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윌리엄슨, 언어학적 전회와 개념적 전회 (2022)(완)

(0) 본 글은 티모시 윌리엄슨의 <철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Philosophy) 2판 (2022)에 수록된 글입니다. 본 저서는 철학적 방법론에 대한 티모시 윌리엄슨의 입장을 모은 글들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번역했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How Did We Get Here from There?) 역시 본서 2부 9.1장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랫글은 1부 1장입니다.)


언어학적 전회와 개념적 전회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는 1967년 리처드 로티가 편집하여 출간한 영향력 있는 앤솔로지의 제목이다. 로티는 이 문구를 Gustav Bergmann에게서 가져왔다. 소개글에서, 로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의 목적은 가장 최근 일어난 철학적 혁명, 일명 언어학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을 소개하는 것이다. 내가 "언어학적 철학"이라 말할 때 의도한 바는, 철학적 문제는 언어를 재구성하거나-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더 이해한다면 해결/해소될 문제라 여기는 관점이다. (로티)

"언어학적 전회"는 그 후 20세기 철학에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가리키는 모호한 표준적인 문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로티가 말하는 "언어학적 철학"이라는 명칭으로 국한되어 묶일 수 없는 것이다. (누구는 단 하나의 "사건"이라 여기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전회를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 언어는 여하튼 철학의 중심적인 테마가 되었다.
여기서 "테마"라는 말은 모호성을 의도하여 사용했다. 언어적 전회가 철학을 언어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으므로, 이는 "소재"를 의미하진 않는다. 한 노래의 테마가 그 노래의 소재가 아니듯 말이다. 언어학으로 설명 가능한 혼란을 해결하는 활동이 철학이라 여긴 사람들도 (과학이 특정 소재를 가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철학이 그러한 소재를 가진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어학적 분석을 철학적 도구 중 하나로만 여기는 태도가, 아직 언어학적 전회를 받아드리지 않았기에 언어를 (철학이 탐구할) 중점적 요소로 여기지 않은 결과로 보았을 따름이다. (우리는 이를 차후에 더 자세히 볼 것이다.)
언어학적 전회가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 점차 더 널리 펴지는 견해다. 우리는 이 전회가 얼마나 정반대의 방향으로 지금까지 갔는지 혹은 가야 하는지 물을 것이다.

언어는 철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중심적인 것이라 여겨졌다. (따라서 이 모두를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언어학적 전회가 가진 다양한 다른 형태의 역사는 20세기 철학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는 다른 책, 다른 저자가 할 일이다. 나는 내멋대로 역사의 짧은 한 조각을 통해 오늘날의 문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내 전임자들인 옥스퍼드 대학의 위컴 논리학 교수 중 몇을 말하면서 말이다.

에이어(A.J. Ayer)은 위컴 논리학 교수 중 처음으로 언어학적 전회를 수용한 사람이었다. 1936년, 비엔나와 비엔나 서클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교수직에 있지 않았을 때, 그는 강고한 언어학적 철학의 형식적 버전을 선언했다.

철학자는 분석자로서,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철학자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만 대상을 다루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철학의 명제는 그 특성에 있어서 사실적인 것이 아닌 언어학적인 것이다. 이 말은, 철학이 물리적 (심지어는 심리적) 물체들의 행동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혹은 정의의 형식적 결과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이어)

에이어는 자신의 관점을 궁극적으로 버클리/흄의 경험론에서 찾는다. 단어의 정의와 대상에 대한 묘사를 대조시킨 그의 견해는, 거칠게 말하자면, 생각(ideas)와 사실의 문제(matter of fact)을 대조한 흄의 견해에 대한 언어학적 유비다. 경험론자들에겐, 철학의 경험 독립적(아프리오리) 방법은 사실의 문제에 관한 종합적 진리(synthetic)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다. ("물리적 (심지어는 심리적) 물체들의 행동"). 철학은 오직 생각의 관계들과 관련된 분석적 진리만을 산출한다. ("정의 혹은 정의의 형식적 결과") 후에 에이어의 작업에서 전통적인 경험주의는 언어학적 테마를 가려버렸다.
에이어는 위컴 논리학 교수 자리에 있어, 마이클 더밋의 전임자였다. 더밋은 프레게를 말하며, 언어학적 전회에 대해 널리 인용되는 표현을 만들었다.

