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양화사 변이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 많은 경우 말뿐인 논쟁(verbal dispute)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얼핏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 입장들이 실제로는 ‘존재한다(exist)’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대개 무엇이 유의미한 논쟁이고 무엇이 말뿐인 논쟁인지를 구별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틀’에 대한 의심스러운 가정을 받아들인다. 양화사 변이 이론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틀에 대한 기존 논의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우선 카르납과 허쉬를 통해 기존 양화사 변이 이론이 ‘언어적 틀에서 출발하는 논증’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Ⅱ). 다음으로, 양화사 변이 이론을 위한 대안적 논증으로 ‘실재의 구조에서 출발하는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Ⅲ).
Ⅱ. 언어적 틀에서 출발하는 논증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입장들 사이의 대결은 종종 단순히 말뿐인 논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로티는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 적이 있다(Rorty, 1999: xxvi 참고). 그의 사고 실험을 조금 변형해 보자. 가령, 당신이 동물원에서 기린 한 마리를 본다고 상상하자. 마침 그 기린의 등에는 언어를 사용하는 개미 한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다고 상상하자. 마침 그 개미의 등에는 언어를 사용하는 아메바 한 마리가 붙어 있다고 상상하자. 마침 그 모든 광경을 언어를 사용하는 외계인이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하자. 이제 그들은 각각의 언어로 자신들 앞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인간: 기린이 존재한다.
개미: 털들이 존재한다.
아메바: 세포들이 존재한다.
외계인: 움직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네 가지 존재 주장 중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참인 것을 단 하나만 골라내야한다는 생각은 다소 지나친 것 같다. 적어도, 이러한 생각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네 가지 존재 주장은 실제로는 완전히 동일한 상황을 서로 다른 관점과 층위에서 기술하고 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1 그들 모두를 ‘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즉,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 따위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애초에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떠한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양화사 변이 이론은 서로 다른 존재 주장이 모두 참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존재를 둘러싼 수많은 대립이 실제로는 말뿐인 논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양화사 변이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존재 양화사 ‘∃’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가 지닌 다양한 의미는 ‘언어적 틀(linguistic framework)’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로티의 예시에서 인간, 개미, 아메바, 외계인의 존재 주장이 모두 참이기 위해서는 각각의 ‘존재한다’라는 표현이 ‘∃인간’, ‘∃개미’, ‘∃아메바’, ‘∃외계인’이라는 각각의 존재 양화사로 번역되어야 한다. 네 생물이 서로 다른 언어적 틀에 따라, 다른 논의 영역을 상정하고서, 서로 다른 존재 양화사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참인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어야 그들의 존재론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을 제시한 대표적 인물로 카르납과 허쉬를 들 수 있다.
카르납과 허쉬
(1) 카르납(Carnap, 1956)은 ‘내적 질문(internal question)’과 ‘외적 질문(external question)’이라는 구별을 통해 양화사 변이 이론을 위한 토대를 제시한다. 그는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언어적 틀이 명확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령, “내 책상 위에 흰 종이 한 장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쉽게 대답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경험적 탐구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대답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하기 위해 어떠한 기준에 의존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여기서 두 질문 사이의 차이는 언어적 틀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물 언어의 틀 내부에서 제시되고, 두 번째 질문은 사물 언어의 틀 외부에서 제시된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 언어는 대상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확정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갖추고 있다. 사물 언어에서는 관찰 가능한 시공간적 체계에 속하는 대상은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 언어의 틀을 벗어나 대상이 시공간적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묻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별도의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시공간적 체계 바깥의 사물 자체에 대해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사이비 진술(pseudo-statement)일 뿐이다.
