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9)

@Raccoon 님께서 번역 연재하고 계시는 티모시 윌리엄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의 다음 부분을 짧게 번역해봤습니다.

이전 편은 다음 링크를 눌러주세요: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8)" 링크


1980년대 이래 심리철학은 행동주의 시절에 비하면 실험철학 *과 훨씬 더 풍성한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뭇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심리철학은 제일 철학이 되지 못했다. '사고의 철학'은 제일 철학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하나의 확립된 세부 분과로조차 자리잡지 못했다. 이를테면 근래 형이상학 발전의 대부분은 딱히 심리철학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은 요즘 연구자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본성을 탐구하고 있다고 여기고는 하며, 그 가운데 인간의 마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과연 형이상학을 하는데 심리철학 내지는 개념에 대한 연구를 고려해야할 필요성이 물리학을 할 때보다 더 클 이유가 있는가? 원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럴 수도 있다. 왜냐면 올바른 교정적 형이상학(revisionary metaphysics)을 받아들이는데에는 통속적인(folk) 형이상학적 믿음이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형이상학적 이론 구축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들, 심리철학은 그런 통속적 믿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심리철학 및 개념에 대한 연구는 이런 제한적인 의미에서조차 근래 주류 형이상학에 딱히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난 수십년을 돌아보자면 분석철학 내에선 그 어떤 철학 분야도 제일 철학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 적이 없다. 이건 학문 일반에서 전문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가 어느 정도는 반영된 것일테지만, (더밋(Dummett)이 말한 것보다는 넓은 의미로) '분석철학' 내에서 철학자들 스스로가 철학에 대해 갖는 생각이 변한 탓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X의 철학'을 한다고 하면 X 그 자체, X의 가장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면모가 연구 대상이 된다고 보는 (넓은 의미에서) 실재론적인 태도가 점점 흔해지고 있다. 곧 'X’라는 말, X라는 개념, X에 대한 우리의 믿음, X에 대한 우리의 앎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X에 대한 철학을 한다고 슬그머니 언어철학, 사고의 철학, 심리철학, 인식론을 하게 되는게 아닌 것이다. 철학의 제재에 대한 이런 관점 하에선 그 어떤 철학 분과도 타 분과에 앞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물론 실제 상황은 방금 속 편하게 말한 것보다는 복잡하다. 방금 얘기한 것만 들으면 언어철학은 그저 일개 철학 분과로만 보일 수도 있다. 인간, 그리고 우주 여기저기에 퍼져있을지도 모를 몇몇 생물종들이 띠는 특수한 현상을 두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하나의 분과 말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는 이렇게 보는 이들도 있었고, 그 자체만 두고 보면 여전히 그렇게 보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언어철학은 분석철학에서 보다 일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논증의 평가라는 역할 말이다. 물론 논증의 연역적 타당성을 판단하는데 굳이 언어철학이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사례들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철학적 논의는 사정이 더 복잡하다. 정말로 타당한 논증, 그리고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교묘한 논증을 판별해내야하는 상황이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런 교묘한 착각은 함축(entailment)과 전제(presupposition) 간의 혼동, 대화(conversational) 내지는 규약 함의(conventional implicature), 은폐된 맥락 교체, 어휘적 내지는 구문적 중의성, 그외에도 여타 언어적 문제 등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될 수 있다. 추상적인 주제를 두고 섬세한 자연 언어를 통해 복잡한 연역 논증을 성공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학문 분야라면 으레 발생하는 문제이고, 그 대표 격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물론 철학이 그외 다른 방법은 쓰질 않는다는 것도, 타 분야에서는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거건 지금이건 철학에선 타 분야보다 이런 식의 논증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연역적 방법론에서 귀추적(abductive) 방법론으로의 전환은 지금 이 맥락에선 별 차이점을 낳지 않는다. 귀추법은 그 강력함, 설명적 힘 및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와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들 요소들은 결국 연역적 귀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무슨 주제를 탐구하느냐와는 상관없이, 현대적 기준에서 분석철학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그 자체로 의미론과 화용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예가 필요하다. 이는 분석적 언어철학이 모든 철학 분야에 남겨준 중대한 유산이라 할만하다.

