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coon 님께서 번역 연재하고 계시는 티모시 윌리엄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의 다음 부분을 짧게 번역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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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래 심리철학은 행동주의 시절에 비하면 실험철학 *과 훨씬 더 풍성한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뭇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심리철학은 제일 철학이 되지 못했다. '사고의 철학'은 제일 철학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하나의 확립된 세부 분과로조차 자리잡지 못했다. 이를테면 근래 형이상학 발전의 대부분은 딱히 심리철학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은 요즘 연구자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본성을 탐구하고 있다고 여기고는 하며, 그 가운데 인간의 마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과연 형이상학을 하는데 심리철학 내지는 개념에 대한 연구를 고려해야할 필요성이 물리학을 할 때보다 더 클 이유가 있는가? 원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럴 수도 있다. 왜냐면 올바른 교정적 형이상학(revisionary metaphysics)을 받아들이는데에는 통속적인(folk) 형이상학적 믿음이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형이상학적 이론 구축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들, 심리철학은 그런 통속적 믿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심리철학 및 개념에 대한 연구는 이런 제한적인 의미에서조차 근래 주류 형이상학에 딱히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난 수십년을 돌아보자면 분석철학 내에선 그 어떤 철학 분야도 제일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 적이 없다. 이건 학문 일반에서 전문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가 어느 정도는 반영된 것일테지만, (더밋(Dummett)이 말한 것보다는 넓은 의미로) '분석철학' 내에서 철학자들 스스로가 철학에 대해 갖는 생각이 변한 탓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X의 철학'을 한다고 하면 X 그 자체, X의 가장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면모가 연구 대상이 된다고 보는 (넓은 의미에서) 실재론적인 태도가 점점 흔해지고 있다. 곧 'X’라는 말, X라는 개념, X에 대한 우리의 믿음, X에 대한 우리의 앎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X에 대한 철학을 한다고 슬그머니 언어철학, 사고의 철학, 심리철학, 인식론을 하게 되는게 아닌 것이다. 철학의 제재에 대한 이런 관점 하에선 그 어떤 철학 분과도 타 분과에 앞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물론 실제 상황은 방금 속 편하게 말한 것보다는 복잡하다. 방금 얘기한 것만 들으면 언어철학은 그저 일개 철학 분과로만 보일 수도 있다. 인간, 그리고 우주 여기저기에 퍼져있을지도 모를 몇몇 생물종들이 띠는 특수한 현상을 두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하나의 분과 말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는 이렇게 보는 이들도 있었고, 그 자체만 두고 보면 여전히 그렇게 보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언어철학은 분석철학에서 보다 일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논증의 평가라는 역할 말이다. 물론 논증의 연역적 타당성을 판단하는데 굳이 언어철학이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사례들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철학적 논의는 사정이 더 복잡하다. 정말로 타당한 논증, 그리고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교묘한 논증을 판별해내야하는 상황이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런 교묘한 착각은 함축(entailment)과 전제(presupposition) 간의 혼동, 대화(conversational) 내지는 규약 함의(conventional implicature), 은폐된 맥락 교체, 어휘적 내지는 구문적 중의성, 그외에도 여타 언어적 문제 등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될 수 있다. 추상적인 주제를 두고 섬세한 자연 언어를 통해 복잡한 연역 논증을 성공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학문 분야라면 으레 발생하는 문제이고, 그 대표 격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물론 철학이 그외 다른 방법은 쓰질 않는다는 것도, 타 분야에서는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거건 지금이건 철학에선 타 분야보다 이런 식의 논증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연역적 방법론에서 귀추적(abductive) 방법론으로의 전환은 지금 이 맥락에선 별 차이점을 낳지 않는다. 귀추법은 그 강력함, 설명적 힘 및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와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들 요소들은 결국 연역적 귀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무슨 주제를 탐구하느냐와는 상관없이, 현대적 기준에서 분석철학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그 자체로 의미론과 화용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예가 필요하다. 이는 분석적 언어철학이 모든 철학 분야에 남겨준 중대한 유산이라 할만하다.
어쩌면 인지심리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철학적 추론에서의 문제점을 요긴하게 짚어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틀 효과(framing effect)가 철학적 추론에 미치는 부적절한 영향 같은 것 말이다. 몇몇 '실험철학자'들은 우리가 이미 그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일지 모를 사례를 제외하자면) 언어적 방법이 요긴하게 응용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순수한 심리학적 방법이 그만큼의 철학적 유용성을 이미 입증했다고 보는데는 의구심이 든다. 그냥 특정한 자극이 주어지는 순서가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극을 무시할 수도, 그 자극을 이러저러한 순서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심리학이나 심리철학보다는 언어학 및 언어철학이 연역을 점검하는데는 더 도움이 된다. 사고를 언어보다 우선시하는게 방법론적으로 위험하다고 더밋이 지적했던 바는 이런 제한적인 의미에서는 옳았다. 본인이 생각했던 그런 심오하고 영속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연역논증의 평가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언어철학보다도 논리학이 더 유관할 것이다. 물론 철학에는 유려하며 대화적인 문체로 연역을 선보이고자 하는 논증도 있으며, 이런 논증을 평가하는데는 논리학 이론이 썩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현대 분석철학 분야에서 성공적인 연역을 선보이고자 하는 논증은 또박또박 명료하게 제시된다. 형식 논리에 대한 조예가 그 타당성을 판별하는데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듯 언어철학이 철학 일반에 도움을 줄 수 있듯이 논리학 또한 철학을 해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어쩌면 언어철학보다도 더 많이.
최근 철학에서 형식적 도구가 발전한 덕분에 종래엔 논리학 '바깥'에 놓인다고 여겨졌던 철학 분과 또한 논리학의 영향 범위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식론에서는 인식논리 모형 덕분에 정밀하게 서술된 각 상황마다 뭇 인식론적 주장이 갖는 귀결을 보다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따져볼 수 있게 됐다.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렇듯 모형을 구축하는 방법론은 자연과학에서 성공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옛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형이상학의 경우, 대립하는 두 형이상학 이론이 있으면 각각에 구조적 핵심을 제공해주는 대립하는 두 논리 체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양상 형이상학에 관한 유력한 이론이라면 마땅히 양화 양상 논리(quantified modal logic)를 그 구조적 핵심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양상 형이상학의 전부를 꼭 논리학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핵심 요소는 그래야 마땅하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논리학은 형이상학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이 되었다.
철학사는 '철학이란 곧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종 근시안적 대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잘 드러낸다. 철학사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닦아놓은 길을 걷지도, 일상 언어 철학이 닦아놓은 길을 걷지도 않았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자면 심리학이나 물리학의 분과가 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격변이 휘몰아치는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철학은 변화하는 각 흐름마다 남겨둔 유산을 어떻게든 뽑아내 먹었다. 이성의 장난질이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결정해줄지 누가 알겠는가?
역주: 첫 번째 문단에 나온 "실험철학 *"은 "experimental philosophy"를 옮긴 말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experimental psychology'나 'cognitive psychology'의 오기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 뒤에 언급하는 "실험철학자(experimental philosopher)"와는 분명히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