프레게와 함께, 철학의 마땅한 목적이 마침내 확립되었다. 첫째, 철학의 목표는 사고(thought)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사고에 대한 연구는 생각(thinking)의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연구과 날카롭게 구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분석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은 언어를 분석하는 것이다. (중략) 이 세 신조를 수용하는 것이 모 분석적 학풍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더밋)

이 관점에 따르면, 사고는 본질적으로 공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 (실제로 표현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이 공적 언어는 누군가가 생각할 때, 상호주관적인 메세지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노이즈 (단지 생각의 심리학적 요소에 불과한 것을) 제거한다. 더밋의 저서는 (자신이 정의한) 분석 철학에 있어 가장 인상적인 기념비 중 하나다. 에이어와 다르게, 그는 철학적 주장을 정의라 여기지 않는다. 로티와 다르게, 그는 언어학적 전회를 비단 방법론의 문제만이 아닌, (다른 것과) 구분되는 철학의 소재에 관한 것으로 제시한다. 더밋의 관점을 따르면, 프레게의 통찰은 인식론을 대체해 언어철학이 제 1 철학이 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방법론적 혁신은 철학의 적절한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 셈이다.
다른 곳에서, 더밋은 언어에 관한 자신의 주장이 다른 학파와 "분석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라 명확히 말했다. 학파의 시작에 대한 설명은 살짝씩 다르다. 한 곳에서는, "분석철학은 언어학적 전회가 일어나고 생겼다. 물론, 이 움직임은 한 순간이 한 그룹의 철학자들에 의해 통일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첫번째 명확한 예시는 프레게의 1884년 저서 <산수의 기초>다." 그 이후에는 "만약 우리가 제대로 된 분석철학의 시작점을 언어학적 전회로 여긴다면, 프레게/무어/러셀이 얼마나 열심히 그 기반을 만들었던지 간에, 결정적인 시점은 비트겐슈타인의 1922년 <논리 철학 원고>임이 틀림 없다." 짐작건대, 프레게에서 언어학적 전회는 순간의 통찰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체계적인 개념이라는 뜻일 것이다.

더밋이 말하는 "분석 철학"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분석 철학과 일치하는지는 명료하지 않다. 다른 종류의 언어학적 전회는 속칭 "대륙 철학"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났다. 자크 데리다가 더밋의 세가지 신조에 동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용어[대륙철학]의 확장이 가능하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역으로, 버트란드 러셀은 전형적인 분석 철학자로 간주되지면, 이 세가지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20년 동안, 자신들의 작업이 "분석 철학"이라 불리는 데 동의할 소수의 사람 중 소수만이 언어학적 전회을 수용할 것이다. (나는 이 소수가 아니다.) 가렛 에반스(Gareth Evans), 크리스토퍼 피콕(Christopher Peacocke), 존 캠벨(John Campbell)처럼 더밋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조차, 더밋이 묘사한 것 같은 중심적 역할을 언어에게 주지 않는다. 더밋에게 있어서, 그들은 분석 철학자는 아니지만, 분석 철학 전통에서 자라나온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은 언어에 대한 분석이라는 우회로 없이, 사고(thoughts)를 직접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80년대에, 몇몇 그룹들에서 심리 철학이 언어 철학을 철학의 운전석에서 쫓아냈다는 생각은 흔해졌다.

1975년에 나온, 제리 포더의 영향력 있는 사고 언어 가설(language of thought, 인간의 사고 구조는 언어의 구조와 동일하다)을 수용한 심리 철학자들에게, 공적 언어에 대한 사고의 우위성은 모든 언어에 대한 사고의 우위성을 함축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사고 그 자체가 뇌의 계산적 부호, 즉 언어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는 이 관점을 분석 철학에 대한 더밋의 세 신조와 결합해볼 수 있다. (이는 더밋의 의도와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더밋은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를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고 언어에 1인칭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방법론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과 매우 다른 언어학적 전회를 야기한다.

사고에 대한 언어의 방법론적 우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더밋의 세 신조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책은 마지막을 거부하면서도 첫째/둘째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의 목표가 사고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 - 사고에 대한 연구는 생각의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연구와 날카롭게 구분된다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고를 분석하는 적절한 유일한 방식이 언어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은 거부한다. 만약 사고에 구성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이들을 "개념"(concepts)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을 따르면, 더밋의 분석 철학에서 단어(word)가 차지하던 자리를 개념이 차지하면 된다.

실제로 일을 할 때, 언어학적 철학자들은 때로 단어보다는 개념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념을 동의어들이 공통되게 표현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동의어가 가진 공통점이지 차이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개념의 철학자(conceptual philosopher)가 데넷의 첫째/둘째 신조("철학의 목표는 사고의 구조에 대한 분석"/"사고에 대한 연구는 생각의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연구와 날카롭게 구분됨")을 수용하면서, 마지막을 수용할 수도/안할 수도 있는 입장이라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하는 철학을 개념의 철학(conceptual philosophy)으로, 이들의 전회를 개념적 전회(conceptual turn)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 전회는 언어적 전회보다 넓은 범위의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언어와 사고 중 무엇이 우위인지에 대해 이 입장은 중립이다. 우리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한다. 이것이 참인지/거짓인지는 대상이 우리가 생각한 것-말한 것인지에 달려있다. 사고와 말이 (무엇에) 관함(aboutness)이라는 점은 이것이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진다는 뜻이다. 개념적 전회는 지향성을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이 용어는 개념적 전회가 우리가 흔히 "분석 철학"으로 불리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얼마나 좁은지 시사한다. 현상학적 전통은 개념적 전회의 다른 모습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해석(interpretation)에 대한 해석학적 작업, 담론에 대한 여러 포스트모던한 담론들에서, 개념적 전회는 보다 특별한 언어학적 형태를 띈다.