어쩌면 인지심리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철학적 추론에서의 문제점을 요긴하게 짚어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틀 효과(framing effect)가 철학적 추론에 미치는 부적절한 영향 같은 것 말이다. 몇몇 '실험철학자'들은 우리가 이미 그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일지 모를 사례를 제외하자면) 언어적 방법이 요긴하게 응용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순수한 심리학적 방법이 그만큼의 철학적 유용성을 이미 입증했다고 보는데는 의구심이 든다. 그냥 특정한 자극이 주어지는 순서가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극을 무시할 수도, 그 자극을 이러저러한 순서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심리학이나 심리철학보다는 언어학 및 언어철학이 연역을 점검하는데는 더 도움이 된다. 사고를 언어보다 우선시하는게 방법론적으로 위험하다고 더밋이 지적했던 바는 이런 제한적인 의미에서는 옳았다. 본인이 생각했던 그런 심오하고 영속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연역논증의 평가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언어철학보다도 논리학이 더 유관할 것이다. 물론 철학에는 유려하며 대화적인 문체로 연역을 선보이고자 하는 논증도 있으며, 이런 논증을 평가하는데는 논리학 이론이 썩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현대 분석철학 분야에서 성공적인 연역을 선보이고자 하는 논증은 또박또박 명료하게 제시된다. 형식 논리에 대한 조예가 그 타당성을 판별하는데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듯 언어철학이 철학 일반에 도움을 줄 수 있듯이 논리학 또한 철학을 해나가는데 도움을 준다. 어쩌면 언어철학보다도 더 많이.

최근 철학에서 형식적 도구가 발전한 덕분에 종래엔 논리학 '바깥'에 놓인다고 여겨졌던 철학 분과 또한 논리학의 영향 범위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식론에서는 인식논리 모형 덕분에 정밀하게 서술된 각 상황마다 뭇 인식론적 주장이 갖는 귀결을 보다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따져볼 수 있게 됐다.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렇듯 모형을 구축하는 방법론은 자연과학에서 성공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옛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형이상학의 경우, 대립하는 두 형이상학 이론이 있으면 각각에 구조적 핵심을 제공해주는 대립하는 두 논리 체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양상 형이상학에 관한 유력한 이론이라면 마땅히 양화 양상 논리(quantified modal logic)를 그 구조적 핵심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양상 형이상학의 전부를 꼭 논리학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핵심 요소는 그래야 마땅하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논리학은 형이상학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이 되었다.

철학사는 '철학이란 곧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종 근시안적 대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잘 드러낸다. 철학사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닦아놓은 길을 걷지도, 일상 언어 철학이 닦아놓은 길을 걷지도 않았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자면 심리학이나 물리학의 분과가 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격변이 휘몰아치는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철학은 변화하는 각 흐름마다 남겨둔 유산을 어떻게든 뽑아내 먹었다. 이성의 장난질이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결정해줄지 누가 알겠는가?


역주: 첫 번째 문단에 나온 "실험철학 *"은 "experimental philosophy"를 옮긴 말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experimental psychology'나 'cognitive psychology'의 오기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 뒤에 언급하는 "실험철학자(experimental philosopher)"와는 분명히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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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시 재미있네요. 그냥 생각나는 정보들을 몇 가지 추가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사실 이 부분은 두 가지 경향을 뭉뚱그려 말하는 듯 합니다. (사고의 철학이 원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i) 하나는 처칠랜드처럼, 철학이 결국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하며, (철학의 용어를 포함해) 일상 언어의 용어들은 보다 정확한 과학(이 증명한) 용어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강고한 자연주의를 주장했던 그룹. (ii) 다른 하나는 좀 더 온건하게, 이제 철학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다 섞어서 심리/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하자 (그리고 우리가 미래다!)라고 주장했던 인지과학이죠.

