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4)

나는 1973년에 옥스퍼드에 입학했고 전공은 수학과 철학이었다. 학부 과정에서 내가 중점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논리학이었고 이때 배운 것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큰 자산으로 남아있다. 논리학이 나에게 있어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철학계를 바라보던 나의 관점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1976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원래 나는 라이프니츠의 원리인 충분이유율을 형식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곧 칼 포퍼(Karl Popper)의 박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아이디어로 주제를 바꾸었다. 이는 과학 이론이 발전하면서 진리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진리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진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1980년에 첫 직장인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의 강사직을 위해 옥스퍼드를 떠났고 198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에 옥스퍼드에는 이론 철학 분야의 두 원로 교수가 있었다. 하나는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위컴 논리학 교수로 있었던 에이어였고, 다른 하나는 1968년부터 1987년까지 웨인플릿 형이상학 교수(Waynflete Professor of Metaphysics)로 있었던 스트로슨이었다. 오스틴과 프라이어는 각각 1960년과 1969년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라이스는 1967년에 버클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에이어와 스트로슨을 각각 논리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이라는 20세기 중반 분석철학의 두 줄기에 도식적으로 연관되곤 한다. 에이어는 비엔나 학파와 함께 연구를 했고 그의 첫 저서였던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Laguage, Truth, and Logic)는 검증원리에 입각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 논리실증주의의 학설을 많이 담고 있었다. 후에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회상하며 “그 논고에서 제시됐던 관점들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것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었고 또한 그들의 입장은 버클리와 흄의 경험주의로부터의 논리적 산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책은 또한 도덕과 종교에 관한 표현주의(expressivism)를 내세우면서 악명을 얻기도 했다. 그 책의 도발적이고 건방떠는 스타일은 마지막 장의 제목인 “유명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에 잘 드러나 있다. 에이어가 러셀을 따랐던 것과 달리, 스트로슨의 가장 유명한 논문(“On Referring”)은 러셀이 철학에 기여한 것들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기술 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스트로슨은 첫 저서에서 현대 논리학을 그런 식으로 일상 언어에 적용하는 것이 일상 언어의 미묘함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주장을 자신의 논문보다 조금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시했다.(『Introduction to Logical Theory』) 토론에서 에이어는 속사포의 총잡이였고 스트로슨은 우아한 검술사였다(역자-원문은 “Ayer used rapid fire, Strawson elegant rapier play”). 에이어는 라디오 패널로써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었고 스트로슨은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철학자로서 더 높게 평가되었다. 스트로슨은 위컴 논리학 교수의 후보였는데 위원회를 구성하는 비철학자들의 투표로 에이어가 당선이 되자 오스틴과 라일은 이에 대한 항의표현으로 사임을 했다. 그 날 저녁에 스트로슨의 동료가 그에게 가서 낙선한 것에 실망했는지를 물어보자, 스트로슨은 “실망을 하진 않았네. 단지 실업을 했을 뿐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역자-원문은 “Not disappointed, just unappointed”)
1973년 즈음에는 에이어를 논리실증주의자로, 스트로슨을 일상 언어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더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에이어는 흄주의자(Humean)로, 스트로슨은 칸트주의자(Kantian)로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들 사이에는 그렇게 이름 붙인 것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스트로슨이 체계적인 형이상학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에이어는 형이상학에 대한 검증주의전 비판을 포함해 초기의 급진적인 입장을 철회했다. 그는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의 문제는 그 책의 핵심 주장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1976년에 위 책의 초판 40주년 출판 기념회에서 그는 그가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입장들에 대해 일련의 강연을 한 바 있다. 그 책에서 그는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의 사이비 명제의 예시로 “절대자는 진화와 진보에 개입하지만 그 자체로는 진화하거나 진보할 수 없다”(the Absolute enters into, but is itself incapable of, evolution and progress)라는 문장을 인용해오며 “이는 내가 F.H.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Appearance and Reality)에서 아무 문장이나 가져온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강연에서 그는 아무렇게나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헛소리처럼 들리는(nonsensical-sounding) 문장을 찾기 위해 『현상과 실재』를 오랫동안 뒤적거렸다고 시인했다. 이는 많은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가능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브래들리의 문구를 제시한 방식처럼 문맥에서 떼어놓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말이다.
