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지식에 대한 분석 (2017)(완료)

(-) SEP의 "지식에 대한 분석"(The Analysis of Knowledg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대한 번역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번역하다가 내버려뒀는데, 이 기회에 다시 하고 있습니다. 분량이 많다보니 좀 걸릴듯합니다.

(0) 개요

누구든지, 그 사람이 아는 것이 있고 모르는 것이 있다. 이 차이는 정확히 무엇인가? 무언가는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가 틀린 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보다는) 지식이라는 것은 참(truth)인 것을 얻는 방법에 가까워 보인다. 지식에 대한 분석은 "참을 얻는 방법"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이론을 구성해보려는 시도이다.

범위는 좀 더 좁히자면, 지식을 분석하는 것은,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시함으로서, '무언가는 알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
명제적 지식이란, 명제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예컨대, '수잔은 알리샤가 음악가인 것을 안다.'라고 한다면, 그녀는 '알리사가 음악가다.'라는 명제에 대한 지식이 있는 셈이다. 이 명제적 지식은 "대면(acquaintance)" 지식 (예컨대, 수잔이 알리샤를 알게 된 때 얻는 지식, "아 나 알리샤가 누군지 알아.")과 구분되어야 한다. 명제적 지식과 영어 화자가 "지식"이라는 표현을 쓸 때의 다른 지식들 (예컨대, "수잔은 그녀가 어디있는지 안다."와 같은 knowledge-where, "수잔은 자전거 타는 법을 안다."와 같은 knowledge-how)의 관계는 논쟁의 대상이다.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명제적 지식은 영어에서 표준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S는 P를 안다." (여기서 S는 아는 주체를, P는 알게 되는 명제를 가리킨다.) 제시되는 분석은 다음과 같은 진술들로 구성된다. "S는 P를 안다. iff j일 때" (여기서 j는 분석항을 의미하며, 개별적으로 'S가 p를 안다'라고 할 때 필요충분하게 요구되는 조건들의 목록이다.)

(이와 같은 지식에 대한 분석은) 단순히 실제로 존재하는 지식들을 분석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즉,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동치되는 지식 정의로는 부족하다.)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자. 실제로 모든 S가 p를 알 때 j하며/j할때 S가 p를 안다는 것이 성립한다 해도 j가 지식에 대한 분석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 예컨대, j가 없이도 성립하는 지식의 경우가 '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역 역시 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지식에 대한 분석은 최소한 경헙 독립적 참(논리적 참, necessary truth)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사고 실험을 통한 가정들은 다양한 분석항에서 적절한 테스트 케이스를 제공한다.

지식과 j를 연결하는 몇 가지 필요 조건들은, 지식에 대한 분석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여기서 무엇이 정확히 더 필요한지는 논쟁의 대상이겠지만 말이다. 몇 이론가들에 따르면, 지식에 대한 분석은 문자 그대로 지식의 구성 요소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마치 화학자들이 대상을 분석해서, 그것을 이루는 화학적 구성물들을 알 듯이 말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지식을 분석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S가 p를 안다고 할 때, S/p와 관련되어 (이 질문을 충족하는) 조건들이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지식에 대한 분석이 순전히 개념적이라 생각한다. 즉, 지식을 분석하는 것은 지식의 개념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그려내는 것이다. 이 접근법 중 하나는, 지식 개념이 말 그대로, 보다 근본적인 개념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있다 생각한다. 불 연산자(Boolean operators, and/or 같은 논리 연산자)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분석은 외연적 정확성을 주제로 삼을 뿐 아니라, 지식이나 다른 인식론적 개념들의 인지적 재현(cognitive representation)에 대한 사실들 역시 주제로 삼는다.
현실에서는, 많은 인식론 학자들은 지식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면서 이러한 메타-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다. 제시된 분석과 거기에 나오는 반례들은 때로 주장이 형이상학을 목표로 하는지, 아니면 개념을 목표로 하는지 언급하지 않은 채 제안된다. 많은 경우, 이러한 특정성의 부족이 합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분석이 최소한 모든 형이상학적 가능 세계에서 외연적으로 옳아야 한다 여기는데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겠지만, 많은 이론가들은 이러한 용어들을 방어하거나 논박한다.

지식에 대한 분석은 인식론 학자들에게 20세기 후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어떠한 분석도 널리 수용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몇 인식론 학자들은 지식이 분석될 수 있는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거부한다.

(1)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서의 지식

지식에 대한 분석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구성되었다. 이에 따르면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다.

(i) 지식에 대한 삼단항 분석
S는 p를 안다 iff a. 정당화된 b. 참인 c. 믿음이다. (JTB 조건)

지식에 대한 분석을 다루는 20세기 문헌들은, 이 JTB를 시작점으로 삼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분석이 철학의 역사 동안 널리 수용되었다 가정하는 것은 편리한 소설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JTB 분석은 20세기 초반, 이에 대한 비판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정교화되었다. JTB 이론에 반대하는 영향력 있는 20세기 이론들을 살펴보기 전, 간략히 지식의 세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1-1) 참 조건
'참'이 아닌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 압도적인 다수의 의견이다. 예컨대,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도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모른다. 누군가가 알 수 있는 것은 참인 것뿐인 셈이다.

비록 몇 학자들은 '알다'라는 동사가 강하게 확신했으나 틀린 것으로 판명된 명제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고 지적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난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이길걸 알아.") Hazlett은 이 정보에 따라서,알다(know)가 사실동사(factive verb, 술어부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동사. know 외에도 discover, realize 등이 있다.)가 아니라 주장한다. 이 분석은 굉장히 논쟁적이다. 이 소수 의견에 대해, 대다수의 학자들은 예시의 표현이 과장일뿐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안다는 건, 강하게 믿는다는 뜻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참이다."라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이 참이라는 점을 알거나 증명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즉) 모든 참이 "확립된" 참은 아닌 것이다. 예컨대, 동전을 던져서 손등으로 받아서 아직 안 열였다고 해보자. 이 경우, 동전이 앞인지 뒤인지, 그 참은 정해져있다. 참은 인식론적인 것에 반대되어,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참은 대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참인 것만이 알 수 있다."할 때, 우리는 아직 "어떻게 모두가 그 참에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다른 조건들이 여기에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식은 참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사실에 대해 특정한 종류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2) 믿음 조건

믿음 조건은 참 조건에 비해 살짝 더 논쟁적일 뿐이다. 믿음 조건의 기반이 되는 일반적인 생각은, 누군가가 믿는 것만이 누군가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믿지 못한다면, 무언가를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JTB 분석에서 "믿음"이란 양자택일적 믿음 (full belief ; 믿거나 믿지 않거나, 양자택일적 믿음. 이와 대조되어 다양한 정도의 믿음/확신을 가지는 것으로 partial belief가 있다) 혹은 자명한 믿음(outright belief ; 믿지 않는다 생각하기도 어려운 믿음. 예컨대, 내가 지금 타이핑을 치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한) 보다 약화된 해석으로, 누군가는 "그게 아마 참이라 믿을만한 꽤 강한 자신이 있을 떼", 믿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예컨대, 누군가는 사소하지 않게 클린턴이 선거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선거를 이길거라 생각한다면, 이걸 "클린턴이 이길거야."라고 믿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명함 믿음은 이보다 강하다. p를 자명하게 믿는다 할 때, p에 대한 꽤 높은 확신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는 그에 따라 행동하거나(commitment) 그렇다 여기는 것(being sure)에 가깝다.

비록 처음에는 p를 안다는 것은 p를 믿는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명확해 보일지라도, 몇 학자들은 '믿음이 없는 지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월터의 사례를 보자. 월터가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집이 불태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월터는 "난 그걸 믿을 수 없어."라고 말했다. 믿음 조건에 대한 비판자들은 월터가 그의 집이 불타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발언 그대로) 그가 믿지 않는다 여길 것이다. 이에 대한 표준적인 답변은 월터의 믿지 않는다는 선언/맹세는 문자 그대로 참이 아니다. 월터가 "난 그걸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할 때 원한 것은, 그의 집이 불태버렸다는 것을 정말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본 상황과 (심리적으로) 타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가 정말로 믿지 않았다면, 몇 가지 그가 뒤따라서 한 행동(예컨대, 보험 회사에 전화하는 것 등)은 기이한 것이 된다.

