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전 @YOUN 님의 분석 형이상학 비판에 이리 답한 적이 있다. 또한 @wildbunny 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2)
나 역시 백화점식 철학과에서 배웠다. 유럽에서 대륙 철학을 하신 분에게 대륙 철학을 배웠다. 고전 서양 철학도 미국에서 하신 분과 독일에서 하신 분에게 배웠다. 이 둘은 학풍이 많이 다르다. 미국에서 하신 분은 분석철학을 통한 적극적 재해석을 주로 하셨지만, 독일은 사상사와 문헌학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내 전공은 비교철학이지만, 영미권 전통에 기반하고 있었다. 분석철학을 통한 적극적 재해석. (대학원실에서 미국/고대 철학 전공이신 교수님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한번 고대 그리스 철학-고대 중국 철학 비교논문을 써보라 하신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비교철학도 일본/중국/대만에서 하신 분들은 꽤 학풍이 다르다. (서양 철학으로 치면 독일에서 하신 분들과 흡사하다.)
(2-1)
항상 철학과에 입학한다는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철학이 뭐라고 생각하길래 공부하고 싶은건데?"
이 질문은 철학과 진학의 만족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특정 학문에 대한 인식이 학계와 대중 사이에 어느정도 차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유독 철학은 학계 내에서도 서로를 보는 입장 차이가 극심하다. 그래서 난 항상 철학(들)이라 불려야하는거 아닐까 생각했다.
(3)
이제 미국도 백화점식 철학의 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내가 말한 분석형이상학 라인이야 철학의 전통적 도구를 쓴다. 직관, 언어에 대한 엄밀함, 수리-논리와 같은 형식적 도구들.
하지만 자연주의의 흐름과 인지과학의 부상 이후, 그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사람들은 애당초 철학의 전통적 툴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SEP 아티클에서도
규범적 인지의 심리학( The Psychology of Normative Cogni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이나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대한 아티클 참고문헌은 대다수가 인지과학/심리학 논문이다. 하다못해 테이나 피콕 등의 이전 세대 심리철학 논문도 없다.
개별 과학의 철학으로 가면, 이건 거진 딴 영역이다. 필립 키처(Philip Kitcher, 1947 -)의 논문 모음집을 살짝 들처보았는데, 그럴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키처는 쿤-헴펠 밑에서 학위를 받은 진퉁 과학철학자다. (헴펠 제자로는 김재권이 있다.) 근데 경력을 보면, 과학철학이 기존 분석철학과 분화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과학사회학에 가까운 저서로 시작해, 사회생물학을 논의한 80년대 저서들.
아마 기존 분석철학자들은 이런 논문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 못할것이다. (각주만 봐도 기존 분석철학 논문보단 생물학-과학사회학 논문이 몇배는 더 많다.)
(4)
비교철학도 완전히 달라졌다. 같이 전공했던 친구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뉴노멀"이다. 아프리카 철학, 원주민 철학, 하와이 철학. 50년 전에 했다면, "그건 철학이 아닌 인류학 같은데요?"라는 말을 들었으면 점잖게 말해준 것일테다.
미쳤냐는 소리를 들을만한 걸 이제 모두가 말한다. 뉴욕대에서도 미시간대에서도 하버드에서도 모두 한다.
비교철학 초창기 펑유란(풍우란)(1894-1990)이나 라디크리슈난(1888-1975)이 어떻게든 중국 사상/인도 사상에서 종교성을 분리해선,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다."고 주장하던 시절과 딴 판이다. 사상이 곧 철학이다. 아마 미국에선 곧 풍수지리를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님은 허허허 내가 나이가 들었네라고 말하시겠지.)
(여담이지만 라디크리슈난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했다. 아프리카 철학에서 주목 받는 사상가들은 비슷한 유형이다. 가나의 초대 대통령인 콰메 은쿠루마,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
(4-1)
비교 철학을 이야기 한 김에, 계속 해보자.
비교 철학은 사상사와 아젠다에 있어서 다르다. 사상사는 이제 각 민족/집단/나라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다. 오늘날 (원칙적으로) 모든 집단들에 대한 사상사가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교 철학은 사상사와 다르다. 철학이 기본적으로 보편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철학은 한 문화권이 아닌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교 철학은, (비서양) 한 문화권의 사상을 보편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재해석"하거나, 주장하는 일이다.
인도/동북아 사상이 비교 철학의 영역으로 안전하게 진입해 들어온 것은, 기본적으로 이들에게는 "철학"으로 납득할 만한 학술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현상에 대해 (i) (인간화된 것이 아닌) 충분히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ii) (서사가 아닌) 논증의 형태로 주장이 제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자>든 <순자>든 <우파니샤드>든 <아함경>이든, 여기서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개념을, (서사적 요소도 분명 있지만) 논증의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언가를 아는 건 까마귀 신이 우리에게 그걸 알려주었기 때문이야."와 같은 인간화된 것 - 서사를 사용한 신화적 설명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비교 철학을 인도/중국을 넘어 아프리카-원주민에게 확장하려는 시도는, 이 "자료의 문제"에 부딪친다. 문헌 자료가 희박하다는 현실적 문제는 뒤로 놓아두어도, 이들 전통에는 "신화"가 아닌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논증적 형태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부족하다. 비교 철학을 하고 싶어도, 1차적 자료부터 학자가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는 셈이다. (당연히 이 시도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 문화 집단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면, 굳이 그런 시도를 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이 자료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i) 학자가 정말로 1차적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이 작업은 여러 합당함, 정당성의 문제에 부딪친다.)
