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주제에 관한 두서 없는 낙서들 (언어, 인지과학 - 추론, 물리학)

(1)

이걸 보면서, 내가 했던 생각은 지식(knowledge)/믿음(belief)의 구분(역할?)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달전 쯤, "지식에 대한 분석"을 번역한 바 있다. 이 글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사용하는 직관에 따른) '지식' 개념과 합치하는 지식 정의를 가지지 못한다. (직관에 따르면, 지식은 운과 무관해야 하는데, 이 무관성을 정의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지식-믿음의 관계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a) '이상적' 지식 (직관에 따른 반-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지식), (b) 정당화된 믿음으로서의 지식 (특정 게티어 사례에서는 운에 따른 것이기에 무너질 수 있지만, 여전히 단순한 '믿음'과 구분되는 정당성/신뢰성?을 가진 믿음) (c) 믿음.

그렇다면 (b) 정당화된 믿음으로서의 지식과 (c)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난 '정당화'(justification)가 가진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한다.

(i) 우리는 정당화된 믿음에 대해서, 남에게 이 정당화를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당화가 상대가 듣기에도 그럴 듯하다면, 상대는 그 믿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정당화'가 없는 믿음은 그럴 수가 없다. 예컨대, 나는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믿는다 해보자. (노하우는 명제 지식과 같은 유형의 정당화가 잘 들어먹지 않는 유형의 지식이다.) 이게 지식일지라도, 나는 이걸 상대방이 믿게 할 방법이 없다.

방법은 여러 간접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내가 직접 피아노를 쳐서 보여주거나, 내가 피아노를 쳐서 받은 상장을 보여주거나 등.

(ii) 동시에 정당화가 없는 믿음은 쉽게 개변(revision)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당화된 믿음은 정당화가 부정되면, 그 자체로 사라지는 듯하다. (예를 들어, 내가 역사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그 역사책의 신빙성이 무너지는 순간, 정당화가 무너지고 나는 더 이상 그걸 참이라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내가 막연하게 빈 방을 무서워하는 믿음은 어떠한가? 나는 내가 왜 이런 믿음을 가졌는지 모른다. (즉, 정당화가 안 되어있다.) 그렇기에 이 믿음을 개변할 방법 역시 찾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AI가 가진 한계는 이것이다. AI가 내놓은 답에 대해서, 우리는 그 답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정당화"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 알 수 없다면, AI가 내놓은 지식을 우리가 믿는 것은, 권위를 믿는 것과 비슷해지는 상황에 봉착한다. (더 나쁜 것은, 인간 전문가는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서 그 정당화가 옳은지 검증이 될 수도 있지만, AI는 이러한 정당화가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면 영원히 인간은 그 정당화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2)

사실 이 글에서, 티모시 윌리엄슨이 실험철학-인지과학에 대해 심드렁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근래 추론(reasoning)에 대한 주제들을 살펴보면서, 내가 찾은 책들은 죄다 철학-인지과학의 결합물들이었다. 길버트 하만(Gilbert Harman), 알빈 골드만(Alvin Goldman)이 대표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골드만/허먼의 생각은 인지과정(cognitive process)/추론(reasoning)으로 정당화를 대체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적절한 추론 과정은 이제 인지과학을 통해서 연구되어야 할 주제인 셈이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철학의 방법론인 논리학 - 연역 추론과 어느정도 작별하는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들은 연역 추론이 여전히 많은 인간의 추론 능력 중 '한정된 영역'이라 여긴 듯하다. (예컨대 귀납 추론이라던가, 확률적 추론, 유비적 추론, 실천적 추론 등등이 존재한다.)
아티클의 말마따라, 이 프로젝트는 지식에 대한, 우리 직관과 부합하는 설명을 제공하는데는 실패했다.
근데 골드만이나 허먼이 이걸 신경 쓸 것 같지 않다. (1)에서 언급했듯, 이들은 이제 정당화된 믿음으로서의 지식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주장할 듯 싶다. (뭐, 현재의 과학도 그 정도의 위치 아닐까?)

그래도 윌리엄슨이 했던 평가 중 하나를 맞았다. 이들이 논리학과 구분하려 했던 (인지과학적) 추론은, 다시 논리학적 도구를 통해 형식 인식론으로 발전하였다. 추론 중에서, 편향 같은 (어떤 의미에서) 사소한 인간적 오류만이 심리학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 편향이 중요한가? 중요할 수도 있다. (도덕 심리학이나 사회적 인지에 있어선 말이다.)

(2-1)

인지과학 - 실험철학에 대해서, 나는 그닥 불만은 없다. 실험적 방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지만, 실험적 데이터는 (엄밀한 평가를 거친 이후) 존중 받아야 할 데이터이고, 그에 부합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 (철학자든 누구든) 학자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안락의자 철학자들이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안락의자 스타일로 다루었다면, 난 굳이 인지과학 문헌을 보진 않았을 것이다. (....)
인지과학 문헌은 일단....나한테 복잡하다. 특히 MIT나 스탠포드에서 시작된 "고전적인" 인지과학 스터디는 신경과학과 컴퓨터 공학과의 연계성이 너무 강하다. (인간의 어떠한 인지 과정은 뇌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고, 어디가 활성화되고. 이걸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가정해보면 대략 이런 기능을 하고 등등등. 이제 나에게 딱히 흥미롭지도 않고, 중요한 문제처럼 여겨지지도 않는다. 흡사 소프트웨어 개발자한테 컴퓨터 하드웨어를 설명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추리, 감정, 사회적 인지에 있어서 이제 인지과학 문헌을 보지 않을 방법이 없다.