보다 심각한 반례는 Colin Radford에 의해 제시되었다. 알버트가 영국사에 대한 퀴즈쇼에 나갔다 해보자. 거기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언제 죽었는가?"에 대해 질문에 대해, 알버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정답을 맞췄다. 나아가, 그는 그가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서도 정답을 맞췄다. 이제 첫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춰보자.

(i) 엘리자베스는 1603년에 죽었다.

Radford는 이 예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주장을 했다.

(a) 알버트는 (i)를 믿지 않는다. / (b) 알버트는 (i)를 안다.

이 사례에 대한 Radford의 직관은 특이해보이지 않는다. Myer-Schutz/Schwitzgebe은 많은 화자들이 레드포드가 제안한 방식대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증거를 보았다. 레드포드는 (a)에 근거해서, 알버트가 질문의 답을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답을 신뢰하지 않았는데, 그걸 단지 찍는 것(guess)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b)에 근거해서, 레드포드는 알버트의 답이 단순히 재수 좋았던 찍기가 아니라 주장한다. 그가 대부분의 질문을 맞췄다는사실은, 그가 맞춘 역사적 사실들이 기실 그가 배웠던 것이여 잊어먹은 것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레드포드는 (a)와 (b)가 참이라 생각하기에, 믿음이 지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a)나 (b)가 부정될 수 있다. 혹자는 (a)를 부정하면서, 알버트가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더라도, 암묵적인 믿음(tacit belief)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걸 알버트 본인은 지식이라 생각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방식은 (b)를 부정하며, 알버트가 답을 맞춘 것이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버트 자신의 태도(subjective position)를 고려했을 때, 알버트는 (i)라는 믿음에 대한 정당화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당화는 다음 파트의 주제다.

(1 -3) 정당화 조건

왜 정당화 조건이 반드시 필요한가? 왜 지식이 단순히 참된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표준적인 답은, 지식을 참된 믿음이라 하는 것이 정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때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참이라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동전을 던졌다 가정해보자. 그리고 윌리엄은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자신감이 가지고 뒷면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동전이 뒷면으로 나온다면, 윌리엄의 믿음은 참이다. 하지만 운 좋게 맞춘 것은 지식이 아니다. 윌리엄이 (그것을) 알았다고 하려면, 그의 믿음이 반드시 인식론적 관점에서, 적절하거나 적당해야 한다. 즉,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정당화 조건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이론을 구성하였다. 그는 "참된 의견"이 지식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으로 불충분하다 말한다. 예컨대, 변호사가 궤변을 통해 판사를 "참이라 드러난 믿음"으로 설득한다 해도, 이 믿음은 지식이 되기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보기 어렵다.

(1-3-1) 정당화의 요건 ; 외재주의와 내재주의
인식론 학자들 중에는, 무엇이 이 "정당화 요건"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큰 이견이 존재한다. (정당황 대한) 내재주의는 믿음에 대한 정당화가 전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인지자의 내적 상태에 달려있다는 주장이다. 내재주의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하나는 인지자가 직접적/혹은 반성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만이 내재적이라는 "접근 내재주의(access internalism)"과 인지자의 고유한(intrinsic) 상태만이 내재적이라는 "상태 내재주의(state internalism)"이 있다.

Conee/Feldmen은 내재주의 관점의 예시다. 그들은" S의 믿음인 p가 정당화된다 iff p를 믿는 것이 S가 가진 증거들에 가장 적합하기 갖는 태도이며, S가 가진 증거들은 오직 S의 내적 심적 상태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Conee/Feldmen은 이를 증거주의(evidentalism)라 부르며, 정당화는 오로지 인지자의 증거에만 달려있는 것이라 본다. 증거란 인지자가 가진 내적인 것이라는 가정하기에, 증거주의는 일종의 내재주의라 볼 수 있다.

반대로 외재주의는 인지자 외부의 것을 통해서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본다. 예컨대 절차 신빙주의자(process reliablitst)들은,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하는 인지적 절차에 의해 정당화된 믿음이 형성된다 본다. 우리는 (6-1)를 통해 신빙주의적 접근이 어떻게 지식을 분석하는지 볼 것이다.

(1-3-2) 정당화의 종류

혹자는 두 가지 다른 의미의 정당화를 구분할지도 모른다. 하나는 명제적 정당화이며, 다른 하나는 신념적 정당화이다. 이 둘은 외재주의-내재주의에 비교해서, 이 두 정당화는 해소되어야 할 대립이 아니다. 그저 두 가지 구분되는 종류의 정당화일뿐이다. 명제적 정당화(Propositional justification)은 인지자가 주어진 명제를 충분히 믿을 이유가 있는지를 정당화의 조건으로 고려한다. 반면 신념적 정당화(doxastic justification)은 주어진 믿음이 적절했는지를 정당화의 조건으로 고려한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설명은, 명제적 정당화가 더 근본적이며, 신념적 정당화는 인지자의 믿음이 적절한 반응인지 혹은 자신이 가진 명제적 정당화이 기반했는지의 문제이다.

명제적 정당화와 신념적 정당화의 정확한 관계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두 개념이 서로 구분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잉그리드는 이웃집이 위험하다는 뛰어난 증거들을 무시했지만, 검은 고양이가 이웃집을 돌아다니는 것을 본 것을 기반으로 이웃집이 위험하다고 미신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미신에 의해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적절히 형성된 믿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잉그리드의 믿음은 신념적 정당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 스스로 그걸 믿을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기에, 그녀는 "이웃집이 위험하다."는 것에 대한 명제적 정당화를 가지고 있다.

지식이란 특히 성공적인 종류의 믿음이란 점에서, 신념적 정당화가 지식과 밀접한 관련되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JTB 이론은 전형적으로 신념적 정당화를 사용한다. (하지만 Lowy 1978 의 예외도 있다.)

(2) 가벼운 지식(Lightweight knowledge)

몇 학자들은, '지식'이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주장하며, 모든 '지식'이 저 세 가지 항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몇은 지금까지 논의한 강한 지식과 반대되는 '참인 믿음'만을 요구하는 '약한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음 같은 일상적 사례에 기반을 둔다. 우리가 '누군가가 무엇을 안다'는 것을 물을 때, 때론 그 지식이 '정당화된 믿음'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그것이 '참인 믿음'인지만 알고 싶을 따름이다. 예컨대, Hawthorne이 지적하듯, 누가 시험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묻는다고 치면, 여기에 대한 답은 비엔나이지만 이 문제의 출제자는 어떻게 서울이라는 답이 정당화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할 것이다
유사하게, 누군가가 외제니에게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외제니에서 그 사실을 '아냐고' 묻는다면, "예"라는 대답은 단순히 너가 파티를 준비한다는 외제니의 믿음에 근거할 수도 있다.

혹자는 참된 믿음만을 요구하는, '가벼운 지식'이 있다 허용할 수도 있다. 다른 가능성은, 직관적인 문장들이 말 그대로 참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론가들은 "외제니는 너가 파티를 기획하는 것을 안다." 혹은 "학생들은 비엔나가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것을 안다."라는 문장이 그 자체로 참이 아니라, 부정확 이야기나 과장법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인식론 학자들 중에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은 "가벼운 지식"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대부분은 더 강한 의미의 지식 역시 존재하며, 지식에 대한 이론화의 목적은 이 강한 의미의 지식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설사 가벼운 지식이 있더라도, 우리는 강한 의미의 지식에 집중할 것이다.

