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이상한 공상들

(1) 우선 글을 읽고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오타를 냈네요 ㅎㅎ. 둘 다 사건 A입니다.

(2)

아무래도 제가 본문에서 '인지적 중요성'이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쓴 듯합니다. 말씀해주신 견해도, 인지적 중요성은 맞지만, 실용적 관점에서 '지식'(혹은 명제)의 인지적 중요성의 차이인 듯합니다. (따라서 제가 초내포성을 말하면서 말한 '인지적 중요성'과는 다른, 하단에 나오는 실용주의적 침범에 해당하는 사례인듯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초내포성에서의 인지적 중요성이 다르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인지적 차이'라 부르겠습니다)는 말은 같은 지칭-같은 명제일지라도, 인지 과정에서 어떠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확률 문장의 경우도, A가 40% 성공한다고 할 때와 60% 실패한다는 문장을 인지자가 접했을때, 인지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믿음의 강도는 다르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둘이 동일한 지칭-명제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

(a) 초내포성에 있어서 인지적 차이와 (b) 보더라인과 지칭의 문제를 저는 하나로 엮어놓았지만, 통상적으로 다르게 파악할 것 같아서 글 중간에 뭉갠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 (a) 초내포성에 동의하는 학자일지라도, (b) 보더라인과 지칭의 문제는 다른 유형의 문제, 즉 명제의 차이가 있는 문제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a)-(b)를 동일 선상에 있는 문제로 보는 듯합니다. 즉 (b) 문제로 인해서 (a) 문제가 발생한다 보는 셈이죠.
어쩌면 이 문제는 명제 단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명제를 이루는 요소인) 단어(word)나 개념(concept) 단위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i) 어떠한 개념들은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번역한 지식에 대한 분석에도 나와있지만) 물, 빨강, 버락 오바마 같은 개념들은 더 하위의 개념들로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윌리엄슨은 지식-알다 역시 이러한 분석 불가능한 개념으로 봐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이제 이 개념들에게 남는 것은 (ii) 지칭의 역할, 즉 이름표의 역할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이제 스티치의 문제가 끼어드는 듯합니다. (iii) 그렇다면 어떤 지칭이 올바른 기준인 것인가? 그걸 결정할 방법은 있는가? 사이더나 윌리엄슨은 직관이라 말하는 듯합니다. 스티치는 실험 철학을 통해, 여러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직관에 있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과를 내밀죠.

저는 여기에 보더라인 케이스라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스티치를 옹호하면서도 중간의 길로 가는 듯합니다. 즉, 저희는 인간의 직관-합리성에 부합하는 여러 개념-지칭의 분할들을 가질 수 있다는 의견이죠.

제 의견은 형이상학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퀄리파이션이 추가되어야 할 듯합니다.
(iv) 외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자연과학적 분할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론적/자연 언어적 분할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액체와 고체의 구별이 있습니다. 고체는 인간의 현상적 경험에서 단단하고 자신의 형체를 (별다른 외부의 충격이 없으면) 잘 유지하는 물체입니다. 반면 액체는 흐르고 모양이 변하죠. 문제는 과학적 엄밀성을 기하자면, 이 구분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점도라는 개념을 추가해보겠습니다. 점도는 이제 물체를 이루는 물질들이 서로 얼마나 달라붙는지의 정도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체는 점도가 극도로 높고, 액체는 그보다 낮으며, 기체는 가장 낮습니다. 고체 내에서도 점도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액체 간의 점도의 차이는 현상적 경험에서도 직관적이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유리가 '흐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유리는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한 몇 십년의 시간이 누적되면, 인간이 알 정도로 유리가 흘려내리죠.) 즉 유리는 통상적인 돌보다는 점도가 낮은 셈입니다. 이를 고려해보면, 유리는 액체로 분류될 수도 있죠.
[검색해보니, 이건 잘못된 과학적 설명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유리가 아닌 '피치' 같은 이상한 물질이 있으니 설명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가면 개체(object)와 사건(event)의 구분이 있습니다. 사건은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즉 발생하는 일. 개체는 시간상에 계속 존재한는 것이라는 직관적인 구분이 가능할 듯합니다. 문제는 이 직관 역시 인간의 현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모든 개체는 언젠가 사라지죠. 그렇다면, 신처럼 인간보다 영원히 사는 개체의 현상적 경험에서는 (인간의 현상적 경험에 대한 직관에 기반해 분류한) 개체와 사건의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신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살인 사건과 지구의 멸망은 그냥 다 동일한 무언가일 뿐인 셈이죠.

즉, 인간의 직관 - 인간의 직관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자연 언어/자연 언어 존재론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속(즉 현상적 경험 속)에 성립하는 분할, 즉 통속-형이상학/자연학이라 말할 수 있어보입니다. 한편 이와 대비되는 자연과학을 통해 성립하는 자연과학적 분할이 있겠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외부 세계는 연속적이며, 과학적 탐구란 이 개체 간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인식론적 방법을 찾아서 환원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합니다. 물체의 상태의 연속성을 기술할 수 있는 기준인 '점도'처럼 말이죠.)
(예를 추가하자면, 생물학의 철학에서 계속 나오는 종[species]에 대한 것도, 저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분류이지, 정확한 분류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가장 정확한 분류를 하자면, 유전자의 연속성 같은 기준을 세워 연속적으로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두 개념들이 어느쪽으로 환원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다른 '분할'일뿐이죠. 숫자 1-2-3이 있다고 해서, 이를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인) 분수로 환원할 필요가 없듯이 말입니다.

이 분할 개념은 오래전부터 제 머릿 속에 있던 것인데, 아무래도 (라쿤님이 지적하셨듯) 정교화하려면 수학을 좀 더 공부해야할 듯합니다.

(4)

명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할 듯한데 ㅋㅋㅋㅋ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겠네요. 설명을 한다면서, 더 거대한 이상한 곳으로 이끌어 가서 죄송합니다. 좋은 코멘트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