(2) 허쉬(Hirsch, 2009)는 얼핏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주장들이 종종 서로 번역된다는 사실로부터 양화사 변이를 주장한다. 가령, 편속주의(perdurantism)와 인속주의(endurantism)가 시간적 부분의 존재를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을 떠올려 보자. 편속주의는 사물이 시공간 구역에 펼쳐져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적 부분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인속주의는 사물이 특정한 시공간 지점에 전체로 현존하기 때문에 시간적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은 일반적으로 시간적 부분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존재 주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a는 시간 t에 F인 시간적 부분을 가진다.”라는 편속주의의 문장은 “a는 t에서 F이다.”라는 인속주의의 문장과 같은 특성(character)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편속주의의 문장과 인속주의의 문장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론을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편속주의와 인속주의가 상대의 언어에서 참인 문장을 자신의 언어에서 참인 문장으로 모두 문제없이 번역할 경우 두 입장 사이의 대립이란 말뿐인 논쟁이 되고 만다. 두 입장은 ‘존재한다’라는 용어를 각각의 언어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 나머지 갈등할 뿐이다. 적절한 번역이 제시되는 상황에서는 두 입장이 동일한 실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카르납과 허쉬의 입장은 존재의 일의성(univocity)을 당연한 것처럼 상정한 기존 형이상학에 맞서 양화사가 언어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가능성을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별히, 그들의 입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존재한다’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의 입장이 과연 그들의 아이디어를 얼마나 철저하게 정당화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여기서 우리는 카르납과 허쉬가 제시한 양화사 변이 이론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의존한 논증의 전제로부터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카르납과 허쉬의 입장에 제기되는 대표적 비판을 살펴보자.
(1′) ‘존재한다’라는 용어가 판단의 기준과 독립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는 카르납의 입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언어적 틀의 ‘안’과 ‘밖’이라는 구별을 너무나 자명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심각한 결함을 지닌다. 가령, “언어적 틀에는 안과 밖이 존재한다.”라는 주장 자체는 언어적 틀 안에서 제시되는 것인가, 밖에서 제시되는 것인가? ‘내적 질문’과 ‘외적 질문’이라는 구별조차 언어적 틀 안에서 제시되어야 할 경우 카르납의 입장은 철저하게 상대화되고 만다. ‘내적 질문’과 ‘외적 질문’이라는 구별이 언어적 틀 바깥에서 제시되어야 할 경우 카르납의 입장은 완전히 무의미에 빠지고 만다.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지 카르납의 입장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카르납의 입장이 검증주의적 의미론을 은밀하게 전제한 상태에서 의미와 무의미의 기준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심은 빈번하게 제기된다. 카르납의 현대적 계승자들조차 언어적 틀 ‘안’과 ‘밖’이라는 기준을 따라 의미와 무의미를 곧바로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Chalmers, 2009: 80-81; Hirsch, 2009: 231-232; Hofweber, 2009: 278 참고).
(2′) 번역 가능성으로부터 양화사 변이 이론을 제시하는 허쉬의 입장은 논지 자체만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서로 대립하는 존재 주장들 사이의 번역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존재론을 둘러싼 의견 차이들이 과연 서로 손쉽게 번역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심지어 허쉬가 말뿐인 논쟁의 사례로 제시한 편속주의와 인속주의 사이의 대립조차 실제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가령, “a의 t1 시점 부분은 b의 t2 시점 부분보다 F하다.”처럼 시간적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편속주의의 문장이 시간적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인속주의의 문장으로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는 논란을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그게 끝났다니 다행이야!”처럼 시제적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속주의의 문장이 시간적 부분들의 무시간적 존재를 가정하는 편속주의의 문장으로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도 까다롭다.2 따라서 번역 가능성에 근거한 양화사 변이 이론은 기껏해야 몇몇 존재론의 문제에만 매우 제한적으로만 적용될 뿐이다. 존재 주장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다수의 논쟁에서는 입장들 사이의 의미 보존적 번역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Sider, 2009 394-396 참고).