1973년의 젊은 철학자들에게 에이어는 다소 철학적으로는 예스러운 사람처럼 보였다. 정도는 덜했지만 스트로슨 또한 그랬다. 그 저변에 깔린 큰 이유는 현대 형식 논리학과 그들의 관계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에이어는 현대 형식 논리학에 우호적이었고 스트로슨은 비판적이었지만 둘 다 이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대 형식 논리학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시절에 철학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어쩔 때는 형식 논리학을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기초 산수처럼 단순한 계산(sums)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에이어와 스트로슨이 현대 형식 논리학에 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대서양을 휩쓸며 건너온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좋지 못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흐름은 크립키와 루이스(그는 적어도 1970년대에는 형이상학자이면서 언어철학자이기도 했다)를 비롯해 도널드 데이빗슨(Donald Davidson),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데이빗 카플란(David Kaplan), 로버트 스톨네이커(Robert Stalnaker), 키스 도넬란(Keith Donnellan), 리처드 몬태규(Richard Montague), 그리고 바바라 홀 파티(Barbara Hall Partee)와 같은 철학자와 언어학자들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었다.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은 현대 논리학에 기반을 둔 형식 의미론을 자연 언어에 적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에이어는 언어 철학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흐름에 대한 그의 분노는 흄이 제시한 구분, 즉 사실의 문제와 관념의 연결이라는 구분을 위반하는 범주인 필연적 후험성과 선험적 우연성을 제시한 크립키의 논변에 집중되었다. 에이어는 연례적으로 “Informal Instruction”이라는 대중에게도 열려있는 수업을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는 최근에 출간된 철학적 작업에 대한 짧은 발표를 하고 그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흐름에 몸담고 있었던 똑똑한 대학원생들도 다수 참여했는데 이는 에이어가 곧잘 토론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매년 그는 크립키의 후험적 필연성과 선험적 우연성을 반박하고자 하는 짧은 논문을 발표하고자 했는데, 사실 그의 논문은 크립키가 바로잡고자 했던 바로 그 혼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발표를 끝내고 나면 그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토론이 이어졌는데 사실 그들이 에이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크립키를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허사로 돌아갔다. 스트로슨은 에이어보다는 훨씬 언어 철학자였지만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그의 이해 역시, 일상 언어 철학은 자연 언어의 복잡함 그대로 화자의 실제 언어 사용에 집중하는 반면 이상 언어 철학은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화자로부터 자연 언어를 분리하여 그것에 단순한 형식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투사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는 구시대적인 렌즈에 의해 왜곡되어 있었다. 스트로슨이 결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새로운 흐름은 일상 언어 철학과 이상 언어 철학이라는 두 기획을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자연 언어를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식적이고 진리조건적인 의미론으로 해석하는 것이 화자가 실제로 언어를 사용할 때의 복잡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새로운 흐름에 대한 스트로슨의 비판이 요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사람들은 널리 여겼고, 이는 그를 옛날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일조를 했다.
결과적으로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은 20세기를 분석철학을 양분했던 두 큰 조류, 즉 논리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이 가진 요소들을 놀라울 정도로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의미를 모델링하기 위해 형식 언어를 엄밀하게 사용하는 법을 계승했는데, 이때 형식언어는 현대 논리학을 통해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기술된 구문론과 의미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상 언어 철학에서는 설명되어야 하는 언어의 용법에 대한 자료들과 형식적 모델을 데이터에 적용시키기 위해 의미와 사용 사이의 관계의 본성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계승했다. 이러한 기획을 고무시킨 선구자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성과였는데, 그는 겉보기에 지저분하고 복잡 미묘한 영어의 표층 문법을 그 아래에 깔려 있다고 가정되는 심층 구조의 형식적 모델을 통해 설명해냈다. 새로운 흐름을 탄 철학자들이 자연 언어의 의미론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촘스키를 비롯한 사람들이 구문론에서 한 것과 유사해보였다. 물론 촘스키는 의미론의 과학적 지위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어떤 표현의 의미론적 구조와 구문론적 구조 사이에, 적어도 심층 구조나 논리적 형식의 차원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이 고수하는 근본적인 입장은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로부터 카르납까지 이어진 생각, 즉 복합적인 표현의 의미는 그것의 구성요소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의미론은 반드시 조합적(compositional)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익숙한 단어와 익숙한 조합 유형으로 이루어진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최초의 가정은 분명 문장을 그것의 의미적 요소로 분절할 때 그 분절은 그 문장을 구문론적 요소로 분절할 때의 분절과 비슷한 정도의 심층 구조에서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성이라는 제약은 체계적인 의미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제로는 오직 그러한 조합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단지 드러낸다고 주장되는 게 아닌) 의미론적 이론만이 형식적으로 구체화된 언어였다. 그러한 형식적 의미론이 없는 언어 철학은 새로운 흐름을 탄 철학자들에게는 아주 미성숙한 것으로(badly undeveloped) 보였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 탓에 1973년 즈음 오스틴은 옥스퍼드 언어 철학 판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하는 어떤 형식 의미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후배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지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존 써얼(John Searle)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저인 『화행』(Speech Acts) 썼지만 그 책이 출간된 1969년 직후에 이미 옥스퍼드 철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오스틴과 써얼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새로운 흐름의 바깥에서 행사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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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어가 매년마다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에 맞서 (성공적이지 못한) 반론을 내놓았다는 에피소드를 참 좋아합니다 :smiley:

썰푸는 재주가..ㅋㅋㅋ제일 재밌게 읽었네여

재밌어서 (1)부터 (4)까지 단숨에 읽었네요 ㅋㅋㅋ 다음 편도 기대가 됩니다.

라임이 좋네요ㅋㅋㅋㅋㅋ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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