두 그룹 다, 티모시 윌리엄슨의 말마따라 자기들이 가졌던 야심 그리고 그때 있었던 하이프에 비해 지금은 참 존재감이 미비해 보이는 것이 오묘한 기분이 듭니다. (물론 제가 그 때 살아보진 않아서 하하. 그때 나온 개론서를 보고 느낀 감상입니다.)(특히 아무도 처칠랜드를 언급하지 않네요 하하하하. 처칠랜드 선생님 하하하하.)

(3)

이건 어떤 의미에서, "개념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통한 명확한 정의 제공" (그리고 그를 통한 보다 확장된 "형이상학적 연구")라는 목표가 공회전하던 시점에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 때문이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즉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단, 이 방법론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 우린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 제가 번역했던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도 이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었죠.

(4)

그래서 철학 일반이라고 해야할까요,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선 개념 분석 방법론이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다른 "철학들"(X에 대한 철학으로 등장하는 것들)에서는 이게 오히려 철학의 역할처럼 보이곤 합니다. 제가 번역했던 생물학의 철학이 그렇죠.

(5)

이 부분은 사실 윌리엄슨의 견해가 살짝 갸우뚱하긴 합니다. 형식 인식론(formal epistemology ; 제가 믿음 개변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서 알게 된 분야입니다 하하)과 결정 이론 모두 보다 수학적으로 엄격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맞지만, 그 "수학적 도구"(논리학이라고 하기에는 좀 논리학적이지 않은 부분도 섞여있는 거 같긴한데 아무튼)가 "형이상학"으로 이행하는 경우가 있나...? 싶어서요. 그냥 학자들조차 이 분야의 수학적 도구들은 말 그대로 "도구"라는 측면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아마 유이한 예외가 메레올로지와 양상 이론 아닐까요?)

(6)

50년대 이후, 거대 이론이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거대 이론은 그 후로도 계속 살아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철학사 교과서처럼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서, 사람들이 거대 이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 50-60년대까지는 언어학적 전회에 따른 분석철학의 확립과, 의미론/화용론으로 (형이상학에서 벗어난) 철학적 탐구를 수행했다면, 70-80년대(어쩌면 90년대까지)에는 양상논리와 자연주의 프로젝트(인지과학이든 보다 포괄적인 자연주의든)가 핫했던 듯합니다. 90-00년대가 이러한 거대 이론의 소강 상태였고, 오늘날은 실험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근거부여, 픽션주의 등이 다시 부상하고 있어 보입니다. (의식의 강한 문제와 더불어 현상학을 경유한 도덕 심리학/미학도 돌아오고 있고요.)

물론 그 거대 이론들 사이사이에서는 (특정한 사례에서의) 이론을 주장하는 철학들이 꽤 등장하고, 각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개별 과학의 철학이라던가, 개별 사례에서 시작하는 응용 윤리 등이 그러하죠. (이와 별개로, 예술 철학에서 픽션을 정의한 켄달 월튼의 이론이 다른 분야로 모두 뻗어나가는 픽션주의가 된 것을 보면 이론이란 참...예측할 수 없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철학은 아마 이 두 가지 ([기존의 방식인]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거대 이론 /그리고 그 이론을 개별 현상에 적용하는 것과 개별 사례에 대한 이론/그리고 이 이론을 보다 넓은 유사한 현상에 적용하는 것) 탑-다운, 다운-탑 방식 모두 유용하게 쓰일 듯합니다.