우리는 카르납과 허쉬의 입장이 ‘언어적 틀에서 출발하는 논증’에 의존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두 입장은 모두 언어적 틀에 대한 의심스러운 가정을 통해 유의미한 논쟁과 말뿐인 논쟁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카르납은 언어적 틀의 ‘안’과 ‘밖’을 엄격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의심스러운 가정에서 출발하여 존재론에서 제시되는 주장을 ‘사이비 진술’로 규정한다. 그의 입장은 자신이 제시한 언어적 틀 ‘안’과 ‘밖’의 구별을 성립시키기 위해 검증주의적 의미론에 은밀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허쉬는 대립하는 존재 주장들 사이에서 의미 보존적 번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가정에서 출발하여 존재론의 문제를 둘러싼 중요한 의견 차이들을 ‘말뿐인 논쟁’으로 규정한다. 그의 입장은 몇몇 제한적인 번역의 성공 사례가 존재론의 문제에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소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언어적 틀에서 출발하는 논증에 근거하여 양화사 변이 이론을 지지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언어적 틀에 대한 양화사 변이 이론의 가정이 의문시되는 이상, ‘존재한다’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이야기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충분히 정당화되기 어렵다.
Ⅲ. 실재의 구조에서 출발하는 논증
그러나 양화사 변이 이론이 반드시 언어적 틀에 대한 의심스러운 가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성립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양화사 변이 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다.”라는 아이디어를 지탱할 만한 토대를 발견해내는 방법이다. 카르납과 허쉬가 바로 이러한 방법을 따라 언어적 틀에 대한 자신들의 가정으로부터 양화사 변이 이론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는 하나밖에 없다.”라는 아이디어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를 비판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방법을 따라 실재의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양화사 변이 이론을 도출하고자 할 것이다.
데이비드 차머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단일한 실재의 구조를 상정한다. 그들은 대립하는 수많은 존재 주장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가 결국 한 가지 근본적 층위에 따라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때때로 동일한 존재 주장조차 어떠한 층위에서 논의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 조건을 지닌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다. 우선, 차머스(Chalmers, 2009)가 제시한 것처럼 우리의 존재 주장을 ‘일상적 존재 주장(ordinary existence assertion)’과 ‘존재론적 존재 주장(ontological existence assertion)’이라는 범주로 구별해 보자. 가령,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
라는 존재 주장은 일상적 층위와 존재론적 층위에서 각각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일상적 층위에서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라는 존재 주장의 참/거짓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고찰도 요구되지 않는다. 우리는 수론의 규칙에 근거하여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라는 존재 주장은 참이고 “2와 3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라는 존재 주장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가 일상적 존재 주장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는 수학이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정하는 기준이다. 수학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수학자: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 즉, 3, 5, 7이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론의 층위에서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라는 존재 주장의 참/거짓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형이상학적 고찰이 요구된다. 수학이 3, 5, 7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수에 대한 실재론을 지지하는지 유명론을 지지하는지에 따라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라는 존재 주장에 다르게 대답해야 한다. 따라서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가 존재론적 존재 주장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는 형이상학이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정하는 기준이다.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는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실재론자: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한다. 즉, ‘3’, ‘5’, ‘7’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존재한다.
유명론자: 2와 11 사이에는 소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3’, ‘5’, ‘7’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일상적 층위와 존재론적 층위에 따라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가 구분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양화사 변이 이론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2와 11 사이에 소수가 ‘존재하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정할 권위를 수학자, 실재론자, 유명론자 중에서 과연 누가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 존재 주장과 존재론적 존재 주장이 서로 뒤섞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즉, 일상적 존재 주장의 참/거짓은 (수학을 포함한) 개별 과학의 탐구에 따라 확정되어야 하고, 존재론적 존재 주장의 참/거짓은 (실재론과 유명론을 포함한) 형이상학의 탐구에 따라 확정되어야 한다. 두 존재 주장의 진리 조건은 (설령 두 존재 주장이 겉보기에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서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테드 사이더
