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은 반드시 추론에 있어 규범적 역할을 하는가? - 하만의 도전

(-) 본 글은 티모시 윌리엄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에서 시작합니다. 윌리엄슨은 이 글에서 추론(reasoning)에 대한 인지심리학적 접근법을 뜨드미지근하게 평가하는 한 편, 논리학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윌리엄슨이 그냥 인지과학이 자기들에 말했던 야심에 비해 훨씬 소박한 결과를 낸 지금 상황을 (반쯤 고소해하면서) 말하는건가 보다 했습니다. 그렇지만 분석철학이 인지과학으로 전환/분화되어가 시점에 있던 학자들, 즉 길버트 허먼(Gilbert Harman)이나 알빈 골드만(Alvin Goldman)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보다보니 여기에는 보다 깊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저희의 성서(?)인 SEP에 관련된 글이 있는 걸 알고, 이렇게 냅다 부분만 번역해왔습니다. SEP의 '논리학의 규범적 지위'(The Normative Status of Logic) 3장입니다.

(재미있게도, 아티클 나머지 부분에는 티모시 윌리엄슨이 논리학의 규범성을 옹호하며 이를 주장[assertion]의 화행[speech acts]과 연결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철학의 영역들이 겹치네요.)

(3) 하만의 도전

명망 있는 역사적 내력과 직관적인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이 추론(reasoning)에 있어서 반드시 규범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테제가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길버트 하만의 비판이 특히 영향력이 있었다. 하만의 회의주의적 도전은 다음과 같은 진단에 기반한다. 논리학이 추론과 특별한 규범적 연관성을 가진다는 깊은 직관은, 어떤 혼란에 근거한다. 우리는 두 가지 매우 다른 영역을 하나로 결합해 생각해버린 것이다. 하나는 연역 논리(deductive logic) 이론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만이 명명하길) "추론의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추론의 이론은 일상적 행위자가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개변(revise)-유지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이론의 목적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심적 행위(판단[judgements]과 추리[inference])을 해야할지, 어떠한 믿음을 수용-포기할지에 대한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추론의 이론의 대상은 추론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심리학적 사건들 혹은 과정"이다. 대조적으로 "연역 논리에서 연구되는 함축(implication)과 논증(arguments)은 [고정된, 비-심리학적인] 명제들 간의 관계를 다룬다." 결과적으로

논리의 원리들은 믿음 개변(belief revision)의 직접적인 규칙이 아니다. 논리의 원리는 믿음(혹은 추론을 구성하는 다른 심적 상태나 행위)에 대한 것이 애당초 아니다. (하만)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아 준다면, 하만이 보기에, 논리와 추론 사이에 결과적으로 생긴 격차가 어떻게 연겨로딜 수 있는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하만의 도전이다.

이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종류의 답변이 있다. 하나는 하만의 회의주의적 도전이 하만 자신이 설정한 문제 구도로 인해 발생한다 본다. 특히, 우리는 논리가 추론에 있어 규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우리 직관의 기원이 연역 논리와 추론의 이론을 구분하지 못한 탓이라는 하만의 설명을 거부할 수 있다. 예컨대, 하만이 논리나 추론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정의해서) 논쟁의 여지가 있게 사용해서, 연역 논리와 추론의 이론 사이의 간격을 지나치게 과장했다 보는 것이다. 믿음 개변에 관한 폭넓은 논리적 접근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믿음 개변 이론[belief revision theories], 비-단조 논리[non-monotonic logic ; 전제에서 결론에 도달하는 관계가 하나(단조)가 아닌 형식 논리], 동적 믿음 논리[dynamic doxastic logic ; 믿음 논리는 믿음에 대한 추론에 사용되는 논리 체계다. 동적 논리는 동적 체계를 기술하기 위한 논리다.] 등) 하만의 회의주의가 보다 복잡한 논리적 도구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길 수 있다. 표준적인 1차 고전 논리와 달리, 몇 가지 복잡한 논리학은 믿음(과 다른 심적 상태에 대한) 명확하게 형식화할 수 있다. 또 몇 가지 논리 형식은 믿음이 단순히 축적되는 것이 아닌 개변되는 상황과 같은 추론의 동적 특성을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에 대한 하만의 답은 이러한 형식화가 논리의 규범적 역할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믿음 개변의 형식적 모델이 논리의 규범성에 대한 철학적 설명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델들은 암묵적으로 논리의 규범적 역할에 대한 가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리의 규범성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정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또 다른 방향에서, 몇 철학자들 (예컨대, [인식론적] 외재주의자들)은 하만의 추론의 이론이 전제하는 인식론적 가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지도 모른다. 하만은 인식론의 목적이 자신이 추론의 이론을 제공하려는 목적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본다. 하만의 "보편적 보수주의(general conservatism)(?)"에 따르면, 핵심적인 인식론적 관념, 예컨대 정당화 같은 것들은 1인칭적 관점에서 접근된다는 것이다. "보편적 보수주의는 사람이 받아드릴 수 있는 방법론적 조언을 제시하는 방법론적 원칙이다."(하만) 이러한 하만의 접근법은, 오늘날의 인식론과 꽤 대조된다. 오늘날의 인식론은 직접적인 인식론적 조언에는 무관심한 반면, 인식론적 정당화의 필요충분조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명을 제시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종류의 답을 상기해보자면, 하만의 회의주의는 부분적으로 특정한 논리 개념과 특정한 인식론적 방법론에 기반하며, 이 두 개념은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두번째 종류의 답변은 (대체로) 연역 논리의 본질과 인식론의 본질에 대한 하만의 가정을 수용하지만, 이 두 영역에 흥미로운 규범적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하만의 도전에 대답하려 한다. 이제부터 나는 이 두번째 답변에 집중하려 한다.

