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윌리엄슨, 언어학적 전회와 개념적 전회 (2022)(완)

(1) 윌리엄슨의 맥도웰 비판 파트에서 오역이 없길 기도해야 겠네요 (...) 하필 거기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인데 하하하하....

(2) 그래도 윌리엄슨의 맥도웰 비판에 대해서 몇 가지 상념을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윌리엄슨이 맥도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부분은, (a) 맥도웰의 논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윌리엄슨이나 맥도웰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윌리엄슨이라면, 사실 이 논지가 그렇게 중요한지 잘 납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치 명제를 도입하려는 사람들이 이 명제를 "왜" 도입하려는 지 설명하려는 것처럼, 입증 책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죠. "철학사나 비트겐슈타인, 칸트 같은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 만한 형태로 이 주장의 중요성을 제기해보라!")

(b) 이와 연관된 문제인데, "납득할 만한 형태"가 어떠한 교조주의라기보단, 말 그대로 오늘날 (윌리엄슨 등이 공유하는) 그 후 분석 철학에서 다룬 내용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논의하라는 말이겠죠.

윌리엄슨이 보기에, 맥도웰은 이미 루이스-크립키와 그 이후의 학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한 문제를, (이런 해결책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다르게 해결하고 있다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굳이 내가 대답해야 하나? 라는 규범적 의문도 어느정도 있을 것 습니다.)
이 부분은 맥도웰 비판에 나온 용법에서 나온 제 추측입니다. 윌리엄슨은 기본적으로 맥도웰의 이론에서 개념의 지위/역할을 지칭이 아닌 내포(intension)으로 보는 듯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칭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보이는) 내포 문제를, 가능 세계를 도입하면서 이후 학자들이 나름대로 "가능 세계 의미론(possible world semantics)"로 해결했다는 점이죠. (물론 완전히 해결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따라서, 윌리엄슨 입장에서 맥도웰(과 그를 계승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려면, 그 이후에 나온 해결책(뭐 이론의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이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이 더 강점을 가진다고 주장해야 납득할 듯 합니다. (예컨대, 초내포성의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음에, 이게 브랜덤의 추론주의나 맥도웰의 방식대로 해결될 수 있다 주장하는 것이죠.)

(3)

철학 분과 간에 가진 "시차"가 언제나 전 재미있습니다. 철학이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었다지만 사실 철학 한 분과의 주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분과의 주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 가장 의존되는 학문이 속칭 제 1철학이었던 셈이죠.) 문제는 이미 다른 분과 A에서는 더 나은 해결책으로 제시된 이론 X에 대해서, 다른 분과 B는 무지하다는 점이죠. 다른 분과 B는 여전히 이론 X를 무시한 채, 그 전 이론인 이론 Z에 의존하면서 논의를 합니다. 그럼 분과 A 입장에서는 "B는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싶을 겁니까. B 역시도 "아니 A 저놈들은 우리가 뭐하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씨부리네." 생각할 거고요.

(3-1)

저는 이 생각을 메타윤리학적 주제를 여기다 쓰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도덕적 참(truth)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 이토록 큰 형이상학적 주장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이론에 근거한지 명확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암묵적으로는 진리대응적 참에 가깝지만, 자세한 각론들을 살피면 (이상 관찰자/행위자/평가자 이론 같은 것들은) 충분히 진리 정합론적 참으로 기술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메타윤리학이 진리대응적 참을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이 학문이 성립되던 시점의 형이상학에서 고정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언어철학적 측면에서도 어느정도 이런 고정이 있다고 생각되고요.) 분석 형이상학에서는 이후 참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나왔는데, 이 논의들을 충분히 살펴야 좀 더 수평적인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까요?
(이외에도 메타윤리학이 언제나 가정하는 마음에 대한 흄적 구분 - 세상을 재현하는 믿음/재현하지 않는 욕망도 여전히 수용 가능한지 의문스럽습니다. 심리철학에서는 이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한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데, 메타윤리학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물죠. 그러면서 암묵적으로 이 이론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라쿤님과 이모티비즘 이야기로 헛돌던 것도 이 전제를 모르고 그냥 제 멋대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3-2)

분석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점이 올 수도 있겠죠. 예컨대, 생물학의 철학/물리학의 철학/심리철학에서는 맹렬하게 부상/창발(emergence)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즉, 개체들이 뭉쳤을 때, 그 이전에는 없던 특성/속성이 창발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근본성"을 탐구한다는 분석 형이상학의 야심도 의심에 붙여질 수 있겠죠.
분석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세상의 근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이 환원되지 않는 셈이니깐요.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