(3) 게티어 문제

소수의 인식론 학자들만이 JTB가 지식의 분석으로 적절하다 수용한다. 비록 각 조건들이 지식을 위한 필요 조건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 조건이 성립한다 보지 않는다. 여전히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면서도 지식이 아닌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아래는 직접 인용문과 사례에 대한 생략과 요약이 있습니다.]

게티어는 1963년 논문에서, 정당화된 틀린 믿음에서 추론된 참인 믿음의 두 경우를 보여준다. 그는 직관에 따라, 이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운에 의해 참이 되었다 말한다. 그의 이름을 따서 이러한 유형의 문제를 "게티어 사례"라 하며, 이 문제에서 제기된 해결해야 될 인식론적 문제를 "게티어 문제"라 한다. [본 글에서는 게티어 사례와 게티어 문제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번역했습니다.]

상기해보자면, 지식에서 정당화 요건이 요청되는 이유는 '인식론적 운'. 즉 찍기로 맞은 것을 지식에서 제외하기 위함이였다. 게티어 문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일지라도, 이 '인식론적 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을 보인다.

[통상 게티어 문제는 '옳은 방식으로 정당화가 된 믿음'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지만, '우연의 일치로' 참으로 바뀌는 경우로 예시화 된다.예컨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보았다고 해보자. 알고보니 그렇게 본 오아시스는 신기루였지만, 실제로 본 곳에 가보지 운이 좋아서 '실제 오아시스'가 있는 경우다.]

JTB 조건이 맞다고 생각하는 인식론 학자들이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게티어 문제의 사례가 정당화된 믿음에 해당하지 않도록, 정당화 요건을 강화하는 것이다. Roderick Chisholm이 이 방향으로 간다. 우리는 (7)에서 이를 볼 것이다. 다른 전략은 JTB 조건에 네번째 조건을 더한, JTB + X를 지식의 정의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경우들을 살펴보자.

(4) 게티어 + X ; 1. 거짓 부명제 제거

JTB + X의 첫번째 접근은 "(d) 인지자의 믿음이 거짓에서 추론되지 않았다."를 추가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게티어 문제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 정당화된 '틀린 믿음'에 추론된다는 점에서, 이 접근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짓 부명제 제거"라는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지 않다. 모든 게티어 문제가 '틀린 믿음'에 기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조건 (d)를 만족시키면서도, 지식이 아닌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유사 게티어 문제를 살펴보자.

[사례는 적당히 생략/요약해서 번역했습니다.]

인지자가 공원에서 개를 보았다고 해보자. 알고보니, 그 개는 일본에서 새로 만든 로봇 개로서, 감각 지각만으로는 실제 개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인지자는 이 정보를 전혀 모른다.) 이 상황에서 '공원에 개가 있다.'라는 명제는 당연히 거짓이다. 하지만 인지자의 시각에서 벗어난 공원의 한 지점에서, 실제 개가 있다 해보자. 이 가정을 추가할 경우, '공원에 개가 있다.'는 명제는 참이다. [환각이 아닌 통상적인 감각지각에 의한 정당화는, 대부분의 인식론 학자들이 올바른 정당화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믿음은 정당화된 것이라 여겨도 문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거짓 부명제에서 추론된 것이 아닌, 시각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당화된 셈이다.] 그럼에도 게티어 문제처럼, 이 사례에서 지식과는 다르게, 믿음이 참이 되는 조건이 운에 달린 듯하다.

이와 유사한 사례인 가짜 헛간 사례를 살펴보자. 시골길에 헛간과 구별되지 않는 헛간 간판을 세워놓았다고 해보자. (극사실주의 회화를 생각해보자.) 다른 방향에서 본다면, 이들 간판이 가짜라는 것을 알테지만, 이 길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람은 이게 헛간이라 여길 수 밖에 없다. 여길 지나가는 인지자는 당연히 이 헛간을 통상적인 감각 지각으로 정당화할 것이다. (그렇지만 틀렸다.) 허나 우연치 않게 유일한 실제 헛간을 보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도, 그의 믿음은 정당화이고 참이다. 하지만 (가짜 헛간과 진짜 헛간의 구별에는 사실상 실패했으므로) 참은 운의 결과로 보인다. 헨리의 믿음은 여전히 거짓 부명제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게티어 + X ; 2. 양상 논리적 접근
[경고 ; 역자가 양상 논리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서 번역의 자신이 없네요.]

(5-1) 세심함 조건 (Sensitivity)

또 다른 네번째 조건의 후보는 세심함이다. 세심함은 반사실적 관계다.

(i) 세심함
S가 p를 믿는 것이 세심하다 iff p가 거짓일 경우, S가 p를 믿지 않을 것이다.

세심한 조건은 Robert Nozick에 의해 옹호되었다. 반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루이스 의미론(Lewisian semantics)을 따르면, 세심한 조건은 -p인 유사한 가능 세계(nearest possible worlds)에서 인지자가 p를 믿지 않을 것이라와 동치이다.

이 조건을 추가하는 동기 중 하나는, 지식이 단지 참인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능성 중에서 참인 것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는 직관 때문이다. 이 접근법은 몇 게티어 문제에서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좋은 해법처럼 보인다. 앞서 본 오아시스 게티어 문제를 보자. 물이 있다는 인지자의 믿음은 세심함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오아시스 게티어 문제는 지식이 될 수 없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의 문제일 뿐이다.) 말이 없더라도, 인지자는 '신기루'는 여전하기에 물이 있다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단에 제시된 헛간의 사례는 저조차 이해하기가 쉽지 않네요.]

하지만 세심함 조건이 게티어 문제 전반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미심쩍다. 세심한 조건이 해결할 수 있는 게티어 문제는, 믿어지는 명제가 거짓이어도 인지자가 여전히 믿는 경우뿐이다. 하지만 크립키가 지적하듯, 모든 게티어 문제가 이렇지는 않다.
위에서 본 가짜 헛간의 사례로 다시 가보자. 헨리가 특정한 곳에 헛간이 있었다고 보았고, 그래서 헛간이 거기에 있었다 믿는다 해보자. 세심함 조건은 거기에 실제 헛간이 (과거에) 없어도, 헨리가 헛간이 있다 믿을 경우에만 이 믿음이 지식이 아니라 말한다. 하지만 이 반사실문은 가짜 헛간 사례가 어떻게 가정되느냐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 예컨대, 헨리가 헛간이 있다고 추정한 곳이, 헛간 모양 간판을 설치하기 어려운 곳일 경우 이는 거짓일 것이다.

크립키는 다른 예시를 제시한다. 헛간 간판이 항상 녹색인데 반해, 실제 헛간은 빨강이라 가정해보자. 그러면 헨리가 "빨강 헛간"을 보았다는 믿음은 세심함 조건을 충족시키지만, 헨리가 "헛간"을 보았다는 믿음은 그렇지 않다. 직관적으로, 전자의 믿음도 후자처럼 지식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해 보인다는 점에서, 세심한 조건 역시 게티어 문제로 인해 발생한 직관적인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해결 가능할 뿐이다.

많은 인식론 학자들은 오늘날 지식에 세심함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한다. 주된 동기는 만약 이를 수용할 경우, "끔찍한 결합(abominable conjunctions)"이라는 수용하기 어려운 가정까지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 지식이 거짓이라는 회의주의를 가정해보자. 일반적 지식이란 일반적인 인지자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많은 부분을 안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잘 보고 손을 완벽히 사용하는 조지는 자기가 손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이는 지식에 대한 세심함 조건을 충족시킨다. 만약 조지가 (최근에 잘려나갔든 해서) 실제로 손이 없다면, 그는 자신이 손이 있다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회의주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여기서 조지는 손이 없지만, 데카르트 악마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손을 가지고 있다 믿게 되었다. 만약 조지가 이런 가정 안에 있다면, 그는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고 잘못되게 믿고 있을 것이다. 설사 세심함 조건을 가정하더라도, 조지는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 셈이다.