당연히, 연역 논리와 추론의 이론이 구분된다는 주장과 이 둘 사이에 흥미로운 규범적 연결성이 없다는 주장은 다른 것이다. 규범적 연결성을 이론화하려는 첫번째 시도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을 따라가볼 수 있다. 이론적 추론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혹은 지식이 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거짓된 것을 거부함으로서 세상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믿음 상태(doxastic states)는 내용(즉, 명제)를 가지며, 이 내용들은 다른 내용들과 특정한 논리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논리적 관계를 알아채는 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다는 목표을 더 쉽게 달성하게 할 것이며, 이 목표와 연관된 이론적 추론 역시 쉽게 달성될 것이다. 특히, 귀결(consequence)와 일관성(consistency)에 대한 논리적 관념이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만야 내가 참되게 믿는다면, 내 믿음의 참은 이에 해당하는 논리적 귀결에 가닿을 것이다. 역으로, 만약 내 믿음이 거짓을 수반한다면, 믿음은 참이지 않을 것이다. 유사하게, 만약 내가 믿는 (보편적인 혹은 특정한 영역에서의) 명제들의 집합이 비일관적이라면, 나는 세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물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내 믿음 중 하나는 거짓인 셈이다. 하만은 이 모든 것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만의 회의주의는 또한 논리가 추론에 있어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즉, 논리학의 원칙들이 다른 과학들의 원칙은 없는 추론과의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이 문제들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논리와 추론의 규범 사이의 연결에 대한 이 단순한 고찰이, 이 글의 시작에 있던 기본적인 직관으로 우리를 뒤돌아오게 이끌었다. 만약 우리가 비일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우리 믿음의 논리적 귀결을 (최소한 우리가 인지할 수 있을 때) 옹호할 수 없다면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 직관을 두 원칙으로 정의해보자. S는 행위자이고 P는 명제이다.

논리적 함축 원칙(IMP) ; 만약 S의 믿음이 논리적으로 A를 함축한다면, S는 A를 믿어야한다.
논리적 일관성 원칙 (CON) ; S는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인 믿음을 거부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IMP와 CON이 구분된다. IMP는 비일관성을 금지하지도, 심지어 모순된 믿음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그저 모든 믿음이 논리적 귀결에 있어서 닫혀있어야(close) 함을 요구한다. 반면 CON은 내가 믿는 명제의 귀결인 명제를 믿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믿는 명제들의 집합이 일관적인 것을 요구할뿐이다. 하지만, 특정한 가정을 주면, IMP는 CON을 수반한다.