우리는 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모든 철학이 개념적 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자연스러운 관점에서, 개념은 거대한 마음-독립적인 실제(reality)의 작은 부분만을 이룬다. 철학의 목표가 어떤 의미에서 이 작은 부분만을 분석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진부하다. 도식적으로 말해보자. 철학의 소재에 관한 절대적 관념론(absolute idealism about the subject matter of philosophy)를 철학이 오직 개념에 대한 연구라 보는 입장이라 해보자. 이와 대조적으로 존재론적 절대 관념론(ontological absolute idealism)은 오직 개념만이 존재한다 여기는 입장이라 해보자. 만일 "철학의 소재에 관한 절대적 관념론"이 "존재론적 절대 관념론"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존재론적 절대 관념론"을 거부하면서도 굳이 "철학의 소재에 관한 절대적 관념론"을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철학의 소재에 관한 절대적 관념론"을 거부하면서도,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전적으로 개념적인 소재가 아닌 것을, 그 소재의 개념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방법론적 주장은 차후에 논의될 것이다. 지금 글의 목적에서는, 이 입장이 얼마나 에이어/더밋의 입장에서 약화되었는지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개념이 실제의 작은 부분만을 이룬다는 주장은 다양한 입장에서 반박될 수 있다. 개념이 사고의 구성 요소로 정의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만약 사고가 러셀식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고, 이 명제가 실제의 개체(objects)/속성/관계/다른 것들의 결합물이라면, 이들 개체/속성/관계/다른 요소들이 정의상 개념이다. 이 경우, 존재론적 절대 관념론은 사소한 문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다양한 러셀식 명제의 구성 요소이고, 그렇기에 개념으로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셀식 명제를 수용하는 개념 철학자조차, (명제의 구조적 특성인) 개념적 구조와 다른 형태의 구조를 구분할 것이다. 예컨대, 이 크리스탈이 반투명하다는 단순 명제를, 그들은 <이 크리스탈, 반투명>이라는 개체-속성 결합물로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크리스탈 자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자신들이 할 일이 아니라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화학적 구조이지 개념적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개념적 구조라면) 이 명제는 단순 명제가 아닐 것이다. 사고의 구조를 분석한다는 이들 철학의 목표는, 다양한 구조들 중 오직 하나만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러셀식 명제를 수용하면서, 개념적 전회에는 반대할 수 있다. 철학이 물리적 물체의 일반적인 메레올로지(mereological, 부분론) 구조와 같은 비개념적 구조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다른 관점으로도 보자. 한번 개념을 보다 전통적인 관점을 따라, (언어적 표현이) 제시되는 방식(modes of presentation, 프레게의 표현. 두 단어가 같은 지칭을 가질지라도 다른 내포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음. 샛별-금성), 생각-말하는 방식 아니면 지적 능력으로 보자. 여전히 개념이 실제의 작은 부분만을 이룬다는 주장은 (더밋의 두번째 신조를 위반하면서) 생각의 과정과 사고를 혼동한 탓으로 여겨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학적 사건들이 실제의 작은 부분만을 이룬다는 점에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심리학적 의미의 "사고"가 동일하게 좁은 영역만을 차지한다는 것을 수긍한다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존 맥도웰(John McDowell)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맥도웰에게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은 개념적 내용(content)이다. 개념은 비-개념적 실체와 구분되는 외부 경계선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관념론이라는 혐의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은 마음-의존적인 어떠한 논쟁적인 주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의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떠한 속성이 있는 어떠한 개체이다. 맥도웰의 주장은 개체와 속성이 곧 개념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원칙적으로 우리는 그들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이 그 개념을 가진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다양한 개념들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같은 개체를 "금성"으로도, "샛별"로도 생각할 수 있다. 맥도웰에게 알맞는 프레게의 용어를 쓰자면, 다른 뜻(sense)이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게 밝혀질 수 있다. 그는 "마음은 뜻의 영역을 지지하지, 지칭의 영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중략) 사고와 실제는 뜻의 영역에서 만난다."고 인정한다. 개체에 있어, 개념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unbounded)는 그의 주장은 어떠한 개체든 생각될 수 있다는 것에 이른다. (의미/생각의) 대상이 된다는 주장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예컨대 개체가 속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개체와 속성을 생각할 수 있고, 전자(개체)가 후자를 가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미/생각의) 대상이 된다."는 말을 정합적/자연스럽게 읽자면, 그 대상들은 (그들이 연관된) 개체/속성/관관계로 거칠게 개별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샛별이 금성이라면, 만약 샛별이 밝은 일은 금성이 밝은 일이다. 개체가 동일하기에, (그들이 가진) 속성 역시 동일하다. 이 독해에 따르면, "우리가 옳게 생각했다면, 우리가 생각한 것이 바로 그 대상이다."라는 맥도웰의 주장은 틀렸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생각하는 것은 뜻의 층위에서 개별화되지만, (생각의) 대상은 지칭의 층위에서 개별화되기 때문이다. 비록 맥도웰의 주장은 약화된 의미에서 옳지만, 이 해석은 맥도웰이 그 주장에 놓는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맥도웰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든, 모든 것(개체, 속성, 관계, 사태 등)이 생각될 수 있다는 전제를 요구하는 듯하다. 이 전제는 매우 논쟁적이다. 우리가 왜 실제에는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어떠한 무규정적(elusive) 개체가 없다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들을 집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방금 "무규정적 개체"라고 불렀듯이) 하지만 이는 그 중 하나를 생각 속에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의 물질적 개체가 무규정적인 하위-하위-원자 입자의 더미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그들의 집합적 효과로 알면서도, 그것을 이루는 하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무규정적 개체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 일반은 철학적으로 고민하기 좋은 주제처럼 보인다. 당연히 맥도웰은 개념이 단지 인간이 가진 의학적(생물학적) 한계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규정성은 이러한 것보다 깊은 문제가 있다. 개체의 본질에는 어쩌면 (이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생각할 것이 요구되는) 복합체(complex being)와의 분리 가능한 인과적 상호 작용이 (현실적으로는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을지 모른다. 다시 프레게의 용어를 쓰자면, 뜻은 지칭물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무엇을 드러내는 방식은 가능한 생각자(possible thinker)에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실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맥도웰이 보여준 것을 모두 고려했을 때, 생각하는 것에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어 보인다. 무규정적 개체는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개체에 대한 일반적인 존재론적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념의 영역 밖에서 어떤 생각의 흥미로운 뜻을 만들 수 없다는 맥도웰의 주장은, (무규정적 개체라는 사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약화된다. 우리는 무규정적 개체가 정말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개체가 없다고 주장할 동기는 무엇인가? 맥도웰의 의도와는 멀리 떨어진 어떠한 형태의 관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무규정적 개체를 배제하는 방법론적 기반을 가진 철학에 대한 구을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