비록 두 가지 주장 (일반적인 지식이 지식이라는 주장과 회의주의 시나리오를 부정하는 지식)이 각기 직관적으로 옳지만, 이 둘을 동시에 믿는 것은 직관적으로 문제적이다. 이 결합을 DeRose의 용어를 따라 "끔찍하다"고 한다. "조지는 자신이 손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데카르트 악마에게 홀린 손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지식에 대한 세심함 조건을 일반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비-회의주의적 주장과 결합시킬 경우, 이는 끔찍한 결합을 가정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식론 학자들은 이 논증이 세심함 조건을 부정할 타당한 근거가 된다 여긴다. 하지만 Ichikawa는 끔찍한 결합을 피할 수 있는 세심함 조건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5-2) 안전성 조건 (Safety)

비록 소수의 인식론 학자들만이 지식에 대한 세심함 조건을 옹호하지만, 지식이 인지자로 하여금 명제에 관한 특정한 양상 관계를 요구한다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인기 있다. 라는 1999년 논문에서, Ernest Sosa는 안정성 조건을 제시하며, 세심함 조건이 했었어야 했던 역할을 대체시킨다. 소사는 안전성을 세심함의 반사실적 대우문으로 제시한다.

(i) 세심함
만약 p가 거짓이라면, S는 p를 믿지 않을 것이다.
(ii) 안전성
만약 S가 p를 믿는다면, p를 거짓이 아닐 것이다.

비록 실질 조건문(material conditional)에서 대우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Sosa는 반사실문에서는 타당하지 않다 설명하며, 그렇기에 세심함 조건과 안전성 조건이 다르다 말한다. Sosa에 따르면, 안전한 믿음이 세심하지 않은 경우는 특정한 종류의 회의주의 가정에 대한 믿음을 얻을 수 없을 때이다. (앞서 본) 조지가 데카르트 악마의 희생자가 될 위험이 절대 없다고 해보자. (왜냐하면 그 세계에는 데카르트 악마가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이 그러한 희생양이 아니라는 조지의 믿음은 안전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 조건은 세심하지 않다. 우리는 조지가 데카르트 악마의 희생양이 아니라고 규정했을지라도, 조지가 이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안전성은 (세심함처럼)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지식의 외재주의적 조건이다. 또한 상태라는 측면에서도 외재주의적이다. 왜냐하면 참과 연관된 반사실적 조건이 인지자 외부의 특성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지자가 어떠한 가능 세계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므로 외재주의적이다.)

안전성을 이러한 반사실문 용어들로 정의하는 것은, 반사실적 조건문의 의미론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David Lewis/Robert Stanlnaker의 반사실문에 이론을 (강한 중심 조건 strong centering condition을 포함해) 믿는다면, 모든 참인 믿음은 안전성에 대한 반사실적 분석에 의해 안전할 것이다. Sosa는 이보다 강한 주장을 하기 위해 연관된 반사실문을 이용한다. 이는 대략 "모든 근접한" 세계에서 S가 p를 믿는다면, p는 거짓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논쟁적인 반사실문에 의존하는 것보단, 양상적 용어로 이 안전성 조건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Sosa도 때로 취하는 전략이다.)

(i) 안전성
S가 p를 믿는 모든 근접한 세계에서, p는 거짓이 아니다.

JTB+안전성 조건이 지식에 대한 분석으로 적절한지 평가하는 일은 어려운데, "근접한"이라 적힌 조건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반례들의 지위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도 않다. 예컨대, Juan Comesana는 지식에 대한 안전성 조건을 비판하기 위해 다음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할로윈 파티의 주최자는 주디를 고용해 파티의 손님들을 안내하도록 했다. 주디의 지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정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이클을 보았을 때, 파티는 다른 장소로 옮길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주최자는 마이클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해보자. 하지만 초대된 손님 중 하나가 파티에 굉장히 리얼한 마이클을 닮은 분장을 하고 오려 했다가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이렇게 분장하려했던) 손님의 믿음은 파티가 어디에서 열리는지에 대한 지식이 주디의 증언에 기반해 참이 될 것이다. 하지만 Comesana는 이 지식을 쉽게 거짓이 된다 말한다. (만약 그가 옷에 관해 살짝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그는 거짓말을 들었을 것이다.)
Comesa는 이를 지식의 안정성 조건에 대한 반례로 제시한다. 하지만 주어진 회의주의 시나리오는 안전성 조건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록 그 시나리오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근접한 세계이지만) 안전성 조건을 부정할만큼 충분히 가깝지 않다고 주장할 여지를 남겨놓는다. 만약 그들이 안전성 조건을 명확하게 평가하기 원한다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하는지에 관한 개념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하지만 안전성 조건을 명료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지식에 대한 분석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안전성을 설명하기 위한 유사성이 지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설된다면, 지식에 대한 분석을 안전성으로 하는 것은 일종의 순환이다. 예컨대, 이것이 티모시 윌리엄슨이 안전성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Goldman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경우, 지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안전성을 얻을 것인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몇 사례를 제외하기 위해 안전성이 참을 수반한다는 원칙을 사용하겠지만, 이는 흥미로운 부분이 아니다. [역자 임의 후략]"

안전성은 오직 지식과의 연관성에서 이해될 수 있으므로, 안전성은 지식에 대한 분석에 활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윌리엄슨의 의도는 우리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윌리엄슨은 지식에 대한 분석 자체를 거부한다. 물론 이것은 안전성이 지식에 대한 필요 조건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안전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5-3) 연관된 다른 대안들

지식에 양상 조건을 도입한 세번째 접근법은, 인지자가 p를 안다는 것은, 인지자가 p에 대한 연관된 다른 대안들을 모두 제외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한다. 이 접근법의 동기는 인지자가 p를 안다는 것은, p에 대한 경쟁하는 다른 가설들을 제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다음 같은 예를 생각해보자. 애플이 만든 아이폰의 여러 모델이 가지는 차이를 생각해보자. 시각 정보를 통해 어떤 핸드폰이 6s 모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인지자는 아이폰 6s와 7의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핸드폰이 새로운 모델일 가능성이 다른 대안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핸드폰이 아이폰 6s라는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가능성 중 (연관된 다른 대안으로 여기지지 않아) 제외되지 않은 것도 있어 보인다. 예컨대, 핸드폰이 애당초 아이폰이 아닌 중국제 모방품이라던가, 애당초 핸드폰 같은 것은 없었고 우리가 본 것은 데카르트 악마가 만든 환영이라던가. 이러한 사례나 다른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연관된 다른 대안이라는 것은 연관이 없는 것들보다 '실제로 그런 것'과 닮아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옳아 보인다. 그렇다면, 연관된 다른 대안 접근이나 안전성 접근은 그에 대한 평가나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굉장히 흡사한다. (따라서) 안전성 접근에서처럼, 다른 대안 접근 역시도 어느 가능성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연관되었다"(고 여길만큼 흡사한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6) 게티어의 해체 ; 정당화 요건의 제거

우리가 보았듯,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 정당화 조건을 포함시키는 동기 중 하나는, 운 좋게 맞춘 일이 지식으로 간주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게티어 문제는 정당화 요건을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는 모든 인식론적으로 문제가 되는 운의 경우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몇 인식론 학자들은 정당화 요건을 지식에 포함시키는 것이 잘못되었다 제안한다. (따라서) '참인 믿음'에 (정당화 대신) 다른 조건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지만, 그 후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Kornblith가 몇 안 되는 예외다.

(6-1) 지식에 대한 신빙 이론(realiablisy theory)

이러한 후보 중 하나는 신빙성(reliability)이다. 운 좋게 맞춘 일이 문제가 되는 지점 중 하나는, 말 그대로 그게 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추측들은 그들이 '참으로 밝혀져야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어떠한 형태의 지식 신빙론은. 그 추측들이 (정당화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신빙성이 없기에 지식이 될 수 없는 믿음이라 여긴다. 지식에 대한 신빙 이론은 이러한 아이디어들 지식에 대한 '신빙성 조건'으로 추가한다. 이를 정식화 하며 다음과 같다.

