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과 장애의 철학

평소에 장애인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감각기관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에게 철학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철학에서는 퀴어 이론에서 다루는 성별 불일치 같은 요소를 제외하면 감각기관이나 사고능력의 장애, 인격장애나 정신적 병리증상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정신질환이나 감각기관의 장애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식론이나 윤리학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부분이 조금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이성적인 동물이 인간이다, 사유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을 무엇으로 여길까요? (철학자와 정신질환자의 관계에 대한 예시를 들자면, 러셀이 청소년기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자신의 큰아버지를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고 공포심에 휩싸인 경험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학 원리는커녕 기본적인 논리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에겐 철학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안면실인증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요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안면실인증을 사람의 얼굴을 헷갈리거나 구별하지 못하는 정도로 여기지만 증세가 심한 경우 자신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굳이 테세우스의 배 같은 본질과 변화에 대한 사고실험을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면실인증 환자분들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는 테세우스의 배도 보는 각도나 배 주변의 환경에 따라 이미 다른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과 보편 윤리의 관계, 시각장애인과 미술, 청각장애인과 음악, 뇌병변이나 발달지체에 의한 언어장애인과 사피어 워프 가설의 관계 등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들을 처음 떠올렸을 때는 철학에 대해 지금보다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고 지금도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글과 같은 내용이 이미 철학계에서 논의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스스로 던진 주제들과 질문들에 답하거나 건설적인 사고를 통해 논의를 발전시키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분이 계신다면 꼭 의견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의 문제점, 글쓰기 방식에 대한 지적은 항상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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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질환 및 장애는 아쉽게도 지난 수천년간 철학에서 그리 자주 다뤄지지는 않았던 주제입니다만, 근래에는 매우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애 관련 담론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 영어권의 경우 해당 주제는 아마 현재 가장 각광받고 있는 주제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 몇몇 유용한 링크를 달아봅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mental-disorder/

https://plato.stanford.edu/entries/dis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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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에서는 장애나 정신질환의 사례가 꽤 오래 전부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많이 논의되었어요. 오늘날의 영어권 지각철학에서는 색맹, 맹시, 환각 등의 사례가 지각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질 수 없는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을 정도로요.

대륙철학에서도,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같은 20세기의 고전적 연구에서부터 이미 뇌손상 환자 사례나 환상통 사례가 다루어져요. 더 나아가,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정신질환과 정신의학 역사를 다룬 책이면서도 20세기 프랑스 철학과 사회학의 고전으로 잘 알려져 있죠. 프로이트의 저작들의 경우, 그가 정신과 의사였던 만큼, 정신 질환 사례로 가득하고요.

주로 이런 사례들은 지식, 지각, 진리 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상식을 깨는 반례로 아주 중요하게 부각돼요. '정상적 인식 상황'을 자명하게 가정하고서 성립한 철학적 논의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이런 장애나 정신질환의 반례만큼 강력한 것도 없으니까요. 물론, '장애'나 '정신 질환'이라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여 그 주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철학이라면 아주 최근에서야 등장했겠지만, 장애와 정신 질환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상식을 깨는 철학적 논의들이라면 이렇듯 철학의 여러 분야에 이미 녹아들어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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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아이디어에 대한 각론만을 달고자 합니다.

아마 이 연구를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언어 장애란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제 임의대로 구분하면 대략 세 가지 입니다. (a) 함묵증처럼 어떠한 심리적 원인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경우, (b) 청각 장애나 조음 장애처럼 언어를 담당하는 뇌 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나, 실제 언어를 구사하는데는 문제가 있는 경우 (상술하자면, 청각 장애 자체는 언어를 구사하는데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습니다. 수어도 단순한 제스처가 아닌 언어니깐요. 다만 발성 언어를 구사하는데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는 발성 언어 습득에 필요한 정보가 청각 장애로 인해 당사자에게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c) 발달 장애나 조현병(정신분열증) 등으로 언어를 담당하는 뇌 기능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경우.

이 중에서 (c)의 케이스와 (b)의 케이스는 이론적으로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경우라 여겨집니다. 과격한 발언일 수 있지만, (c)의 케이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언어의 규칙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거나 화자의 복잡한 의도를 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온전한 '언어'로 칭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따라서 사피어-워프 가설의 대상이 될 수 없겠죠.)