논의를 위해, 무규정적 개체가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해도, 철학이 개념, 뜻이나 사고의 영역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학문에 종사하든, 그 사람들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를) 서로 의사소통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고 자체에 대해 거의 연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그 사고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연구한다. 대부분의 사고는 사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철학을 사고에 대한 연구로 만들려면, 철학자들이 사고하는 것이 사고에 관한 것이라고 고집해야 한다. 하지만 왜 철학자들이 이 제약을 수용해야 하는지는 불명확하다.

우리가 흔히 (분석철학적) 심리철학이라 부르는 영역에서도, 많은 작업들은 개념적 철학의 두 신조를 위반한다. 자연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자연적 세계의 일부이며, 그렇게 연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들 다수는 사고는 자연 세계의 일부로 다루면서, 생각의 심리학적 과정과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는다. 감각(sensation)과 감각질(qualia)를 지향적 현상으로 다루지 않은 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고의 구조를 분석하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감각/감각질의 본질 그 자체이지, 그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진실성(veridicality, 느낀 것이 환상이 아닌 진실인지)에 대한 물음이 나오더라도, 항상 체계적인 사고가 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몇 철학자들은 감각 지각은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지 않은 내용을 가지며, 이는 환경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라 본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 비개념적 내용의 본질 자체에 있지, 이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있지 않다.

초창기의 희망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심리철학은 언어철학이 하던 것처럼 철학을 조직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떠한 철학의 분과도 그러지 못했다. 철학 역시 다른 분과들처럼 증가하는 전문화에 더 먼역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하나의 철학적 방법이 모든 철학적 병들을 해결해줄 만병 통치약이며, 따라서 이것이 핵심 분과로 여겨질 특권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철학의 다른 분과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철학의 근본적인 소재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된다.

생물학과 물리학은 사고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이론적인 단계에서, 그들은 생물학의 철학/물리학의 철학과 통합된다. 그렇다면 왜 생물학의 철학자들/물리학의 철학자들은 오직 사고만을 연구해야 하는가? 물론 때로 (철학자들은) 생물학자/물리학자들의 개념을 연구하고/해야하지만, 때론 철학자들은 그 개념이 무엇이며, 무엇에 관한 것인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 모두로) 연구한다. 만약 개념적 전환이 이들 철학이 정당한 철학이라는 생각과 합치될 수 없다면, 우리는 왜 개념적 전환을 받아드려야 하는가?