(i) 단순 지식 신빙 이론
S가 P를 안다 iff c.p가 참이며 b. S가 p를 믿으며 a. S가 가지는 p에 대한 믿음은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cognitive process)를 통해 산출되었다.

단순 지식 신빙론은 전통적인 삼단항의 정당화 요건을, 신빙성 요건으로 대체한다. 우리가 보았듯, 신빙론은 믿음에 대한 정당화가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의 결과와 동일하다 여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단순 지식 신빙론과 고전적인 JTB 이론은 동일하다. Goldman은 정당화에 대한 신빙 이론을 여러 차례 옹호하였다.

[아래 문단은 직접 인용문을 번역하지 않고 요약-번역하였습니다.]

Dretske는 신빙론을 옹호할 만한 동기 하나를 제시한다. (신빙론이 주장하듯) 믿을만한 인지 과정이 정보를 산출한다면, 인간 뿐 아니라, 비 인간 동물도 지식을 가진다 말할 수 있다. 개구리, 쥐나 개가 정당화/정당화되지 않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기묘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동물조차 '알 수 있는 인지자'의 범주로 놓으려면, 전통적인 JTB 접근법을 버리고, 단순 신빙론 같은 이론을 따라야할지도 모른다.

(6-2) 지식에 대한 인과 이론(causal theory)

신빙론과 비슷한 정신을 가진 또 다른 입장은 JTB 이론의 정당화 조건을 '믿음'과 '믿어지는 사실'(fact believed) 간의 인과적 연결이 요구됨이라는 조건으로 대체한다. 이 입장은 Goldman의 것이다. Goldman의 인과 이론은 복잡하기에, 우리는 여기서 그 세부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단순화된 지식에 대한 인과 이론을 통해, 인과 이론의 주된 동기를 살펴보자.

(i) 단순 지식 인과 이론
S는 p를 안다 iff c.p가 참이며 b. S가 p를 믿으며 a. c.S가 가지는 p에 대한 믿음은 p라는 사실(fact)에 의해 생성되었다.

게티어 문제에 있어, 단순 신빙론이나 단순 인과론이 기존 JTB 이론보다 나은 지점이 있는가? 비록 옹호자들은 그렇다 말하자미나, JTB 이론의 반례들은 여전히 이들 관점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짜 헛간 사례로 가보자. 헨리는 진짜 헛간을 보았고, 그것이 그가 주변에 헛간이 있다 믿는 이유다. 이 믿음은 감각 지각을 통해 형성되었으므로,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로 신빙성이 있다. (드물게만 틀린 믿음으로 이끌 뿐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사례는 JTB 이론의 반례이듯, 단순 신빙론의 반례로도 성립하는 듯 하다.

또한 이는 단순 인과론의 반례도 된다. 왜냐하면 헨리가 본 진짜 헛간이 그의 믿음 형성에 인과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화 요건을 신빙성으로 바꾸는 것을 의심할만하다. 게티어 문제는 여전히 JTB 접근만큼이나, 단순 신빙론/인과론에도 문제가 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들 이론이 충분히 게티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지식에 대한 적절한 요건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7) 게티어의 해체 ; 지식은 분석 가능한가?

게티어의 논문은 인식론 학자들로 하여금, 지식과 정당화된 참인 믿음 간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JTB에 조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수정하는 다양한 철학적 활동들을 촉진하였다. 우리는 이미 이들 시도가 어떻게 실패하였느닞 보았다. 각 이론에 대한 직관적인 반례들이 제시되었을 때, 인식론 학자들은 때로 자신들의 이론을 개정하면서, 제시한 조건을 정교화하거나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는 형태로 대응하고 했다. (이러한 여러 과정은 Shope 1983 책에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몇 십년의 반복 이후, 몇 인식론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진전이 이루어 지고 있는지 자체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Linda Zagzebski는 1994년 라는 논문을 통해, JTB 분석과 유사한 어떠한 분석도 게티어 문제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주장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Zagzebski는 JTB+X 분석에서, X가 참/믿음/정당화와 논리적으로 독립된 조건(들)일 경우, 게티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녀는 게티어 사례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i) 우선 조건 X에는 맞지만, 정당화된 거짓 믿음을 인지자가 가지는 사례를 만들어라
(ii) 사례에서 믿음이 단지 운에 의해 참일 경우로 다듬어라

Zagzebski는 이렇게 구성된 사례는 언제나 직관적으로 지식은 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JTB에 중언이 아닌 다른 조건을 추가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게티어 문제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Zagzebski의 방법을 통해, 알빈 플랑틴가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방법을 논파할 것이다. 그는 JTB 조건에 "인지자의 감각 기관이 적합한 환경에서 적절히 작동한다."를 추가해서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Zagzebski의 방법에 따라, 우선 우리는 인지자의 감각 기관이 적합한 환경에서 적절히 작동하지만, 그렇게 산출되는 정당화된 믿음이 거짓일 경우를 상상해보자. Zagzebski는 눈이 충분히 좋은 메리를 가정한다. 그녀의 인지 기관은 충분히 좋아서, 그녀의 남편이 거실에 앉아있다는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 이러한 기관이, 설사 적합한 환경에서 작동할지라도, 지식의 조건은 충족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사례를 생각해보자. 아마 메리의 남편의 형제가 남편과 정말 흡사한데 거실에 앉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메리는 그녀의 감각 기관의 적절한 기능에 근거해서, 그녀의 남편이 거실에 앉아있다 믿게 된 것이다. 이 거짓된 믿음은 당연히 지식이 아니다.

두번째 단계로 가자. 메리가 거실에 앉아있는 사람을 착각한 사례에 남편이 운 좋게 어떻게든 거실에 있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메리의 믿음은 참이다. 하지만 이는 첫번째 사례의 거짓 믿음만큼이나 지식의 예라 보기 어렵다.

이 반례를 만드는 방법론은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기에, JTB 이론에 어떠한 조건을 더한 것에도 적용할 수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 조건 자체가 참을 수반할 경우일 때다) 이 주장은 중언이 아닌 다른 조건 X를 추가하는 모든 JTB 분석에 적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Zagzebski의 논변에 대한 하나의 잠재적 답변은, 지식이 분석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다. 이 주장은 20세기 후반의 분석적 인식론과 상당히 차이나지만, 궁극적으로 급진적인 제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방법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개념들은 전통적인 분석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 해명되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 중 가장 유망한 것은 (11)에 있다.

다른 답변은, 정당화 조건을 강화해서 게티어 문제의 사례가 정당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Zagzebksi의 반례가 작동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반례의) 첫번째 단계가 작동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당화 조건이 참을 수반할 때만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사례를 정당화된 거짓 믿음에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방법은 주류는 아니지만, 옹호자들이 꽤 있다.

세번째 답변은, 지식에 대한 분석이 잠재적으로 중언이 아닌/논리적으로 독립된 JTB+X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접근을 보았다. (비록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말이다.) 예컨대, 지식에 대한 인과 이론은 "p라는 믿음은 p라는 사실에 의해 산출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이 조건은 이미 믿음과 참을 포함하기에, Zagzebski의 반례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 다른 형태의 게티어 문제에 봉착한다.) 이 전략 중 하나는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 인식론적 운을 직접적으로 방지한다. 이제 이런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8) 인식론적 운
만약 게티어 문제에서 그려진 문제가, JTB/JTB+ 분석이 지식과 모순될 정도로 인식론적 운(을 가진 사례)와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라면, 자연스러운 순서는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 "운을 제거"(anti luck) 조건을 명확히 포함하는 것이다. Zagzebski는 1994년 자신의 논문에서 이 가능성의 윤곽을 그렸다. Unger는 이런 종류의 분석의 이른 형태를 제시한다. 예컨대

S가 p를 안다 iff. c.p가 참이며 b. S가 p를 믿으며 a.S가 가지는 p라 믿는 것이 정당화 되었으며 d. S의 믿음이 단지 운에 의해서 참인 것이 아니다.