(ii) 1차적 자료를 만든 (요근래의) 학자들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당장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가들이었던 니에레레, 콰메 은크루마, 미국에 살았던 여러 원주민 출신 지식인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아니면 여러 지역에 나갔던 선교사들을 연구하는 방법도 있겠다. (마테오 리치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는 풍부하고 철학적 깊이가 있는 편이다.)
(iii) 그냥 그 "신화적" 내용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은 원주민 철학은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인류학/종교학 담론에서) 원주민-아프리카 철학을 일종의 "애니미즘"/"토테미즘"으로 뭉뚱그르던 접근을 계승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애니미즘"의 철학을 만드는 셈이다. 얄궃게도, 이 접근은 환경 윤리/환경 사상의 부상과 함께 주류적 방법이 되었다.
행위자 이론 - 딥 에콜로지 - 애니미즘을 혼합하고, 거기에 원주민들이 "지속 가능하게" 환경을 이용했던 관습에 호소하면서, 이론을 만드는 셈이다.
난 저 방법들이 정말, 주류 분석 철학, 하다못해 주류 학계와 충분히 논의될 잠재력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물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내 가치 평가다.)(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테지만, 술 먹고 이야기를 해보면 저게 진짜 철학인지 의문스러워 할 것이다.)
(4-2)
몇 가지 가능한 방법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i) 각 문화권은 인간의 심리와 연관된 독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인도에서는 '무아', 즉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그것에 동의하든 안 하든) 모든 사상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또한 동북아에서는 '기'를 느낀다는 것, 즉 분위기를 느낀다는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혹은 공감(empathy)가 언제나 있다고 가정되어 왔다. 반면 서양 철학에서는 무아든 공감이든 논의되지 않거나, 항상 의심되어 온 내용이었다.
오늘날 인도/중국 철학이 당당하 비교 철학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심리학/인지과학을 통해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이 어느정도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서양 철학이 자신들의 편견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한 것에 가까운 셈이다.) 따라서 기존 인도철학/중국철학에서 이 개념들과 함께 논의된 내용들은 충분히 오늘날 연구될 수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방법은 여러 학자들이 나아간 방향이다. 데이빗 왕(David Wang), 마이클 슬로트(Michael Slote), 오웬 플라나가(Owen Flanagan, 1949-), 댄 아놀드(Dan Arnold), 조나던 가네리(Jornadon Ganeri) 등이 이 흐름 속에 있다.
(ii) 이 방법은 원주민/아프리카 철학에서 확장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실험 철학-인지과학-도덕심리학에서 인간의 다양한 판단에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로 문화를 뽑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인지 인류학(cognitive anthropology), 문화 심리학(cultural psychology) 등이 이를 연구하는 분야다.
또한 더밋처럼 철학이 "언어"에 대한 연구라 주장했던 흐름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경향도 있다. (더밋이 비록 공적 언어라 말했지만, 아마 그는 개별 자연 언어 사이에 있는 개념적 차이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그에게 공적 언어는 사실 명제 형태가 공적 발화를 통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와 같은 흐름에는 언어 인류학(linguistic anthropology), 범-인류학/고고학/역사 언어학 연합 등이 존재한다.
(iii) 아니면 그레이엄 프리스트처럼 (혹은 그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각 문화권마다 다른 "논리적 체계"가 있을 수 있다는, 훨씬 강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 난 이건 좀 어렵다 본다. 하지만 프랑스 학계에선 의외로(?) 이런 주장이 좀 인기 있어 보인다.
(5)
이건 자유일까 저주일까?
서로를 소 닭보듯한다는 점에서, 개별 철학은 (다른 분야의) 혁신된 이론 대신 옛 이론에 이것저것 기워놓을 것이다. 이건 저주처럼도 보인다.
자유일수도 있다. 자기가 탐구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 우린 거진 모든 도구를 쓸 수 있다. 거대 이론은 못 만들겠지만 다운-탑 방식은 얼마나 가능하다. 다른 철학 분과는 놀랄지 모르지만, 분석 예술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기생적으로" 살아왔다.
(5-1)
요즘 픽션주의와 관련해서 켄달 월튼(Kendall Walton, 1939-)이 하이프 받는 과정을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정말 어디 변방에서 예술 철학하던 양반인데 자기가 이리 온갖 분야에서 인용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결국 개별 철학 연구에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철학의 전 영역에 쓰일 수도 있는 법이다.
퍼트넘이 했던 말 같은데, 수학이든 윤리학이든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인 이상, 통일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사실 가장 전통적 분석철학 견해와 동떨어진 이론들이 득세하는 영역은 최외곽에 있는 수학, 윤리학, 예술철학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