보다 핵심적인 예시가 남았다. 오늘날 형이상학자들은 사고나 언어를 근본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근본적인 종류의 것이 무엇이 있으며, 그들이 어떠한 속성/관계를 가지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고 구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전까지, 그러한 사고 자체가 우리에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형이상학은 실체(substance)-본질(essence), 보편자(universals)-개별자(particulars), 시공간(space and time), 가능성과 필연성(possibility-necessity)를 연구한다. 비록 이들에 대한 유명론적/개념론적 환원이 시도되었지만, 이들 이론이 방법론적 우선권을 가지지도 않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환원하고자 시도하는 것에 대해 불합리한 정의감(scant justice)을 가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20세기 철학의 역사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마지막 3분의 1 지점의 생생하고-정확하며-가장 창의적인 성취를 드러내는데 실패한다. 형이상학적 이론의 부활, 리얼리즘 정신, 때로는 이론적이고(speculative) 때로는 상식적인 솔 크립키(Saul Kripke), 데이빗 루이스(David Lewis), 킷 파인(Kit Fine), 피터 반 인와겐(Peter van Inwagen), 데이빗 암스트롱(David Armstrong) 등에 의해 주장된 이론들. 이들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예시만 들자면, 이들은 본질주의를 "안락의자적 방법"(armchairstic, 안락의자에 앉아 생각만 해서 이론을 만든다는 뜻. 여러 분과에서 쓰이는데, 그때마다 긍정/부정인지는 꽤 다른 편이다.)에서 추방하기 위해 안락의자적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철학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거대 서사을 따르면, 이러한 활동은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지만, (어째겠는가) 일어났는데. 이 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쁘게 자신들이 전통적 형이상학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칸트, 비트겐슈타인, 역사의 권위에 의존한 주장은 공허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들 주장은 최근에 이루어진 시험을 통과한 주장들에 의해 지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형이상학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무너트린 콰인의 작업과 연속적이라 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도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다. 안락의자에서 한 주장이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형이상학적 가능성-필연성에 대한 양상적 관념 역시 핵심적이다. 비록 경험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인 속성(essential properties)을 귀속시키는 것을 제약하지만, 결과는 논리학과 상상력의 절묘한 상호작용에 의해 도달한다. 핵심적인 실험은 사고 실험이다.

혹시 신-구 형이상학과 개념적 전환의 관계가 보기보다 덜 삭막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사고에 대한 분석으로 재해석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자신의 "기술적 형이상학"[descriptive metaphysics]이 세상에 대한 우리 사고의 실제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라 말한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과 다르게 말이다.) 그런데 실제 그 자체를 반성하지 않은채, 개념을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생각과 말이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이 생각은 더밋의 후임이자 내 전임인 데이빗 위긴스(David Wiggins)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는 또한 논리학과 생물학의 생각들이 조화롭게 결합될 수 있다는 본질주의 형이상학을 말한 유명한 저서의 저자이다.) 위긴스를 말했다. "어떠한 의미나 언어에 대한 지식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는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리자."

위긴스는 모든 것이 세상을 일부이기 때문에, 언어와 의미 역시 세상의 일부라는 상식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요점은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자연종[natural kind]) 우리는 반드시 그 실제 사례(specimens)을 가리켜야 한다는 점이다. 저기에 있는 무언가는 저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결정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아는 것은, 저기에 어떠한 것이 있는지 무언가 안다는 것이다. 이는 사고/언어에 대한 분석이 어떠한 종류든 방법론적 우선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자율적으로 얼마나 추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더밋이 주장한 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이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대답이 사고와 언어에 대한 분석이라 주장한 것이다. 예컨대, 수(numbers)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7과 같은 숫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수학적 담론에서 발화되는 문장 차원에서의 고유명사처럼 의미론적 기능을 하는지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능"이란 무엇인가? "사탄" 같은 악마의 이름은, 악마 숭배 담론에서 발회되는 문장 차원에서의 고유 명사처럼 의미론적 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마가 있다는 결론으로 바로 갈 순 없다. 하지만 악마 숭배자들은 "사탄"이라는 단어를 (무언가를 지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처럼 열광적으로 쓴다. 빈 이름(empty names)은 마치 지칭되는 이름을 믿는 사람에 의해 발화된 문장의 차원에서 이름이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 같은, 의미론적 기능을 하는 것처럼 (appear) 보임에도, 이렇게 보이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사탄"은 주관적 입장(예컨대, "사탄은 자기동일적이다.') 에서 "사탄"을 쓴 몇 문장들이 참을 표현할 때, 오직 그때에만 무언가를 지칭한다. 하지만 사고와 언어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문장이 정말로 참을 표현하는지 밝혀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물론 "사탄"의 사례가 "7"의 사례에 꼭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몇 신-논리주의자(Neo-lgoicist, 수리철학에서의 신논리주의)에 따르면 "7이 존재한다."는 분석적 참이다. (이는 에이어가 정의의 형식적 결과라 부를만한 것이다.) 반면 "사탄은 존재한다."는 그러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조차 분석성(analyticity)에 대한 적절한 이론의 뒷받침을 요구한다.