우선 말할 것은, 위의 정식화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네번째 조건(d)는 첫째와 둘째 조건(c/b)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이 정식화는 실제로는 JTB+ 접근법과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이 접근법은 지식을 다양한 독립적인 요소들을 구성하는 대신, 이 인식론적 상태는 다른 것과 실질적인 방식으로 연관시킬 것을 요구한다.

"운을 제거하는 조건"은, 앞서 본 안전성 조건처럼 그 자체로는 모호하다. 예컨대, 운에 의해 참이 되는 믿음에는 어떠한 정도가 있는가? 달리 말해, 지식과 불합치하려면, 어느 정도의 운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나아가, (운의 정도에 관한 질문과 독립적으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운을 구분해야만 한다. 모든 인식론적 운이 지식과 불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복권을 사서, 백과사전에 당첨되어 그걸 읽었다 하자. 이를 통해 그가 기존에 가진 잘못된 지식이 교정되었다면, 이 결과 생긴 믿음이 참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 보자면) 운에 따른 셈이다. (그가 복권에 당첨된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운은 직관적으로 지식과 불합치하는 종류의 운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본래 가진 지각에 의한 믿음이 운에 의해 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데카르트의 악마에 의해 망상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면적인 회의주의(radical skepticism)에 굴복하지 않는 이상, 이런 종류의 운이 지식과 합치한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성 조건처럼, 운 조건 역시 몇 케이스에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운 조건을 명료하게 만들어서, 특정한 종류의 인식론적 운과만 관련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지식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지식에 대한 분석이 정보를 주며 비순환적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9) 다른 방법론들

지금까지의 논의가 명백히 보여주듯. 시도된 지식에 대한 분석을 평가하는 표준적인 방식은, 그 시도에 반증이 되는 직관적 예시에 큰 비중을 두었다. 20세기 후반, ([7]에서 언급된 Zagzebski의 기여를 포함해서) 수용 가능한 분석에 대한 어떤 진전도 없는 상황은 몇 인식론 학자들로 하여금, 다른 방법론을 찾도록 유도했다. (또한 명백히, 개념적 분석에서 보다 넓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철학 전반의 조류 또한 이에 기여했다.) 지식에 대해 분석하련느 요근래의 시도들은, '지식의 역할' 혹은 '지식에 대한 담론' 등 보다 넓은 범위를 고려하는데에서 시작된다.

이 중 중요한 하나의 관점은 Edward Craig에 의해 옹호된다. Craig가 지식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는 지점은, 직관에 의한 사례가 아닌, 인간에게서 '지식 개념'이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특히, Craig는 '지식'이라는 점주를 사용하는 의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믿을 만한 정보인지 알려주기 위해서라 제안한다. (즉, 사람들로 인식론적 문제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도록 하는 일이다.) Craig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지식 개념을 옹호한다. (설사 직관에 의한 반례에 위험해질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직관적인 반례를 차치하더라도) 다른 이론적인 정당화와 정합적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또다른 주목할 만한 에시는 Kornblith로, 그는 지식이 자연종으로, 다른 자연종처럼 분석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직관은 '전형적인 예시'(paradigm)를 아는 역할을 하며,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경험적/과학적인 방법이다. (직관적인 반례들은 예상되어진다. [이 문장은 원문 자체의 오류인 듯합니다.])

'지식 우선'이라는 입장 역시 이러한 방법론적 문제와 연관된다. (11)을 보라.

(10) 덕 인식론

지식에 대한 덕 이론적 접근은, 안전성이나 운을 제거하는 접근과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다 실제로 덕 인식론의 대표자인 Sosa는 기존의 안전성 접근을 발전시켜 덕 인식론으로 만들었다. 덕 인식론은 지식을 특별히 성공적인 혹은 가치 있는 형태의 믿음으로 보며, 이런 용어들을 통해 지식을 설명하려 한다. 운을 제거하는 조건처럼, 덕 인식론은 (지식을 진리 함수 역할을 하는 상호 독립적인 인식론적 속성의 결합을 보는) 기존 JTB+을 벗어난다. 덕 인식론에 따르면 지식에는 믿음과 참 사이의 논리와 무관한 관계성이 필요하다.

(10-1) "AAA" 평가

Sosa는 때로 숙련된 궁수가 과녁을 맞추는 것을 유비로 사용한다. 활쏘기를 평가하는 방법은 다음 두 가지가 있다.

(i) 활을 쏘는 것이 성공적이였는가? 활이 과녁을 맞추었는가?
(ii) 활을 쏘는 것이 궁수의 실력을 보여주는가?

(i)과 관련된 성공을 Sosa는 정확성(accuracy), (ii)과 관련된 기술을 솜씨있음(adroitness) 부른다. 활 쏘시가 솜씨 있을 때는, 그것이 능숙하게 이루어졌을 때다. 솜씨 있는 활 쏨이 반드시 정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능숙한 활 쏘기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확한 활 쏘기가 솜씨있을 필요는 없다. 몇 능숙하지 않은 활 쏘기도 운 좋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성/솜씨 있음에 더해, Sosa는 이 둘과 관련해 활 쏘기를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있다 말한다. Sosa는 이를 '적합성'(aptness)라 부른다.

(iii) 활쏘기의 성공이 궁수의 기술로 인한 것인가?

활 쏘기가 솜씨있음에 의해 정확할 때, 이를 적합하다고 한다. 적합성은 정확성과 솜씨있음의 결합을 수반하지만, 이보다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활쏘기가 정확하고 솜씨있지만 적합하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솜씨있는 활쏘기가 예상치 못한 바람에 의해 방향이 바뀌었다가, 다시 부는 두번째 바람에 궤도가 바뀌어 운 좋게 맞췄다고 해보자. 이 경우, 궁극적인 정확성은 솜씨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단지 바람의 운좋은 우연일 반영할 뿐이다.

Sosa는 이 "AAA" 모델이 특정한 목적이 있는 행동/사물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본다. 예컨대, 참을 목표로 하는 믿음에도 적용할 수 있다 보는 것이다.

(i) 믿음은 정확하다. iff 그것이 참일 때.
(ii) 믿음은 솜씨 있다 iff 그것이 솜씨있게 산출되었을 때
(iii) 믿음은 적합하다 iff 그것이 참이 되는 방식이 인지자의 기술에 의한 것일 때.

위에서 보듯, Sosa는 지식을 적합한 믿음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지식은 참(정확성)과 정당화(솜씨있음)을 수반하지만, 이들은 지식의 진리 함수를 구성하는 독립된 요소가 아니다. 기술이 성공을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입장은 어느 정도 운을 제거하는 조건과 흡사하다. (정당화와 참이 관계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어떠한 법칙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하튼 Sosa의 AAA 모델은 인식론을 넘어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운과 관련해서 지식을 이해하는데 사용되었던 '적합성'보다 더 나은 가멍성이 있을 것이다.

(10-2) 가짜 헛간의 사례

지식을 적합한 믿음으로 보는 것은, JTB 분석의 반례로 쓰이는 게티어 문제를 해소할 여지를 만든다. 예컨대 스미스가 존이 포드차를 가졌거나 브라운이 바르셀로나에 있다 믿는다 해보자. 이 때 그의 믿음의 정확성은 그의 추론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존의 차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하는 증거와 같은) 불운한 상황이 그의 능숙한 인지적 능력에 영향을 미친 것에 불과하다. 마치 첫번째 바람이 궁수의 화살을 방해하듯 말이다. 이러한 불운과 반대로, (브라운이 바르셀로나에 우연히 있는 것과 같은) 운 좋은 상황인 믿음을 참으로 만드는데, 이는 두번째 바람이 궤도를 벗어난 화살을 과녁에 다시 맞추도록 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짜 헛간의 사례는 Sosa의 AAA 접근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헨리가 헛간 간판으로 가득한 곳에서 유일한 진짜 헛간을 보았고, 그는 일반적으로 헛간을 인지하기에 믿을만한 감각 기관을 사용했으며, 이 상황에서 그게 옳게 되었다 해보자.
우리는 헨리의 믿음의 정확성이 그가 가진 감각 지각자로서의 능숙함을 드러낸다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헨리의 믿음이 적합하다 판단할 수 있으며, 지식의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문제적인 결과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직관에 따르면 우리는 헨리가 지식을 가지지 않는다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헛간을 보았다는 지식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가짜 헛간을 보지 않고 진짜 헛간을 보는 것인데 이는 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직관에 따르면 운에 달린 것은 지식이 아니다.)
AAA 접근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할 수 있다.