그러나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종종 일상적 존재 주장과 존재론적 존재 주장을 뒤섞은 상태에서 ‘존재한다’라는 용어를 해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존재에 대한 개별 과학의 탐구와 형이상학의 탐구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다. 가령, 사이더(Sider, 2009)는 두 가지 존재 주장 사이의 혼동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드러내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무엇이 ‘존재하는지’와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가 실재에 내재된 양화 구조에 근거하여 단일한 의미로 확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 주장의 참/거짓이란 과연 “그것이 세계를 결대로 깎는지”(Sider, 2009: 404)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가 ‘구조’에 대한 개별 과학의 탐구와 형이상학의 탐구를 너무나 손쉽게 양립 가능한 것으로 가정한다는 사실이다. 사이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구조라는 이러한 개념은 형이상학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형이상학의 중심적 과제는 실재의 근본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근본적, 곧 실재의 구조에 내재적인가? 성향은 근본적인가? 양상은? 시제는? 도덕성은? 확실히, 형이상학은 또한 법칙, 성향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어떻게 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주어진 개념에 부합시킬지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지지만,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근본적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 구조라는 이러한 개념은 과학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물리학은 시공간의 구조를 식별하고자 한다. 민코프스키가 동시성의 어떠한 ‘구별된’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할 때, 그는 동시성 구조가 시공간의 구별된 구조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뒤덮을 (많은) 방법들이 존재하지만, 어떤 것도 구별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시공간을 결대로 깎지 않는다. (Sider, 2009: 401)
여기서 우리는 실재의 구조에 근거하여 양화사의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의 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이 강조하는 ‘실재의 구조(structure of reality)’라는 용어는 애초에 애매성을 지닌다. 개별 과학이 탐구하는 ‘실재의 구조’와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실재의 구조’는 서로 다르다. 동일한 존재 주장이 개별 과학에서는 실재의 구조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형이상학에서는 실재의 구조에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실재의 구조’라는 용어는 ‘자연적 구조’와 ‘형이상학적 구조’로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자연적 구조: 일상적 존재 주장의 참/거짓은 개별 과학이 탐구하는 자연적 구조에 따라 확정된다. 우리는 개별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성과에 근거하여 실재의 영역에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상당히 많이 이야기할 수 있다. 가령, “블랙홀은 존재한다.”,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존재한다.”, “바이러스는 존재한다.”, “무리수는 존재한다.” 등은 모두 자연적 구조에 대응하는 존재 주장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자연적 구조’란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이 상정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개별 과학은 동일한 현상을 각각의 영역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각각의 영역마다 크게 달라진다.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가 ‘철수’라는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전공대로 자연적 구조를 기술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존재 주장들을 제시할 것이다.
생물학자: 호모 사피엔스 개체가 하나 존재한다.
화학자: 물 35L, 탄소 20kg, 암모니아 4L, 석회 1.5kg, 인 800g, 염분 250g, 질산칼륨 100g, 황 80g, 불소 7.5g, 철 5g, 규소 3g, 그 외 소량의 15가지 원소로 구성된 집합체가 존재한다.
물리학자: 수많은 쿼크, 렙톤, 게이지보손, 스칼라보손으로 구성된 집합체가 존재한다.
(2) 형이상학적 구조: 존재론적 존재 주장의 참/거짓은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구조에 따라 확정된다. 우리는 개별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성과와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실재의 영역에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가령, “블랙홀은 존재한다.”,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은 존재한다.”, “바이러스는 존재한다.”, “무리수는 존재한다.” 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것도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하는 존재 주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구조’란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단일한 의미를 지닌다. 형이상학은 현상을 근본적 층위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근본적 층위를 기준으로 고정된다. 형이상학자가 ‘철수’라는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전공대로 형이상학적 구조를 기술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는 다음과 같은 존재 주장을 제시할 것이다.
형이상학자: “철수가 존재한다.”라고 기술되는 현상을 촉발시킨 사물 자체 X가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양화사가 ‘실재의 구조’에 대응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양화사가 ‘자연적 구조’에 대응한다는 주장과 양화사가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즉, 자연적 구조에 대한 탐구에서는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가 다의적이고,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한 탐구에서는 ‘존재한다’라는 용어의 의미가 일의적이다. 두 가지 구조를 ‘실재의 구조’라는 하나의 용어 아래에서 뒤섞고자 하는 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이 이러한 문제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양화사가 대응하는 ‘실재의 구조’가 자연적 구조라고 주장하는 선택지이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개별 과학에 따라 자연적 구조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생물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 화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 물리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는 모두 동일한 현상에 중첩적으로 대응된다. 개별 과학이 제시하는 존재 주장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 주장들은 모두 참으로 확정된다.
