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10)(완)

@Raccoon 님과 @wildbunny 님이 번역하신 티모시 윌리엄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가 읽다가, 남아 있는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아 번역했습니다.


역사는 종종 승자에 의해 쓰인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분석 철학의 경우, 역사가 대체로 패자들에 의해서 쓰일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이유는 분석 철학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반-역사적 전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를 야망이나 성취에 있어서 과학과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기에, 분서철학은 과학마냥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했다. 진보가 예상되는 시점이라면 딱히 놀라운 태도인 것도 아니다. 역사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가 자신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쓰일지라도, 불평할 수 없는 법이다. 두번째 이유는 최근의 분석 철학이 (전복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분석철학의 역사에 대해 말해져야 한다 느끼는 거대 서사를 전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리얼리즘 형이상학의 재부상은 종종 어떤 부끄러움도 가지지 않고 사물 그 자체(things in themselves)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칸트-비트겐슈타인-듀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최근 분석 철학이 긴 철학의 과정 중 중요하지 않은 변칙적 사건이자, 지나갈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고 싶어할 것이다.

이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은 리처드 로티다. 그는 한 걸음 뒤에 서서,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동시대와 가까운 분석 철학의 역사가 가진 선명한 패턴을 분간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영웅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듀이, 하이데거, 셀라스, 브랜덤. 그의 선정적이고(racy) 정교하게 의도된 도발적인(deliberately provocative) 이야기가 널리 읽힌 것은 놀랍지도 않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 (영웅으로든 빌런으로든) 언급된 무수히 많은 당대 철학자들 명단에 데이빗 루이스가 누락된 것은 눈에 띄는 지점이다. 루이스는 그 때 이미 널리 논의되는 두 권의 책/무수한 논문을 썼으며, 1970년대 이후 프린스턴에서 로티의 동료였음에도 그랬다. 로티의 레이더는 다음 세기 분석 철학의 중심 인물과 (그 인물이 가져올) 심각한 위협을 놓친 셈이다. 로티는 새로운 물결의 언어 철학자들과 이에 수반된 형이상학에 더 이상 동감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흐름이 가진 의미론에 대한 지칭적 접근은 언어를 세계에 대한 거울로 만든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이 위협받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그는 자신의 돈을 추론주의적 접근, 특히 로버트 브랜덤에 의해 제시된 신-실용주의적 형태에 대신 투자했다. 이 이론은 언어 게임에서 화자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화자에게 가해지는) 요구(commitement)와 (화자가 가지는) 권리(entitlement)에 초점을 맞춘다. 브랜덤은 자기 스스로도 철학의 역사에 관한 거대 서사를 가지고 있다. 브랜덤은 (농반진반으로 [tongue partly but not wholly in cheek]) 자신이 칸트와 헤겔의 자연스러운 계승자라 자평한다. 하지만 그의 추론주의는 더밋의 것보다 훨씬 더 프로그램적인 단계에 머물러있다. (왜냐하면) Dag Prawitz 등이 제시한 증명 이론(proof theory)에서 이루어진 기술적 발전과 연관된 더밋에 비해, (브랜덤의 이론에는) 이와 같은 것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추론주의는 언어학자들에게 지칭주의(referentialism)보다 훨씬 덜 유용하다. 상스럽게 말하자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지칭주의가 추론주의를 "발라버린 셈"(beats)이다.

물론 우리는 최근 철학에 대한 역사가 미래에 대해 중립적일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누가 무엇을 언제 출간했는지만을 담은 건조한 목록조차, 누가 무엇이 역사적으로 중요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기준을 전제한다. 좋은 역사적 이야기는 자신의 글에서 보다 직접적이고(explicitly)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여) 반성적으로(reflectively) 패턴을 명확하게 한다. 이 논문은 (역사에 대해 진지한 깊이나 엄격함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지만) 요근래 분석 철학을 다루는 역사서라면 누구라도 질서를 부여해야 할 몇 가지 두서없는 덩어리들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는 보다 명확히-반성적으로 언급되야할 거대한 패턴를 말하려는 시도(gesture)가 있었다. 연대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학 내에서 유행이 가진 힘은 이미 철학의 역사가 어떠한 패턴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보증한다. 이 패턴이 그저 한 무리가 이곳저곳으로 달려는 것으로만 보이면 좋겠지만, 몇 유행은 회고할 때 머저리처럼 보인다. 그 당시에도 그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행은 모든 학문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지닌다. 심지어 수학조차 그렇다. 예컨대 어느 주제나 스타일의 작업이 명망 있는지 고려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또한 유행은 단지 인간 집단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결함인 것도 아니다. 학계의 유행은 제도 속에서 훈련된 인간이 제도에서 훈련된 다른 사람의 판단을 존중하여, 무엇이 모방하거나 따라야 할 좋은-가치있는 작업인지 정하기에 발생한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갈 때, 이 매커니즘은 공동체가 발전이 일어나는/일어날 것 같은 곳에 빠르게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만들고, 노력이 낭비되는 일을 피하게 해주며, 집단의 기준이 생기게 만든다. 이는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방법이다. "유행"이라는 단어는 주된 견해에 대한 존중이 숭배에 이르러, 다양성과 독립적인 생각을 질식하게 만들고, (마침내) 다른 대안을 잃어버려서, 학계가 잘못된 방향에서 후진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 때에나 적절하다. 하지만 유행의 역할은 오직 어떤 공동체가 없을 수 없는 어떠한 것의 과장된 형태일 뿐이다. 나쁜 아이디어에 쏟은 시간과 노력, 잘못 생각된 프로그램조차, 그 탐구의 한계가 적절히 탐사-평가되어 교훈을 충분히 얻었을 때에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학계의 유행의 역사는 고도로 지적이며 박학다식한 사람들이 한때 어떻게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한 역사다.