첫째는 AAA 옹호자들은 헨리가 헛간을 인지하는 전반적인 능숙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경우 그의 현재 환경으로 인해 그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짜 헛간으로 가득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전략은 (살짝 다른데) 헨리는 현재 장소에도 상관없이, 여전히 헛간을 인지하는 능숙함을 가지지만, 가짜 헛간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ubiquity) 때문에 그의 믿음이 능숙함의 발휘라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참이 헛간을 인지하는 능력보다는 운에 더 달려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전략은 (Sosa 본인의 답으로) 정면 돌파다. 헨리의 믿음이 적합하다 판단하면서, Sosa는 헨리가 본인이 이전에 거기 헛간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결과를 수용한다. 그는 이 결국의 반 직관성을 해명하기 위해, (이 사례가 지식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Sosa가 명명한) "반성적 지식(reflective knowledge)" 같은 인식론적으로 가치 있는 상태가 부재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11) 지식 우선 (Knowledge First)

모든 개념들이 보다 근본적인 용어로 분석 가능한 것은 아니다. 존 F 케네디, 동물, 수소 같은 것들이 분석될 수 없다는 사실과 무한 후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며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식이 분석 가능하다고 여겨야 하는가? 티모시 윌리엄슨(Timothy WIlliamson)은 (특히 자신의 2000년 저서 에서) 지식을 분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장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지식이 흥미롭지 않은 상태라거, 지식이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윌리엄슨은 지식이야 말로, 존재하는 심리학적/인식론적 상태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지식을 다른 용어로 분석하는 것은 실수인데, 최소한 대부분의 경우에서 지식이 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관념(notion)이기 때문이다. 윌리엄슨이 말했듯, 우리는 "지식을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지식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분석의 대상이 아닌 분석의 대상을 이루는 요소로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직접적인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 '지식 우선' 입장의 이론적 성공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접근법과 지식에 대한 보다 전통적인 접근법이 가진 이득을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 밖이다.

비록 윌리엄슨이 (이 글이 말하듯) 지식이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더라도, 그는 지식에 대해 흥미로우며, 더 나은 정보를 주는 특징이 있다 여긴다. 예컨대, 윌리엄슨은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수용한다.

(i) 지식은 가장 일반적인 '사실 심적 상태'(factive mental states, 이러한 다른 심적 상태로 무엇을 인지하다[be aware] 등이 있다.)이다.
(ii) S가 p를 안다는 것은 iff p에 대한 명제를 포함한 모든 증거(total evidence)를 S가 가질 때이다.

윌리엄슨은 또한 지식에 대한 분석을 거부하는 것이 지식에 대한 흥미롭고/정보를 주는 필요/혹은 충분 조건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지식이 참/거짓/정당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생각들은 모두 '지식 우선' 입장과 합치된다. 그리고 윌리엄슨 본인도 지식에 대한 안전성 조건을 명확히 지지한다. 다만 이것이 그의 분석의 일부가 아닐 뿐이다.

이 입장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은, 어떠한 인지자가 지식을 가졌는지 판단할 때, 무엇이 관련이 있고/없는지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굳이 지식을 분석하려는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지식에서 실용주의적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중요한 현대의 논쟁을 볼 것이다.

(12) 실용주의적/화용론적 침범 (pragmatic encroachment)
[둘 중 어느 번역어가 정확한지 자신이 없네요.]

지식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지식은 참이나 정당화 같은 요인들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안전성, 세심함, 신빙성 아니면 특정한 종류의 운에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쟁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여하튼 지식에 대한 이 모든 잠재적 조건들은, 연관된 믿음에 대한 참과 어떠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공통점을 가졌다. 비록 이 연관성을 명확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식(에 대한 정의의) 후보로 우리가 고려했던 모든 요소들 직관적으로 (곧) 지식이 될 믿음의 참과 어떤 식으로 연관된 듯 하다.

요근래, 몇 인식론 학자들은 '참과 관련된 요인들'에 집중하는 것이 지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중요한 부분을 누락했다 주장한다. 정확히는, 그들은 인지자의 지식과 관련된 (다른 것과 구분되는) 실용적 요소가 존재한다 말한다. 이 주장은 "실용주의적 침범"이라 불린다.

(i) 실용주의적 침범
실용주의적/화용론적 상황의 차이가 지식의 차이를 구성한다.

구성한다(constitution)라는 주장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실용주의적 상황이 지식의 차이를 '가져'(cause)올 수 있다는 점은 사소하다. 예컨대, 코네티컷 주에서 대마초가 합법인지 다니엘보다 산드라에게 중요하다면, 산드라는 다니엘보다 그에 대한 증거를 알아볼 것이며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이 흥미롭지 않은 주장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실용주의적 침범 이론가들은 실용주의적 중요성 그 자체가 지식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본다. (실용주의적 관심의 차이에 따른) 증거 수집 활동의 차이와 무관하게 말이다. 산드라와 다니엘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인식론적 입장(epistemic postion)에 있지만, 차이는 주어진 질문이 산드라에게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실용주의적 침범에 따르면, 다니엘은 알지만 산드라는 모르는 것을 만들 수 있다.

실용주의적 침범은 사례들에 대한 직관에 기반해 형성되었다. Jason Stanley는 다음과 같이 증거에 있어서는 흡사하지만, 실용주의적으로 다르게 대조되는 사례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실용주의적 침범이라 주장한다.

(i) 낮은 위험
부부인 한나와 사라는 금요일 오후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 가는 길에 은행을 들려 자신들의 급료를 예금하려 계획했다. 이는 중요한 일은 아니었는데, 임박한 고지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은행을 지나갈 때, 금요일 오후에 때때로 그러는 것처럼 줄이 매우 길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급료를 예끔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뒤, 한나는 "난 은행이 내일도 연다는 것을 알아. 왜냐하면 고작 2주 전 토요일 아침에 내가 갔었거든. 그러니깐 우리 내일 아침에 급료를 예금하자."

(ii) 높은 위
부부인 한나와 사라는 금요일 오후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 가는 길에 은행을 들려 자신들의 급료를 예금하려 계획했다. 그들에게는 닥쳐오는 고지서가 있었고, 그들의 통장에는 돈이 별로 없었기에 토요일까지 급료를 예금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한나는 이주 전 토요일 아침에 은행에 갔었고, 그때 은행이 열려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사라는 은행이 열리는 시간을 바꾸곤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나가 답하길, "니 말이 맞는 거 같아. 난 은행이 내일 열릴지 모르겠네."

Stanley는 이와 같은 사례의 교훈은, 일반화하면, p와 관련된 질문이 더 중요할수록 p에 대해 알기 어렵다는 것이라 주장한다. 다른 보다 이론적인 방법으로 실용주의적 침범을 옹호하는 방식도 있다. Fantl/McGarth는 지식과 행동을 연결하는 가능한 원칙들/오류 가능성(fallibilism)에서 실용주의적 침범이 일어난다 주장한다. 한편 Weatherson은 선택 이론을 가장 좋게 해석하는 위해서는 실용주의적 침범이 필요하다 주장한다.