고전 논리의 배경과 다르게, 두 가정을 허용하면 수반 관계가 성립한다. (i) 인지자는 하나의 동일한 명제를 동시에 믿으면서 믿지 않을 수 없다. (ii) 명제를 믿지 않는 것은 그 명제의 부정을 믿는 것에 상응한다. 이제 {A1,.....,An}이 S의 비일관적인 믿음 집합이라 해보자. 고전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A1,....,An-1 ⊨ ~An을 가진다. S의 믿음이 논리적 귀결에 대해 닫혀있기 때문에, S가 ~An을 믿지만 동시에 (ii)에 따라서 An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S는 An을 믿는 동시에 믿지 않는다.
(이 부분은 제가 논리학을 모르기 때문에 정확히 왜 이렇게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잘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1) 반론들

IMP/CON은 논리와 추론의 규범 사이에 있는 불명확한 규범적 연결성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다. 하만은 이러한 답을 고려하여, 그에 대한 반론 역시 제기한다. 우리가 잠정적으로 제시한 원칙에 대한 다음 네 가지 반론은 (대체로) 하만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A) 내가 p, p ⊃ q 그리고 전건긍정식(modus ponens)를 믿는다 해보자. 내가 이러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과 이러한 믿음들의 합이 q를 함축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는 점은 나에게 q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을 규범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

(뒷부분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하하하. 무책임하네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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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Mandala님이 번역한 자료 읽는 맛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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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사합니다 ㅎㅎ 큰 힘이 되네요! 그렇지만 본업이 있어서 ㅋㅋㅋㅋ 한동안은 좀 드물듯합니다.

일단, 첫 문장의 원문은 "the entailment obtains provided we allow the following two assumptions”네요. “entailment”는 “함축”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수반”으로 옮길 경우, 특별한 형이상학적 개념인, supervenience와 혼동될 여지가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이하의 (i)과 (ii)가 가정될 때 IMP로부터 CON으로의 함축이 성립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떤 믿음 체계가 모순되어 있는 것이 허용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허용된 비일관적 믿음 체계 S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 명제 논리는 완전하므로) 귀류법에 의해, S의 임의의 원소(A*라고 합시다)에 대한 부정이 그 나머지 원소들로부터 귀결됩니다. 즉,

S∖{A*}⊨~A*

입니다. 인식 주체의 신념 체계는 S∖{A*}를 포함하므로 (S∖{A*} ⊂ S니까요), IMP에 의해, 인식 주체는 그 귀결인 ~A*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한 바, 인식 주체의 신념 체계에는 A*가 또한 포함됩니다. 두 가정에 따르면 어떠한 인식 주체도 모순을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인, 인식 주체가 비일관적 신념 체계 S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부정되어야 하며, 다음과 같은 연역에 따라 CON이 따라나오는 것입니다:

  1. ~O~𝜑 ↔︎ P𝜑
  2. ~P𝜑
  3. O~𝜑

(다만 저자는 여기에서 ‘의무는 권리를 함축한다’(O𝜑 → P𝜑)가 사용된다고 보았는데, 이 논제는 ‘권리 없음이 의무 없음을 함축한다’를 대우로 갖는 것이어서 왜 이렇게 보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위의 1-3에서 제시했듯] ‘…가 허용되지 않는다’가 ‘…하지 않는 것이 의무이다’와 동치이기에 IMP로부터 CON으로의 함축이 결정적으로 성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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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이 부분은 제가 번역을 하다 간과했네요. 제가 앞선 논리적 implication을 함축으로 번역한지라, entailment는 좀 다르게 해야할 것 같아서 수반은 골랐는데, 수반에 저런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었다는 걸 간과했네요 (..) 여기서 문득 궁금해지는게, 그러면 (i) 그러면 implication은 보통 어떤 역어로 번역하나요? (ii) 여기서 implication과 entailment는 상호 교체가 가능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 것인가요?

(2) 사실 주신 설명이 보다 상세해서 무언가 알듯하지만...논리학 밑바닥에 서식하고 있는 저로서는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 공부를 더 하고 와야할 듯합니다.

"entailment"를 "implication"과 구별해서 종종 '필함'이나 '필반'으로 번역하는 걸 본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스트로슨의 "On Referring"과 관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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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적 용법에서는 둘이 거의 구분되지 않게 쓰여서 큰 문제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논리학 문헌에서는..

(2) 자연 연역의 규칙인 RAA(reductio ad absurdum)를 찾아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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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문장이라 그렇게 표현한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연과 가능 양상자를 의무이다와 허용된다로 번역해 쓰는 경우도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아래의 1-3에서 제가 의무와 허용을 양상 연산자로 사용한 겁니다. 다만 이는 의무가 권리를 함축한다가 아닌, 않을 의무 없다와 권리 있다가 동치임만으로 따라나오는 것이어서 이 논제가 논제와 무관하다고 한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