이제 이러한 서두를 지나서, 보다 구체적인 작업으로 향할 시간이다. 다음 세 장은 각기 다른 형태의 언어적-개념적 전환을 다룬다. 2장은 철학자들의 질문이 (명시적으로 그렇진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언어/사고에 관한 것인지 검토하기 위해 사례 연구를 할 것이다. 3장과 4장은 철학의 안락의자 방법론이 철학의 핵심인 분석적/개념적 참에 근거하기에, (암묵적으로도) 개념이나 사고에 관한 것일 필요가 없다는 여러 버전의 아이디어들을 검토할 것이다. 모든 경우, 그 결과는 부정적이다. 비록 철학자들은 물리학자들보다 언어나 사고에 관한 것을 고려할 이유가 있지만, 철학은 깊은 의미에서 물리학만큼이나 언어학적/개념적 작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는 실험이 철학의 적절한 근본적 방법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우리는 수학에 대해 유사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수학은 깊은 의미에서 언어학적/개념적 작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험이 수학에 적절한 근본적 방법인 것도 아니다. 이 책의 나머지 반은 철학의 대안적인 개념들을 발전시킨다. 이 개념들에서 크게 안락의자 방법론은 (수학에서처럼) 옹호할만한 것으로 남는다.

이 관점과 많은 현대 철학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개념적 전회와 (더 강하게) 언어적 전회는 잘못된 전회였다 여겨진다. 이들 철학자들이 "분석적"이었다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공유된 본질적인 독트린이나 방법론이 아닌 영향과 의사소통을 통해 인과적으로 연결된 복잡한 네트워크에 묶인 사람들의 넓고, 느슨한 전통을 관습적으로 가리키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프레게, 러셀, 무어,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에이어, 콰인, 오스틴, 스트로슨, 데이비슨, 롤즈, 윌리엄스(Bernard Williams), 앤스콤, 게치, 암스트롱, 스마트(J.J.C. Smart), 포더, 더밋, 위긴스, 마커스(Ruth Marcus), 힌티카, 카플란, 루이스, 크립키, 파인, 반 인와겐, 스탈네이커를 다른 비-분석철학자들과 구분할 공통 요소가 있는가? 언어학적/개념적 전회가 심각한 잘못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영향과 의사소통을 통해 곧바로 그 전통의 일부가 된다. "분석 철학"은 여전히 살아있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방금 명단의 많은 철학자들을 제외시킬 것이며, 종국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용어상의 혼란만을 가져올 것이다.

큰 규모를 다루는 철학사학자들아 언어학적/개념적 전회를 오늘날 그 전회의 잘못을 깨달아 거기서 멀어진다는 점 때문에, 그저 그 전회가 실패였다 평가하는 것은 휘그적(Whiggish)/헤겔적(Hegelian)일지 모른다. [즉, 일종의 역사 발전론 - 단순 결정론으로 생각한다는 것] 우리는 그걸 통해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한다. 최소한,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그걸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개념적 전회가 실수였다면, 그건 단순히 어리석기에 벌어진 실수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철학사에 대한 새로운 서사 구조가 필요한다. 그것이 어떠해야하는지는, 오직 거칠 윤곽만이 명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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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리엄슨이 참 재미있네요. 저는 형이상학에 대한 윌리엄슨의 '칸트 이전적' 입장에 동의하기 힘들지만, 윌리엄슨이 논쟁 구도를 선명하게 그어주어서 도움이 많이 되네요.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의 반대편 진영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형이상학자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21세기에 자신만만하게 '사물 자체'에 대해 말하려고 하고 '안락의자적 방법'을 고수하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들었거든요. 그에 비해 윌리엄슨의 글들은 매우 직설적으로 형이상학/반형이상학 논쟁의 핵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려고 해서 좋네요. 또 오늘날 분석철학 내의 형이상학적 경향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큰 그림을 그려주기도 해서, 이 주제와 관련해 무엇을 찾아보아야 하는지도 잘 드러나 있네요.

(2) 그래도 저는 '언어적 전회' 혹은 '개념적 전회'에 대한 윌리엄슨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봐요. 이 전회들의 의의는 '언어'나 '개념' 자체를 주제화하여 다루는 방식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고는 본질적으로 공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라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은 개념적 내용이다." 같은 신조들이 이 전회들에 상정되어 있는 '전제'라고 보는 건, 전회와 전회의 계기 사이의 선후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거죠. 저 전회들은 표상주의나 지칭주의에 내재된 문제들을 비판한 결과로 저 신조들에 이르게 된 것이지, 저 신조들을 일단 전제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 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니까요.

