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9)

(1) 역시 재미있네요. 그냥 생각나는 정보들을 몇 가지 추가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사실 이 부분은 두 가지 경향을 뭉뚱그려 말하는 듯 합니다. (사고의 철학이 원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i) 하나는 처칠랜드처럼, 철학이 결국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하며, (철학의 용어를 포함해) 일상 언어의 용어들은 보다 정확한 과학(이 증명한) 용어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강고한 자연주의를 주장했던 그룹. (ii) 다른 하나는 좀 더 온건하게, 이제 철학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다 섞어서 심리/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하자 (그리고 우리가 미래다!)라고 주장했던 인지과학이죠.

두 그룹 다, 티모시 윌리엄슨의 말마따라 자기들이 가졌던 야심 그리고 그때 있었던 하이프에 비해 지금은 참 존재감이 미비해 보이는 것이 오묘한 기분이 듭니다. (물론 제가 그 때 살아보진 않아서 하하. 그때 나온 개론서를 보고 느낀 감상입니다.)(특히 아무도 처칠랜드를 언급하지 않네요 하하하하. 처칠랜드 선생님 하하하하.)

(3)

이건 어떤 의미에서, "개념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통한 명확한 정의 제공" (그리고 그를 통한 보다 확장된 "형이상학적 연구")라는 목표가 공회전하던 시점에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 때문이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즉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단, 이 방법론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 우린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 제가 번역했던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도 이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었죠.

(4)

그래서 철학 일반이라고 해야할까요,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선 개념 분석 방법론이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다른 "철학들"(X에 대한 철학으로 등장하는 것들)에서는 이게 오히려 철학의 역할처럼 보이곤 합니다. 제가 번역했던 생물학의 철학이 그렇죠.

(5)

이 부분은 사실 윌리엄슨의 견해가 살짝 갸우뚱하긴 합니다. 형식 인식론(formal epistemology ; 제가 믿음 개변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서 알게 된 분야입니다 하하)과 결정 이론 모두 보다 수학적으로 엄격한 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맞지만, 그 "수학적 도구"(논리학이라고 하기에는 좀 논리학적이지 않은 부분도 섞여있는 거 같긴한데 아무튼)가 "형이상학"으로 이행하는 경우가 있나...? 싶어서요. 그냥 학자들조차 이 분야의 수학적 도구들은 말 그대로 "도구"라는 측면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아마 유이한 예외가 메레올로지와 양상 이론 아닐까요?)

(6)

50년대 이후, 거대 이론이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거대 이론은 그 후로도 계속 살아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철학사 교과서처럼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서, 사람들이 거대 이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 50-60년대까지는 언어학적 전회에 따른 분석철학의 확립과, 의미론/화용론으로 (형이상학에서 벗어난) 철학적 탐구를 수행했다면, 70-80년대(어쩌면 90년대까지)에는 양상논리와 자연주의 프로젝트(인지과학이든 보다 포괄적인 자연주의든)가 핫했던 듯합니다. 90-00년대가 이러한 거대 이론의 소강 상태였고, 오늘날은 실험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근거부여, 픽션주의 등이 다시 부상하고 있어 보입니다. (의식의 강한 문제와 더불어 현상학을 경유한 도덕 심리학/미학도 돌아오고 있고요.)

물론 그 거대 이론들 사이사이에서는 (특정한 사례에서의) 이론을 주장하는 철학들이 꽤 등장하고, 각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개별 과학의 철학이라던가, 개별 사례에서 시작하는 응용 윤리 등이 그러하죠. (이와 별개로, 예술 철학에서 픽션을 정의한 켄달 월튼의 이론이 다른 분야로 모두 뻗어나가는 픽션주의가 된 것을 보면 이론이란 참...예측할 수 없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철학은 아마 이 두 가지 ([기존의 방식인]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거대 이론 /그리고 그 이론을 개별 현상에 적용하는 것과 개별 사례에 대한 이론/그리고 이 이론을 보다 넓은 유사한 현상에 적용하는 것) 탑-다운, 다운-탑 방식 모두 유용하게 쓰일 듯합니다.

나아가, 시대적 주제들에 대해서도 대중들은 철학이 대답하길 원하고 있죠. 예컨대, 보다 광범위한 비교 철학의 흐름에서 등장한 (i) 아프리카 철학/아메리칸 선주민의 철학 등 기존 동북아/인도/이슬람과 다르게 철학과 흡사한 학문 전통조차 없는 지역의 철학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ii) 환경과 관련된 철학들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비관적인 시대의 흐름에 반응하듯)(심리학적 연구들과 결합해서) (iii) 영성의 철학, 행복의 철학, 희망의 철학 등의 주제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윌리엄슨이 심리학적 방법론이 미심쩍다고 한 것에 비해, 앞으로 심리학이 보다 철학에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특히 점점 철학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응용되길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대답하려면요.)(그리고 분석 대상이 이제 명제/개념의 구성으로 환원되지 않거나 환원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더더욱 다른 탐구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어떤 의미에서 심리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현상적 속성이라던가 행위라던가)
(어떤 의미에선, 오늘날 "인간학"이라는 "두번째" 거대한 종합이 이루어지는 듯한 감상이 있습니다. 대중서로 잘 팔리고 있는 제레미 다이아몬드/유발 하라리가 이를 대표하죠. 보다 전문적인 논의 들어가면, 생물학 - 고고학 - 인류학 - 심리학/인지과학의 거대한 종합으로 인간을 설명하려 하는 듯 합니다.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기반 - 그 위에 씌워진 심리학/인지과학적 성과들 - 이를 검증 대상으로 삼는 혹은 설명의 원천으로 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고고학적/인류학적 데이터들.
그 흐름 속에서 철학의 역할을 미비한 편입니다.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사회생물학에 언젠가 철학이 답해야 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이 문제에 철학이 답해야하는 시점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철학은 어디로 향할까요?
그래도 이 시대를 회고해보면, 가장 재미있는 시대였다고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기는 유의미한 이론가가 나올지는 안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떤 의미에서 역사가 정해주는 것이기에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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