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에 대한 일종의 상대주의적 견해

(1)

이 생각의 단초는 메타-형이상학에 관한 논의들이었다.

아마 윌리엄슨의 이와 같은 구분은

즉, 일상적 존재 주장과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존재 주장의 구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내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일상적 존재 주장이 성립하는 경우는 언제인가? 즉, 우리가 특정한 명사(names)으로 무언가를 지칭/표현하는 것이 언제 '옳다' 받아드려지는가?
수학이나 과학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i) 명사와 그에 해당하는 지칭이 체계 내에서 잘 굴러갈 때, 이러한 일상적 존재 주장은 "옳다" 받아드려지는 듯하다.

이 같은 생각을 사탄이나 유령, 셜록 홈즈, 이순신 같은 사례로 확장해보자. 사람들인 각자 이 명사에 해당하는 지칭물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즉 형이상학적 존재 주장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개념이 "의미"를 가지며, 잘 정의되었다는 사실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드릴 것으로 보인다.

[좀 더 디테일한 논증이 필요해보인다.]

(3)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일상적 존재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형이상학적 존재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안다. 예를 들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멸종해버린 종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 "어떠한 생물 종", "어떠한 역사적 사실"과 같은 '일상적 존재 주장'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상적 존재 주장이 '형이상학적 존재 주장'의 전제가 되는 듯하다.

따라서 (2)를 고려한다면, 이는 다음을 함축한다.
(i) 형이상학적 존재 주장을 위해서는 일상적 존재 주장이 성립해야 한다.
(ii) (2)에 따라 일상적 존재 주장이 성립한다는 것은 지칭물이 (체계 내에서) 잘 정의되어있다는 의미이다.
(iii) 따라서 형이상학적 존재 주장 역시 잘 정의되어있어야 한다.

(4)

일상적 존재 주장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잘 활용하는 듯하다. 사탄, 유령, 셜록 홈즈, 이순신에 대해 이들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잘 사용한다.

나아가, 이 일상적 존재 주장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강하게 믿는" 인지자의 경우, 이 인지자에게 (이 개념의) 대상은 사실상 "정말로 존재하는 개체"처럼 인지적 작용을 하는 듯하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생각해보자.
'문화 특정적 신드롬'(Culture-bound syndrome)이라는 현상이 있다. 특정 문화권의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신체적-정신적 증상이다. (대표적으로 화병이나 신병 등 한국의 문화 특정적 신드롬이다.)

이들은 (i) 자신들이 느끼는 증상 - 느낌들 - 퀄리아가 [의학적으로 이들 환자에게 유의미한 과학적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ii) (일상적 존재 주장이 성립되는 개념의 지칭에 해당하는) 대상물 [유령, 웬디고 등등]이 원인이라 믿어지고 (iii) 이 대상물에 대한 다른 문화적 믿음을 따를 경우 (예컨대, 신병의 경우 신내림을 받는다는 등) 이 증상이 해결된다.

(5)

아마 우리는 종교적 경험과 종교에 대해서도 비슷한 형태의 주장을 할 수 있어 보인다.

(6)

(4)-(5)에 따르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존재' 유무를 믿는지에 따라서, 사실상 다른 인지적 작용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게 되는 듯하다. 누군가 신앙처럼 유령을 믿는다면, 그 사람에게 유령은 정말로 존재하는 다른 개체들처럼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유령을 신앙처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인지적 작용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둘이 같은 상황에 놓일지라도!)

굉장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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