(3) 특별히, 이런 혼동은 맥도웰에 대해 쏟아지는 수많은 피상적 비판들에 잘 나타난다고 봐요. 맥도웰이 모든 점에서 만족스러운 철학자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맥도웰의 비판자들은 맥도웰의 논지를 너무 자주 왜곡된 방식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여요. 윌리엄슨의 맥도웰 비판도 저에게는 마찬가지네요. 맥도웰은 '마음'과 '세계'가 서로 괴리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자신의 선언주의(disjunctivism)를 통해 비판한 결과로 개념주의(conceptualism)에 이르게 되거든요. 그래서 "개념이란 무엇인가?" 혹은 "개념이란 …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따위의 질문은 맥도웰에게 그다지 중심적인 문제가 아니죠. (맥도웰의 글들을 꽤 많이 읽었지만, 한 번도 맥도웰이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마음과 세계가 떨어져 있다는 가정이 과연 정당한가?"가 맥도웰이 항상 다루는 문제죠. 그런데 윌리엄슨은 맥도웰의 핵심 문제는 무시하고서 '개념'에 대한 몇몇 구절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그것들만 주제화하려고 하니, 실제 맥도웰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논점이 크게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 윌리엄슨의 맥도웰 비판 파트에서 오역이 없길 기도해야 겠네요 (...) 하필 거기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인데 하하하하....

(2) 그래도 윌리엄슨의 맥도웰 비판에 대해서 몇 가지 상념을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윌리엄슨이 맥도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부분은, (a) 맥도웰의 논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윌리엄슨이나 맥도웰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윌리엄슨이라면, 사실 이 논지가 그렇게 중요한지 잘 납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치 명제를 도입하려는 사람들이 이 명제를 "왜" 도입하려는 지 설명하려는 것처럼, 입증 책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죠. "철학사나 비트겐슈타인, 칸트 같은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 만한 형태로 이 주장의 중요성을 제기해보라!")

(b) 이와 연관된 문제인데, "납득할 만한 형태"가 어떠한 교조주의라기보단, 말 그대로 오늘날 (윌리엄슨 등이 공유하는) 그 후 분석 철학에서 다룬 내용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논의하라는 말이겠죠.

윌리엄슨이 보기에, 맥도웰은 이미 루이스-크립키와 그 이후의 학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한 문제를, (이런 해결책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다르게 해결하고 있다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굳이 내가 대답해야 하나? 라는 규범적 의문도 어느정도 있을 것 습니다.)
이 부분은 맥도웰 비판에 나온 용법에서 나온 제 추측입니다. 윌리엄슨은 기본적으로 맥도웰의 이론에서 개념의 지위/역할을 지칭이 아닌 내포(intension)으로 보는 듯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칭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보이는) 내포 문제를, 가능 세계를 도입하면서 이후 학자들이 나름대로 "가능 세계 의미론(possible world semantics)"로 해결했다는 점이죠. (물론 완전히 해결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따라서, 윌리엄슨 입장에서 맥도웰(과 그를 계승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려면, 그 이후에 나온 해결책(뭐 이론의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이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이 더 강점을 가진다고 주장해야 납득할 듯 합니다. (예컨대, 초내포성의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음에, 이게 브랜덤의 추론주의나 맥도웰의 방식대로 해결될 수 있다 주장하는 것이죠.)

(3)

철학 분과 간에 가진 "시차"가 언제나 전 재미있습니다. 철학이 전문화되고, 파편화되었다지만 사실 철학 한 분과의 주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분과의 주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 가장 의존되는 학문이 속칭 제 1철학이었던 셈이죠.) 문제는 이미 다른 분과 A에서는 더 나은 해결책으로 제시된 이론 X에 대해서, 다른 분과 B는 무지하다는 점이죠. 다른 분과 B는 여전히 이론 X를 무시한 채, 그 전 이론인 이론 Z에 의존하면서 논의를 합니다. 그럼 분과 A 입장에서는 "B는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싶을 겁니까. B 역시도 "아니 A 저놈들은 우리가 뭐하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씨부리네." 생각할 거고요.

