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파리의 어느 술집: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또 하나의 갈림길

1951년 1월, 전후의 혼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프랑스 파리의 어느 한 술집, 학자들 몇몇이 모여 조그마한 모임을 하나 가졌습니다. 그 주연으로는 A. J 에이어, 모리스 메를로퐁티, 조르주 바타유, 장 발 등이 있었으며, 은막 바깥의 조연으로는 마르틴 하이데거, 루돌프 카르납, 장 폴 사르트르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 철학자들이 술을 곁들이며 토의한 주제로는

인류가 존재하기 전에도 해가 있었는가?

같은 질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타유는

어제 나눈 대화는 실로 충격적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와 영국 철학자 사이에는 모종의 심연이 존재한다. 프랑스와 독일 철학자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연 말이다.

라고 논평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분석철학-대륙철학 분기'라는 역사적 주제가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받는 현상이 좀 신기합니다. 이를테면 프리드먼의 『다보스에서의 결별』 같은 빡센 책이 번역 출간된 것은 사실 아직도 좀 긍정적인 의미로 충격적입니다.

1951년, 옥스포드의 에이어와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메를로퐁티, 바타유 등이 나눈 회담은 '대륙철학-분석철학'이 갈린 여러 사건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건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근래 분석철학사 관련 연구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Andreas Vrahimis의 논문, "“Was There a Sun Before Men Existed?” A.J. Ayer and French Philosophy in the Fifties"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2013년 논문이니 벌써 꽤 오래 된 논문입니다만, 새로 알게 된게 많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가 팩트 체크를 할 역량은 안 됩니다만 논문의 얼개를 대략 소개하자면, 그 다보스 논쟁을 시작으로 카르납의 하이데거 비판, 에이어의 카르납 수용 및 사르트르 비판, 사르트르의 에이어 비판,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논쟁, 바타유의 에이어 비판이 기묘하게 논리 실증주의와 겹치는 점 (?), 사르트르의 바타유 비판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지성사적 흐름이 재밌습니다.

관련 전공을 하시거나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분기'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재밌게 읽어보실 수 있으실 것 같네요.


에이어는 그 자체로도 참 흥미로운 인물 같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말년에 당시 신진 학자였던 크립키를 반박하려고 어떻게든 노력을 했다는 일화라던지,

난데없이 1987년 뉴욕 사교계에서 복싱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과 신인 모델 나오미 켐벨이 엮인 한바탕 소동 가운데 "나는 전(前) 위컴 논리학 석좌교수라네"라는 어록을 남긴 일화라던지,

https://archive.nytimes.com/www.nytimes.com/books/00/12/24/reviews/001224.24spurlit.html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참 인물은 인물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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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인가에 Language, Truth, and Logic 이라는 명저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족적을 남길만한 책을 쓴 사람이니 대단하긴 하지요. 분석명제/종합명제, 자유의지, 메타윤리(비실재론, emotivism) 등의 주제를 다루면 항상 에이어가 쓴 글이 리딩리스트에 올라가있곤 하니까요. 예전에 티모시 윌리엄슨이 "To be precise is to make it as easy as possible for others to prove one wrong."(아마 "Must Do Better"라는 논문에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에이어의 글은 참 명료한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번역글을 못 올린지 좀 됐네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했었는데 오늘 중에 다음 편을 올려야겠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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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재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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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 논쟁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에이어, 메를로퐁티, 바타이유, 발 사이의 토론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저도 저 논문을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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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의 <현대유럽철학>에서도 관련 언급이 살짝 지나갑니다.

"이 사례는 대륙사상가들 중에 가장 과도한 사상가일 듯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반(反)철학자, 비인식자, 반신학자, 에로티시스트- 와 에이어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1951년 파리의 어느 바에서 메를로퐁티와 함께 만났다. 겉보기에 토론은 새벽 세시까지 이어졌고, 토론 주제는 아주 단순했다. 바로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태양이 존재했는가?’였다. 에이어는 태양이 인간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반면 바타유는 이 명제 전체가 무의미하다고생각했다. 에이어처럼 과학적 세계관에 충실한 철학자가 보기에는 인류의 진화 이전부터 태양과 같은 물리적 대상들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편이 이치에 맞다. 이에 반해 현상학에 정통한 바타유가 보기에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인간 주관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인식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 명제를 가정한 순간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태양이 인간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

대략 이런 논쟁이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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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유럽철학》이 아니라 《유럽대륙철학Continental Philosophy: A Very Short Introduction,First Editi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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