이 글에서 논의된 철학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에 대해 이미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역사가 쓰였다. 철학의 역사 역시 적절하게 쓰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걸 쓰는 철학사학자는 최소한 왜 그때 많은 철학자들이 이걸 좋은 아이디어로 여겼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이제 쓰여지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징조들이 있다. 나는 그 작업들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검색의 편의성을 위해 연재글 전체의 하이퍼링크를 아래 달아놓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번역해주신 라쿤님과 와일드버니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정말 좋은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1)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2)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3)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4)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5)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6)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7)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8)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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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심히 공감가네요, ‘분석철학의 역사’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이 대부분 특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왔다고 느낀 경우가 많아서요. 하지만 결국 분석철학의 흐름이 일목요연해져 갈수록, 가장 중립적으로 철학사를 집필하고자 하는 작자들이 더욱더 이 분야에 뛰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도 그 외부에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자 하는(실제 가능한지는 제쳐두고) ‘과학사가’들이 등장하고 내부적으로도 점점 그 중요성을 인식해 갔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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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전 윌리엄슨의 이 글도 그닥 중립적으로 쓰여진 것 같지 않아요 ㅋㅋㅋㅋ. 저 언급조차, 윌리엄슨이 지지하는 분석 형이상학이 결국 승리했고, 그것에 반대했던 브랜덤-로티는 패자에 불과하다는 (간접적인) 선언이니깐요.

어떤 의미에서, 브랜덤-로티로 인해 확립된 철학사의 적자라는 자리를, 자신이 가지고 오고 싶다는 불순한 욕망에서 이런 글을 쓴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과연 10년 후에도 이 평가가 유지될까? 묻는다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분석 형이상학은 물론, 이 형이상학을 지탱하던 형식적 툴들은 (앞으로의) 철학 커리큘럼의 일부가 될테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을지는 퀘스천너블합니다.

(2)

사실 이 부분조차 전 회의적입니다. 이제 분석 철학조차, 분석 철학(들)이라 불러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별 과학의 철학들은 이미 외부의 철학 영역들(언어철학/심리철학/형이상학 등)을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는 때로는 과학철학조차 언급하지 않으면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심리철학적/인식론적/도덕철학적 주제들도 어떠한 중심적 논의가 없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어떤 의미에서 분석 형이상학과 실험 철학 등이 "유행"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들만이 스스로 자신이 "거대 이론"으로 불리고 싶은 야망이 있어서 그런거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많고 다양한 학자들은 그저 자신들이 궁금한 주제에 관해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철학 전통 내에 있는 모든 도구들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뿐이죠.
이 도구에는 기존 철학 전통에 만든 온갖 것들이 포함되겠죠. 일상 언어 학파에서 제시한 언어 분석, 인지과학과 함께 들어온 경험적 연구들, 분석 형이상학/논리학 흐름을 통해 들어온 보다 엄격한 형식적 도구들.

그렇다면, 이제 역사에는 아무런 패턴이 없게 된 것 아닐까요?

사실 저한테는 이게 그렇게 낯설지는 않아요. 저는 항상 예술/미학에 대한 분석철학적 접근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이 접근은 양쪽 모두에게 버림 받았죠. 분석 철학에서도 변방, 예술에 대한 이론에서도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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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윌리엄슨의 글 말미에 로티와 브랜덤에 대한 언급까지 나오는 줄은 몰랐네요!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로티와 브랜덤을 좋아하는 저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평가가 지나치게 박하고 편향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네요. 과연 그들이 단순히 ‘패자’나 ‘발라버려졌다’라고 쉽게 치부될 수 있는 사람들인가 해서요. 소위 ‘후기 분석철학’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인물들 중에는 분명 주류적인 철학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데이비슨이나, 퍼트남이나, 쿤 같은 사람들이 그렇죠.