우리는 (언어 중추에 문제가 없는 이상) 어떠한 형태로든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언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하죠. 대표적으로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내는 크레올언어라던가, 발성 언어가 불가능한 사람이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수화 등이 존재하죠.
가장 드라마틱한 예시라면 (b)에 해당하는 "니카라과 수어"가 있습니다. 니카라과 사회주의 정부 주도로 1970년대에 생긴 청각장애 학교에서, 기존에는 아무런 '수어' 같은 체계적인 언어가 없었던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낸 언어이지요.

(3) 한편 (c) 케이스에 해당하는 분들의 "언어"는 [발달장애의 케이스는] 제스처에 가깝거나 (제스처에 가까워도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화행과 타인의 의도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현병 환자의 경우] 저희가 멋대로 해석하는 내용일 뿐이지요. (시를 해석하듯 말입니다.) 이를 언어라 규정하기에는 어려워보일듯 합니다.

(4)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i) 하나는 강한 해석으로, 언어가 다를 경우, 화자가 이해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ii) 다른 하나는 약한 해석으로, 언어가 다를 경우, 화자가 "먼저 인지하는 정보"가 다르다.

대체로 학자들은 (ii) 약화된 해석을 옹호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존비어가 문법 구조 상에 존재하는 한국어 화자의 경우, 문법 구조 상에 존비어가 없는 영어 화자에 비해서 상대방과 나의 사회적 서열 차이에 대한 정보를 쉽게 인지하는 편입니다. (다만 영어 화자가 사회적 서열을 '모르거나' '한국어를 배우기 전까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직관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물론 한국어 화자 사이에도 이러한 인지는 차이가 있으며, 점점 한국어 존비어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화자는 과거 화자보다 서열에 대한 인지 능력이 약하겠지요.)

한편 태국어에는 시제 표현이 문법 구조상에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건의 시제 표현을 직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태국어 화자는 영어 표현에서 시제 표현을 누락하거나 틀리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태국어 화자가 과거/현재/미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사건이 복잡해지고 사건들의 시제가 복잡해질수록, 시제 표현이 없는 태국어 화자는 시제 구분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에 반해 시제 표현이 문법상 강제되고 복잡한 언어의 화자는 보다 수월하게 사건의 시제를 구분한다는 의미입니다.)

보다 깊은 정보는 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4부 8장을 추천드립니다. (교양서로 세계의 여러 언어에 대한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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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본질주의는 예외적 사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전공과 관련해서 몇 가지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항상 성립하거나 대체로 성립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라고 이해합니다. (플라톤에는 전자만 있는 걸로 보입니다.) 또한 어떤 것이 질료에서 멀리 있을수록 그것의 가변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했습니다(가령 기하학보다 수학이 더 정확). 학문이 일반론인 한에서는 질료에서 비롯되는 부수적 속성들은 학문의 영역에서 제외됩니다. 학문은 우연적인 것보다는 필연적인 것 또는 대체로 그런 것을 탐구하는 거니까요.

인간을 질료(동물)와 형상(생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본다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규정은 '대체로 성립하는 것'의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수학의 대상이나 신학의 대상과 달리 사람은 물질로 이뤄졌으니까요. 따라서 그러한 규정을 내린다고 해서 생각을 못하면 인간이 아니다 같은 결론은 내릴 수 없습니다. 대체로 성립한다는 것은 예외를 인정하는 거니까요. 보다 중요한 점은, 사고 능력이 인간의 본질적 요소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생각 못하는 것을 '장애'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여'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합니다. 가령 나무에게 시각이 없다고 해서 눈이 멀었다거나 장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시각 능력을 가질 그런 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나 고양이에게 시각 능력이 부재하다면 그렇게 말합니다. 즉 애초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느냐 원래부터 없는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결국 해당 사물의 본질을 다룰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일반적 사항에 관한 것이라 예외적인 것을 배제하며, 장애 혹은 특정 능력의 결여는 애초에 있어야 하거나 그래야 할 것의 이탈 또는 부재를 뜻하므로, 본질주의와 장애는 충돌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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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에 답변해주시고 자료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메를로퐁티를 비롯한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책을 읽거나 그들의 철학에 대해 깊게 탐구해본 적이 없는데(푸코 저작 몇권 읽은 것 말고는 없습니다) 소개해주신 지각의 현상학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에 강한 해석과 약한 해석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는데,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책도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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