wittgenstein was not using any arcane or philosophical vocabulary here. When an Austrian says “Es ist der Fall, dass ich krank bin ” (“It is der Fall that I am sick”), they do not mean “It is the case that I am sick,” they mean “Yup, I’m sick,” in the sense of: In theory I might have managed to avoid it—I was hoping I wasn’t sick—but, as it turns out, I did indeed get sick. That’s just how it is.

이러한 이유로

And that is how I translated it—“The world is everything there is”—occasionally deploying “is the case” or “happens to be the case” later in the book.

이렇게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Searls의 주장처럼 기존의 번역자들은 난해하고 철학적인 어휘 사용에 경도되어서 저렇게 번역했을까요? 기사 댓글의 말마따나,

I am a native German speaker, and I can assure you that the Ogden/Ramsey translation is, in general, MUCH more accurate than the new one. Take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 In ordinary language, the German locution “der Fall sein” occurs in statements like “Das ist nicht der Fall” (“That is not the case”) or “Ist das wirklich der Fall?” (“Is that really the case?”). So the Ogden/Ramsey translation, “The world is everything that is the case” seems 100% accurate.

기존 번역은 100% 직역입니다. 이건 특별히 철학 개념을 논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영어 case는 떨어지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라틴어 casus에서 왔고, 이 단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면 그게 바로 der Fall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Searls의 번역어는 멋부린 것에 비해 실속이 없습니다.

By contrast, “The world is everything there is” is equivalent to the German sentence “Die Welt ist alles, was es gibt” (or perhaps “Die Welt ist alles, was existiert”). But that’s not what Wittgenstein wrote.

기사 댓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번역어에 대응하는 단어는 'was es gibt'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구절은 [논고] 5.552의 존재 개념과 연관될 것입니다. 그러고 이것은 당연히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또한 다른 댓글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That’s just nonsense. Wittgenstein writes “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 (The world is all that is the case) for a reason. In 1.1 he explains: Die Welt ist die Gesamtheit der Tatsachen, nicht der Dinge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 That is clearly a world ontology in terms of facts, and not a world ontology in terms of objects, as the new translation insinuates.

바로 다음 구절과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The world is everything there is"를 읽었을때 사물 존재론을 떠올리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1과 1.1은 충돌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논고]의 2번 문장은 Was der Fall ist, die Tatsache, ist das Bestehen von Sachverhalten입니다. 즉, Was der Fall ist는 [논고]에서 사실Tatsache과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2번 문장은 'what there is'로 번역하고 이게 사실Tatsache이랑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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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프레게 및 초기 분석철학사 전문가인 Michael Beaney가 번역한 논리철학 논고 영역본도 있습니다. 마이클 비니는 The Frege Reader라는 프레게 선집의 편집자이기도 하지요.
잘 언급 안되는 것 같길래 뜬금 없지만 한 번 올려봐요 ㅎㅎ 혹시 이 책 읽어보신 분이 번역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시면 또 유용한 정보가 될 것 같네요ㅎㅎ

** georgia15님이 이미 두 번째 댓글에서 언급하셨군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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