게다가, 브랜덤이나 맥도웰 자신들의 영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죠. 오히려 ‘분석철학’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대륙철학이나 철학사 연구 등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비트겐슈타인-셀라스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주류 분석 형이상학자들보다 훨씬 강력하기도 하죠. 가령, 반 인와겐이나 사이더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분석적 형이상학이나 언어철학 전공자에 한정되지만, 맥도웰이나 브랜덤은 지각철학, 언어철학, 추론주의, 헤겔연구, 비트겐슈타인 연구, 비판이론, 현상학 등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한 분야에서 읽히니까요.

또 자연주의의 문제에 대해 브랜덤이나 맥도웰과 대조되면서도, 같은 셀라스주의 라인에 속하여 다른 많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데넷과 밀리칸도 분명 주류에 속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로서는 윌리엄슨이

리얼리즘 형이상학의 재부상은 종종 어떤 부끄러움도 가지지 않고 사물 그 자체(things in themselves)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면서도, 그 리얼리즘 형이상학이 재부상할 수 있었던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그다지 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게 아쉬워요. 인물이나 일화에 대한 에세이적 논평은 흥미롭지만, 윌리엄슨의 이 글만 읽어서는 왜 후기 분석철학적 노선에 서 있는 인물들이 ’패자‘이고 ’발라버려졌다‘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리얼리즘 형이상학자들이 루이스 이전의 논의를 그냥 무시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인상을 받게 돼요. (그래서 윌리엄슨이 입으로는 철학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정작 그가 칸트 이후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300년동안의 철학적 성과를 망각한 채 고대나 중세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퇴보적 시도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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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윌리엄슨 나름의 답변이 될 수 있는 글을 번역 중입니다. 뭐랄까, 사실 철학적 방법론에 대한 항변이라서 만족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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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가끔 '강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그것에 대한 비판을 '우리가 실재의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에도', '그것의 존재를 믿지 않을 요인이 될 수는 없다.'라 손쉽게 무시하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기존의 설명들이 어떠한 대상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예를 들어 언어 분석이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 그것을 반박하거나 그 오류를 지적하여 적극적 설명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닌, '침묵한체'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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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각론에 충실하지 않은 철학사를 두고 불평했던 입장에서 민망합니다만, 아마 윌리엄슨의 변호자는 다음과 같은 내러티브를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윌리엄슨은 주류 분석철학이 칸트-헤겔-듀이-비트겐슈타인- ... 등의 흐름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이를 직면하여 극복해냈다고 말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러셀과 무어는 헤겔을 계승한 영국 관념론을 극복해냈고, 어떤 의미에선 신칸트주의를 계승했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는 논리 실증주의는 이미 극복되었고, 듀이를 위시한 20세기 전반 '미국 실용주의'는 그 자체로 콰인을 위시한 현대 미국철학으로 승화되었다고요.

둘째로, 아마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경쟁자들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주의'적 관점의 한 가지 양상은 "불평"만 내놓는 입장보다는 어찌되었건 현상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제공하는 입장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십년째 "구상 단계(programmatic stage)에만 머물러있는" 브랜덤 입장에 대한 본 글에서의 비판이 그렇고, "만트라를 조용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하는" 데이빗슨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또 그렇습니다. 이에 반해 어쨌든 설명적인 이론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이는게 가능세계 의미론 이래 '주류 분석철학'이 좋아하는 입장이구요. 이는 더밋이 윌리엄슨한테 말했다듯

너는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철학에서 적합한 논증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사이의 차이인 것 같다

라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상비평일 수도 있는데 ... 윌리엄슨이 말하는 '미래지향성'은 과거 철학사를 참조하는 것과는 배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재론적 형이상학의 부활"부터가 단적으로 그렇죠. 아마 이견은 철학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받은 인상을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현대철학의 문제는 옛 대가가 남겨두었던 통찰을 참고함으로써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라는 식의 접근은 윌리엄슨의 '미래지향성'과 충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례). 다만

현대철학의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옛 대가의 진의를 해독하면 해소될 수 있다.

라는 접근을 접할 경우, 많은 현대 분석철학자들은

아이고, 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저러는거 보면 지금 영 처지가 궁색해졌구만

이라는 인상을 받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 글에서 호명된 몇몇 인물들에 대한 윌리엄슨의 뜨듯미지근한 시선은 아마 이런 경향성과 깊이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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