―두 번째는 양화사가 대응하는 ‘실재의 구조’가 형이상학적 구조라고 주장하는 선택지이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개별 과학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구조는 단일한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가령, 생물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 화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 물리학이 말하는 ‘자연적 구조’ 중에서는 어느 것 하나만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되거나 어느 것 하나도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되지 않는다.3 개별 과학이 제시하는 존재 주장들이 형이상학적 구조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상, 그 존재 주장들은 모두 거짓으로 확정된다.
어느 쪽의 선택지가 이론적 부담이 적은지는 꽤 분명하다. 오늘날 과연 형이상학의 존재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개별 과학의 존재 주장을 대부분 거짓이라고 지적할 만큼 대담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문스럽다. 적어도, “과학 대 형이상학의 경우에, 역사적으로 과학이 쭉 이겼다.”(Sider, 2001: 42)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형이상학을 위해 개별 과학의 존재 주장을 부정하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을 꺼릴 것으로 보인다.4 물론, 미시물리학이 기술하는 ‘자연적 구조’가 형이상학이 찾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개별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화해를 추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왜 수많은 개별 과학들 중에서 특정한 개별 과학만이 형이상학적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지를 정당화해야 하고, 다른 개별 과학들이 제시하는 자연적 구조가 어떻게 미시물리학이 기술하는 형이상학적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며, 물리학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주요 논증들에 대답해야 하는 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시 떠맡아야 한다. 물리학적 환원주의를 형이상학으로 채택하더라도 상황이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두 가지 선택지가 개별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긴장에서 열려 있는 전체 가능성인 것은 아니다. 제3의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실재의 구조’를 자연적 구조로 설명하는 입장과 형이상학적 구조로 설명하는 입장이 모두 참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실재를 자연적 구조에 따라 기술하고자 하는 입장은 개별 과학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제시된 존재 주장들을 모두 참인 것으로 인정하고, 실재를 형이상학적 구조에 따라 기술하고자 하는 입장은 형이상학의 근본적 층위에서 제시된 존재 주장만을 참인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입장 중에서 적어도 어느 하나 이상은 부정되어야 한다. (a) 실재가 자연적 구조를 지닌다는 입장이 부정되거나, (b) 실재가 형이상학적 구조를 지닌다는 입장이 부정되거나, (c) 실재가 자연적 구조나 형이상학적 구조를 지닌다는 입장이 모두 부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세 번째 선택지가 분명해진다.
―세 번째는 양화사가 ‘자연적 구조’나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얻는다는 가정을 모두 거부하는 선택지이다.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개별 과학의 다양한 자연적 구조와 형이상학의 단일한 형이상학적 구조 사이의 이분법이 양화사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한 적절한 이론적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가령, 이러한 입장으로는 의미에 대한 침묵주의(비트겐슈타인), 신실용주의(로티), 비실재론(굿맨), 추론주의(브랜덤) 등이 있다. 양화사의 의미가 실재의 구조에 대한 기술과는 무관하게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자연적 구조와 형이상학적 구조 사이의 갈등에 대한 대답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될 만한 입장은 첫 번째와 세 번째이다. 두 선택지는 모두 (강조점은 다르더라도) 양화사 변이 이론을 긍정하고 있다. 즉, 양화사가 ‘자연적 구조’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은 생물학, 화학, 물리학 등 개별 과학에서 제시되는 존재 주장들이 모두 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존재한다’라는 용어는 개별 과학의 다양한 영역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양화사가 ‘자연적 구조’나 ‘형이상학적 구조’ 어디에도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은 실재의 구조에 대한 기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존재 주장들까지도 얼마든지 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존재한다’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서는 ‘셜록 홈즈’ 같은 허구적 대상이나 ‘초랑’ 같은 인위적 범주에 대해서조차 유의미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첫 번째 선택지와 세 번째 선택지 중에서 다시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각각의 선택지에서도 ‘존재한다’라는 용어를 위한 다양한 진리 조건을 더욱 세분화하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재의 구조’를 찾고자 하는 존재론적 실재론의 시도에 균열이 내재되어 있는 이상, ‘존재한다’라는 용어에 대한 해명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양화사 변이 이론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양화사 변이 이론은 의심스러운 의미론적 가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존재론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5
참고문헌
Carnap, R. (1956) “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 Meaning and Necessity, Second E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5-221.