(3-1)

저는 이 생각을 메타윤리학적 주제를 여기다 쓰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도덕적 참(truth)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 이토록 큰 형이상학적 주장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이론에 근거한지 명확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암묵적으로는 진리대응적 참에 가깝지만, 자세한 각론들을 살피면 (이상 관찰자/행위자/평가자 이론 같은 것들은) 충분히 진리 정합론적 참으로 기술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메타윤리학이 진리대응적 참을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이 학문이 성립되던 시점의 형이상학에서 고정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언어철학적 측면에서도 어느정도 이런 고정이 있다고 생각되고요.) 분석 형이상학에서는 이후 참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나왔는데, 이 논의들을 충분히 살펴야 좀 더 수평적인 대화가 성립하지 않을까요?
(이외에도 메타윤리학이 언제나 가정하는 마음에 대한 흄적 구분 - 세상을 재현하는 믿음/재현하지 않는 욕망도 여전히 수용 가능한지 의문스럽습니다. 심리철학에서는 이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한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데, 메타윤리학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물죠. 그러면서 암묵적으로 이 이론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라쿤님과 이모티비즘 이야기로 헛돌던 것도 이 전제를 모르고 그냥 제 멋대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3-2)

분석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점이 올 수도 있겠죠. 예컨대, 생물학의 철학/물리학의 철학/심리철학에서는 맹렬하게 부상/창발(emergence)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즉, 개체들이 뭉쳤을 때, 그 이전에는 없던 특성/속성이 창발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근본성"을 탐구한다는 분석 형이상학의 야심도 의심에 붙여질 수 있겠죠.
분석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세상의 근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이 환원되지 않는 셈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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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혹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그렇게 의미/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gap)도 없다. 우리가 옳게 생각했다면, 우리가 생각한 것이 바로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생각/의미의) 대상으로 이루졌이기에, 생각과 세상 간의 차이는 없다. 물론 생각은 그 생각이 거짓이기에 세상과 거리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의 관념과 (관념이) 함축한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도 없다. (맥도웰)

댓글을 보고 맥도웰 부분 번역을 한 번 확인해봤는데요, 아래와 같이 옮기는 게 조금 더 적절해보입니다.

우리가 의미할 수 있는 것 혹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과 참이 될 수 있는 것 사이에 존재론적 간극은 없다. 어떤 사람이 참인 생각을 가지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곧 참인 것이다. 세계는 사실인 것들의 총체이고, 사고와 세계 사이의 간극은 없다. 물론 사고는 틀리면 세계와 거리를 두게 되지만 사고라는 바로 그 관념 자체에 세계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다.

번역하기가 좀 난감하긴 합니다. 앞뒤 맥락을 모르니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지만, 이 문단만 놓고 볼 때, 좋게 말하면 오해의 여지가 열려 있는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re is no ontological gap between the sort of thing one can mean, or generally the sort of thing one can think, and the sort of thing that can be the case. When one thinks truly, what one thinks is what is the case. So since the world is everything that is the case ... there is no gap between thought, as such, and the world. Of course thought can be distanced from the world by being false, but there is no distance from the world implicit in the very idea of thought.

우선 "mean"이 여기서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 "one means"이라고 나오면 "mean" 이하를 의도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선 또 앞에 프레게를 깔고 인용하는 부분이니 의미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용법으로 쓴 건가 싶기도 해서 그냥 뒀습니다.

우선 "it is the case that p"라고 쓰면 보통 "p가 참이다" 혹은 "p가 사실이다"를 의미합니다. 교차해서 써도 해석에 큰 무리가 없는 맥락들에서 보통 쓰이지만, 이 맥락에서는 어떻게 번역해야될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it is the case"에 걸리는 대상과 "one can think"에 걸리는 대상이 존재론적으로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truly think 할 수 있는 것은(여기서 "truly think"는 진실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내용이 참이라는 것입니다) 명제인 반면 it is the case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구분일텐데, 뭐 이건 맥도웰의 특수한 입장을 깔아두면 솔루션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 같은 건 바로 "distance"입니다. 이것도 맥도웰이 앞 맥락에서 이 단어를 특정한 방식으로만 쓴다고 하면 문맥을 좀 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 문단만 놓고 보면 이 표현은 비유적일 뿐더러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비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고가 거짓일 때 세계로부터 "멀어진다" 혹은 세계와 "거리를 둔다"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사고가 거짓일 때 사고의 내용과 세계에 성립하는 사실이 discernible 해진다는 것일까요? 왠지 이렇게 읽으면 맥도웰이 하려고 했던 주장인 사고와 세계의 간극이 없다는 주장을 무시하는 얘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PoP 1장을 저는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철학적 입장들에 대한 철저한 반박을 담은 장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들의 스피릿을 까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PoP 2판이 엄청나게 증보됐길래 내용을 봤더니 관련 주제로 쓴 후속논문들을 같이 넣어서 출간했더군요. 일전에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에서 나온 Philosophical Method의 저자가 윌리엄슨이길래 신간냈나 하고 봤더니 예전에 나온 Doing Philosophy 재탕이길래 이건 좀.. 했는데 이번 PoP 증보판 출간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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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도...참...네...맥도웰 어렵네요.

(2)

이 표현의 명확한 뜻을 이제 알았네요 (...) 대충 그 사례/사실/사건이 옳다, 사실이다 정도의 의미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기본적으로 생각/의미(mean)과 대비되는 것이니깐 (참보다는) 사실, 세계 속에 있는 대상을 염두하고 한 번역이었습니다.

(3)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