실용주의적 침범은 지식에 대한 분석은 아니다. 단지 실용주의적 고려가 지식을 구성하는 인지자의 믿음을 결정하는 게 유효한 영향을 준다 주장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실용주의적 침범 이론가들은 지식에 대한 분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이중 필요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는 예컨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i)
S는 p를 안다 iff S가 p를 행동의 이유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방해할 만한, p가 가진 인식론적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과 행동을 연결하는 이 주장은 Fantl/McGarth가 주장한 것과 유사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어느 것보다 강하다.

지식에 대한 실용주의적 침범은 깊은 논쟁의 대상이다. Rysiew/Brown/Gerken은 지식의 본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로도 상기된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주장한다. Blome-Tillmann은 수용하기 어려운 반직관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주장한다. 예컨대 어떤 주장이 참이라는 것은 "S가 p를 알지만, 만약 그게 더 중요했다면 S는 p를 몰랐을 것이다." 혹은 "그 질문이 중요해지기 전까지, S는 p를 안다." 등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Stanley는 이러한 사례를 수용할 만한 전략을 제시한다.
침범에 대한 보다 이론적인 반박들 역시 제기되었다. Ichikawa-Javris-Rubin은 실용주의적 침범이 믿음-욕망(belief-desrie) 심리학의 중요한 신조들과는 매우 상이한 것을 주장한다 본다.

(13) 맥락주의

우리가 다뤄야 하는 마지막 주제는 지식으로 불리는 것(knowledge attributions)에 대한 맥락주의다. 이에 따르면 단어 "알다"(와 이와 유사한 것들은) 맥락 의존적(context-sensitive)이다. 맥락주의와 지식에 대한 분석의 관계가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주제를 다룬다. (맥락주의는 '단어(의 뜻)'을, 지식에 대한 분석은 심적 상태를 다룬다.) 그럼에도 지식을 이론화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그러한 이론화가 일어나는 곳인) 언어에 대한 의미론적 고려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맥락주의가 옳다면, 지식에 대한 이론은 반드시 (지식이라는 단어가 지닌) 다의성(ambiguity)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영어 단어들이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가장 명확한 예들은 "나", "너", "지금"과 같은 지표사(indexicals)다. "너" 같은 단어들은 발화될 때의 대화 맥락에 따라 다른 사람을 지칭한다. 특히 발화자에게 달려있다. 다른 맥락의존적 단어들은 "크다" 같은 등급 형용사(gradable adjectives)(얼마나 큰 것이 "크다"라고 말해질 수 있는지는 발화의 맥락에 달려 있다.)와 수량사(quantifiers)("모두"에 포함되는 사람은 발화의 맥락에 달려있다.) 등이다. "알다"에 관한 맥락주의자들은 이 동사가 이러한 맥락 의존적 용어 중 하나라 본다. 이러한 맥락주의는 "알다"가 포함된 문장이 발화되는 대화의 맥락에 까라서, 다른 명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특성은 맥락주의자로 하여금 회의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그러나 논쟁의 여지는 있는) 대응을 가능케 한다.

맥락주의자들은 이러한 맥락 의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식화 한다. Keith DeRose는맥락-독립적인 "인식론적 입장에 대한 강함(strength of epistemic position)이 있고, 발화자가 "알다"라는 단어에 적합한 얼마나 강한 입장을 고를지는 반드시 맥락마다 다르다 주장한다. 알다 발언의 의미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등급 형용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흡사하다. (누군가의 키가 "크다"라고 말을 충족할지는 맥락마다 다르다.)
Cohen은 연관된 다른 대안들에 대한 맥락주의적 접근법을 수용한다. 이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회의주의적 상황에서만 회의주의적 가정들이 연관된 대안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요소는 Lewis 1996 논문에서 견지되는 부분인데, 이 논문은 맥락주의를 수량사나 양상 표현(modal)에 대한 접근과 흡사하게 접근한다. Blome-Tillman/Ichikawa는 이러한 루이스 관점을 다른 방식으로 옹호-발전시킨다.

맥락주의와 실용주의적 침범은 직관적인 데이터가 가지는 취약한/설명하기 어려운 패턴의 일부분을 설명하려는 각기 다른 시도들을 대변한다. (사실 맥락주의가 우선 발전되었고, 실용주의적 침범 이론가들은 맥락주의자들이 설명하려는 패턴의 일부를 [맥락주의적] 의미론과 무관하게 설명하는 목적에서 개발되었다.) 비록 이 설명은 두 이론이 경쟁적인 접근처럼 보이게 하지만, 맥락주의와 실용주의적 침범은 사실 공존할 수 없는 이론은 아니다. 혹자는 "알다"가 다른 맥락마다 다른 기준을 만족시켜야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인지자의 실용주의적 상황이 주어진 기준을 만족시키는 게 유효한 연관성이 있다 볼 수 있다.

11개의 좋아요

Lightweight Knowledge 이전까지의 내용 중에서 몇 가지 말씀드립니다.

  1. "acquaintance"는 보통 "대면지" 정도로 번역될 겁니다. 우리가 통상 "어 나 그 사람 알아!"라고 할 때의 "알다"의 의미죠. "전해 들은"이라고 쓰면 증언(testimony)에 의해 얻은 지식처럼 들립니다.

"S는 j라는 필요충분조건이 성립할 때에만, P를 안다."

이건 약간 논리적으로 안 맞는 것 같네요.
"S는 P를 안다 iff j이다." 가 원문인데, 저렇게 쓰면 필요충분조건이 성립하는 것이 P를 아는 것의 필요조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단순히 실제로 존재하는 지식들을 분석하는 것"

원문은 "pick out actual extension of knowledge"인데요, 이건 말하자면 단순동치(<=>)가 성립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실제 세계에서의 지식의 외연을 포착하는 것" 정도가 될 것 같네요. 이렇게 써도 딱히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necessary truth"는 그냥 "필연적 참"으로 번역하시면 됩니다. "논리적 참"과 "경험 독립적 참"은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개요에서 등장하는 지식 분석 자체에 대한 관점 대립(형이상학적 해석/개념적 해석)은 따로 번역을 안하셨군요. 저는 윌리엄슨 읽을 때 흥미로운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ㅎㅎ

  2. (1.b.) 마지막 단락에 콜린 맥긴 얘기는 원문에는 없는 거죠? 그리고 원문에서 "인식론적 참"이라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외려 참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제한하죠.그리고 원문에는 "So when we say that only true things can be known, we’re not (yet) saying anything about how anyone can access the truth."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참을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겠다는 말로 보입니다.

  3. 믿음을 믿거나 안 믿거나의 문제(all or nothing)로 볼 때의 믿음을 "full belief"라 합니다.
    그게 아니라 0에서 1사이의 확신의 정도를 갖는 것으로 볼 때 "partial belief"라고 하죠.
    "outright belief"는 번역하기 참 까다로운 것 같은데, 윌리엄슨이 쓰는 맥락을 봐도 정확히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안왔습니다. 말하자면 행위 같은 데에 당연스럽게 반영되어 있는 정도로 너무 당연하게 참이라고 믿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4. 1.a.1)에서 "process reliablism"에서 뒷부분을 빠뜨리셨네요. "과정 신빙주의"?

나중에 또 더 읽어보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6개의 좋아요

(1) 이게 초안이 원래 제가 의역하고 맘대로 축약하고 그런 것이라서요 (...) 아직 그 잔제가 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번역도 맨 앞부터 순서대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순서들을 중구 난방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서, 빠져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2) 테크니컬한 용어들에 대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실용주의적 침범처럼, 맥락주의 역시 깊은 논쟁의 대상이다. 비판자들은 맥락주의가 가정하는 맥락 의존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일상적 화자들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의미론적 오류를 부여한다 본다. 또한 이는 지식에 관한 이론적 원칙과 양립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본다. 나아가, 실용주의적 침범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 현상을 약화시키기 위한 주장들은, 맥락주의를 약화시키는 데에도 사용된다.

(글자수가 넘어가서 부득이하게 댓글로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