Chalmers, D. J. (2009) “Ontological Anti-Realism,” Metametaphysics: New Essays on the Foundations of Ontology, David Chalmers, David Manley & Ryan Wasserman (eds.), Oxford: Clarendon Press, 77-129.
Hirsch, E. (2002) “Quantifier Variance and Realism,” Philosophical Issues, Vol. 12, 51-73.
Hirsch, E. (2009) “Ontology and Alternative Languages,” Metametaphysics: New Essays on the Foundations of Ontology, David Chalmers, David Manley & Ryan Wasserman (eds.), Oxford: Clarendon Press, 231-259.
Hofweber, T. (2009) “Ambitious, Yet Modest, Metaphysics,” Metametaphysics: New Essays on the Foundations of Ontology, David Chalmers, David Manley & Ryan Wasserman (eds.), Oxford: Clarendon Press, 260-289.
Rorty, R. (1999) “Introduction: Relativism: Finding and Making,” Philosophy and Social Hope, New York: Penguin Books, xvi-xxxii.
Sider, T. (2001) Four-Dimensionalism: An Ontology of Persistence and Time, Clarendon Press ; Oxford University Press.
Sider, T. (2009) “Ontological Realism,” Metametaphysics: New Essays on the Foundations of Ontology, David Chalmers, David Manley & Ryan Wasserman (eds.), Oxford: Clarendon Press, 38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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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티는 아마도 자신의 사고 실험을 ‘하나의 세계’와 ‘다수의 기술’ 같은 이분법적 구분에 따라 해설하는 입장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애초에 언어와 분리된 실재를 거부한다. 그러나 양화사 변이 이론이 그 자체로 언어 독립적 실재에 대한 부정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가령, 허쉬는 양화사 변이 이론과 실재론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Hisch, 2002: 52-5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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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끝났다니 다행이야!” 논증은 본래 영원론(eternalism)을 비판하고 현재론(presentism)을 옹호하기 위해 프라이어가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편속주의 역시 “그게 끝났다니 다행이야!” 논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편속주의는 대개 영원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편속주의와 현재론을 결합시키는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Sider, 2002: 68-7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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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더는 ‘지시 자성(reference magnetism)’이라는 용어를 통해 두 가지 가능성을 설명한다. 즉, 존재(existence)의 지시 자성이 강할 경우 우리의 언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는 실재에 내재된 양화 구조를 결대로 잘 깎아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 최선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존재(existence)의 지시 자성이 약할 경우 우리의 언어 중 어느 것 하나도 실재에 내재된 양화 구조를 결대로 잘 깎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양화 구조에 대응하는 언어인 존재론어(ontologese)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Sider, 2009: 410-41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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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베버는 형이상학을 통해 과학을 부정하고자 하는 ‘겸손하지 않은(immodest)’ 태도가 과학적 이론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한다(Hofweber, 2009 262-263 참고). 또한 그는 지시 자성에 근거하여 존재론어를 만들고자 하는 사이더의 시도가 일종의 ‘비의적인(esoteric)’ 형이상학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Hofweber, 2009 27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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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선택지는 ‘경량급 실재론(lightweight realism)’, ‘중량급 실재론(heavyweight realism)’, ‘반실재론(anti-realism)’이라는 차머스의 구분에 각각 대응한다. 따라서 우리의 논증은 중량급 실재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양화사 변이 이론의 두 가지 형태인 경량급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도출하는 전략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Chalmers, 2009: 92-99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