(3)

의미론(semantic)은 생각 외로 강한 가정들 아래 성립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고전적 의미론(가능 세계 - 프레게 - 러셀)은 결국 언어의 의미란 명제이고, 이 명제의 참-거짓은 진리대응적으로 본다는 동일한 틀을 공유한다.

하지만 내가 언제나 궁금했던 것은, 인간이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정보 단위가 명제 밖에 없느냐, 는 점이다.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지만, 여전히 내 입장은 동일하다. 이 참에 이에 대한 내 입장을 정식화 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외부 세계는 마음-독립적으로 존재한다.
(2) 우리/인간은 이 외부 세계를 여러 단위의 개념(concepts)으로 분할한다. 이 개념들에는 명제(proposition) 같은 유사-언어학적 단위도 있고, 심적 심상 같은 지각적 퀄리아와 비슷한 단위들도 있다.
(3) 이 단위들 중 무엇도 온전히 이 세상을 재현하진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개념들을 세상을 재구성하려해도, 여기에는 여전히 빠진 정보값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마 다른 종이라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분할할지 모른다. 네이글의 유명한 박쥐처럼, 우리는 초음파를 통한 개념틀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개념틀을 이해하려면, 먼 미래에 나비족처럼 촉수로 대뇌를 연결해 의사소통하는 기계가 나와야 할 것이다.)

(3-1)

난 언어가 적어도 두 가지는 지칭할 수 있다 본다. 명제 같은 유사-언어적 단위. 심적 심상 같은 퀄리아의 단위.

"사과가 빨갛다."는 발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에 해당하는 명제를 생각할 수 있고, 동시에 새빨간 사과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둘이 같은 건가? 아닐 듯하다.

"사과는 언제나 빨갛다."는 발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에 해당하는 명제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심상은? 굳이 설명하자면 "언제나"의 지칭물에 해당하는 심상은 존재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면 의성어와 의태어는? 의태어는 이에 해당하는 명제(의 부분)이 존재할까? 차라리 어떠한 심상을 지칭한다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저 사람은 소크라테스야." 같은 대면지는 어떠한가? 우리는 누가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이게 명제의 형태인가? 아닐 듯하다.

이 아이디어는 어디까지 가는가? 모르겠다. 언어가 지칭하는 게, 명제뿐 아니라 심적 심상이라 생각하면 문제가 있나? 없다면, 이 아이디어가 기존 고전적 의미론을 어느정도까지 해체하는가? 그리고 추론 과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몇몇 경우 시각적으로 추리한다. 예컨대 다이어그램이나 기하학에서 이런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SEP 의미에 대한 이론은 의미론과 의미의 기반에 대한 이론으로 구분된다. 후자가 메타-의미론(metasemantic)의 일부가 된다. (아마 부분적으로 화용론-의미론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

물리학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 빼먹어서 제목 보고 다시 쓴다.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오른다. "우리의 직관과 가장 어긋나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 그것도 물리학이 밝혀내는 현실이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은 의외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나오지만, 이해 못할 상상력은 없다. (예컨대, 빨가면서 파란 사과)

근데, 양자역학은 이런 기묘하고 이상한 것들을 가진 듯하다.

(4-1)

동시에 고체물리학에 대해서도 공상한다. 결국 우리는 개별자들을 모두 고려할 수 없기에, 통계라는 편리한 방법을 통해 개별자 덩어리들을 다룬다. (이제 통계역학이다.) 이 방법론이 고체 같은 단단한 결합물-개체에 적용되는 것이 고체물리학이다.

묘하게 이 생각은 이 구절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와 형이상학적 한계는 구분되어야 할까? 지식에 대한 분석 아티클 초두에서도 둘의 구분이 나온다. 동전 던지기를 해본다 하자. 동전이 손바닥에 떨어지고, 그걸 손바닥으로 누른다면 우리는 동전의 어느 면이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면인가 나왔다는 사실은 안다. 즉, 형이상학적 참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은 못하는 셈이다.

이 경계선은 어디일까?

과학 반-실재론자(중 일부는) 우리의 미시적 단위에 대한 설명이 우리의 경험 영역 밖의 것이므로, 가정 혹은 유명론적이라 생각한다. (즉 인식론적 한계가 곧 형이상학적 한계라 보는 셈이다.)
명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좋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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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개념에 있어서 '정당화' 맥락으로 이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 문제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게 됐네요. 좋은 지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AI가 내놓는 답에 대한 정당화가 그 답의 효용성이나 기능적 우등함에 있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그 답의 도출 과정을 모르는 우리로서는 권위를 믿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이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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