나아가, 시대적 주제들에 대해서도 대중들은 철학이 대답하길 원하고 있죠. 예컨대, 보다 광범위한 비교 철학의 흐름에서 등장한 (i) 아프리카 철학/아메리칸 선주민의 철학 등 기존 동북아/인도/이슬람과 다르게 철학과 흡사한 학문 전통조차 없는 지역의 철학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ii) 환경과 관련된 철학들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비관적인 시대의 흐름에 반응하듯)(심리학적 연구들과 결합해서) (iii) 영성의 철학, 행복의 철학, 희망의 철학 등의 주제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윌리엄슨이 심리학적 방법론이 미심쩍다고 한 것에 비해, 앞으로 심리학이 보다 철학에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특히 점점 철학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응용되길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대답하려면요.)(그리고 분석 대상이 이제 명제/개념의 구성으로 환원되지 않거나 환원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른 탐구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어떤 의미에서 심리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현상적 속성이라던가 행위라던가)
(어떤 의미에선, 오늘날 "인간학"이라는 "두번째" 거대한 종합이 이루어지는 듯한 감상이 있습니다. 대중서로 잘 팔리고 있는 제레미 다이아몬드/유발 하라리가 이를 대표하죠. 보다 전문적인 논의 들어가면, 생물학 - 고고학 - 인류학 - 심리학/인지과학의 거대한 종합으로 인간을 설명하려 하는 듯 합니다.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기반 - 그 위에 씌워진 심리학/인지과학적 성과들 - 이를 검증 대상으로 삼는 혹은 설명의 원천으로 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고고학적/인류학적 데이터들.
그 흐름 속에서 철학의 역할을 미비한 편입니다.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사회생물학에 언젠가 철학이 답해야 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이 문제에 철학이 답해야하는 시점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철학은 어디로 향할까요?
그래도 이 시대를 회고해보면, 가장 재미있는 시대였다고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유의미한 이론가가 나올지는 안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 의미에서 역사가 정해주는 것이기에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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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dala 님, 상세한 논평 감사합니다!

(1)

"사고의 철학"은 "the philosophy of thought"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전편에서 강조된 더밋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전 연재분에 나오다시피 심리철학과는 구별되는 느낌이죠.

(5)

이런 대목이야말로 윌리엄슨이 은근슬쩍 자기 견해를 "잘 부각"시키는 곳인 것 같습니다 :smirk:

(6)

(제가 개인적으로 이 글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이 글 뒷 부분에서 더 자세히 나올 얘기겠습니다만, 20세기 말 - 21세기 초 철학사가 앞으로 어떻게 기록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죠.

데카르트에서 흄에 이르는 시기 철학자들이 소위 '경험론-합리론'이라는 흐름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듯이, (인류가 존속한다는 가정 하에서!) 다음 세기의 걸출한 철학사가는 지금으로서는 미궁처럼 보이는 20세기 말 - 21세기 초 철학계 흐름에서도 일관된 맥락을 포착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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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부분이 더 있었는지 몰랐네요!!! 여하튼 이번 글을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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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역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티모시 윌리엄슨은 나중에 제대로 된 철학사 책을
한 권 써도 재밌을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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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에 대해 제가 한 가지 주석? 해석?이 생긴듯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실험철학과 하단의 실험철학은 동일한 의미로 쓰인듯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티모시 윌리엄슨은 요근래 "실험철학"이라 자임하는 흐름과 이에 선조격이 되는 (아직
자신들을 실험철학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인지과학-도덕심리학 등, 경험적 연구방법을 적극적으로 철학 분과내에 도입한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듯합니다.

아마 이 전통의 첫 시작은 길버트 하만(Gilbert Harman, 1938-2021)인듯합니다. 하만의 기여는 크게 두 가지인데, (i) 인지과학적 '추론의 이론'과 전통적인 논리학을 구분하고, 전자를 구체화시키려고 한 흐름. (ii) 윤리학을 여러 심리학 분야와 엮어 도덕심리학을 구체화시킨 흐름.

하만의 제자 중에서는 스테판 스티치(Stephan Stich, 1943-)가 하만의 두 연구 방향을 모두 계승하면서, 자신의 방법을 "실험철학"이라 구체화시킨듯합니다.

아마 하만이 문화적 다양성에 의거해 도덕 상대주의를 옹호한 바 있는데, 이게 스티치에게 와서는 문화적 다양성에 의한 직관의 다양성으로 확대된듯합니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하만이 주장한 추론 이론과 문화적 다양성을 결합시킨 셈이니깐요.)(이 테제는 실험철학이 기존 안락의자 철학의 방법론인 직관을 공격하는 핵심인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