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의 이 논변은 과연 적절한 걸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사회가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규칙은 특정한 누군가나 무언가가 정해준다기보다는 언어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행하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와 사유를 확실히 경계지을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언어의 보편적 정의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정의를 제시하실 수 있다면, 지금 목표로 하시는 "언어에서 벗어나는 사유" 역시 제시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데 저는 그러한 정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고, 따라서 비언어적인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저는 하이데거 전문가나 비트겐슈타인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들도 역시 이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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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히 긴 댓글을 달려고 했지만, 아예 쓰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아 이렇게 한줄로 잘라서 올려볼까 합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렇게 형이상학적일 것이라면, 대체 왜 현상학이 그의 철학을 뒷받침해줘야 하는 것입니까?

저도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현상학은 현상들 배후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대개는 현상 자체가 아예 주어져 있지 않기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서 현상학적 기반이 요구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답변은 @YOUN 님이 작성한 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도 더 이상 깊게 이야기하면 실례인 것 같아 말하지 않겠지만, 저는 도저히 정당성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라는 주장 또한 근거를 세울 수 없겠죠. 시간에 대한 수많은 그의 분석, 탈자태나 존재의 지평과 같은 것도 쓸모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와 완전히 척을 져서, 시간을 사물처럼 보는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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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하이데거의 방대한 Heidegger Gesamtausgabe의 일부만을 대부분의 하이데거 전공자와 연구자들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미지의 텍스트들 속에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 자신의 입장 자체가 변화했을 수도 있고요...열정적인 탐구정신 존경합니다.

(1)

@TheNewHegel@cottoncandy .

두 분의 의견 교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합니다.

언어(language)와 개념(concept)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처음 @cottoncandy 님이 수학을 '비언어적'인 사유의 예시로 가져온 것을 보았을 때, 이는 '자연 언어'가 아니라는 의미로 가져오신 듯합니다. 자연 언어, 즉 인간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언어와 수학을 확실히 구분되죠.
다만 @TheNewHegel 님이 지적하시듯, 수학은 '자연 언어'는 아니지만 일종의 '언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명제 - 의미 - 진리값 - 규칙 같은 요구 사항은 제가 볼 때 조금 '언어'를 엄격하게 보는 듯하지만, 여하튼 수학 역시 작은 단위들을 가지고, 그 단위들을 합해서 어떠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2)

이러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일단 이 사례는 언어 장애의 종류가 다양하고 논의가 깔끔해지지 않으니, 동물의 예시를 들어볼까합니다.
일단 인간과 같은 형태의 자연 언어를 동물이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은 명확한 듯합니다. (적어도 인간이 아직 번역하진 못하고 있죠.)
하지만 이 동물들이 '개념'(concept)을 가지지 않는다 하긴 좀 뭐한 듯합니다. 개념, 즉 생각/사고를 구성하는 단위가 없다고 하기에, 이 동물들은 나름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리고 있긴 하거든요.
그렇다하면, 우리는 동물을 통해 비-언어적 개념의 가능성을 찾은 겁니다.
(물론 비 언어적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고, 정확히 이게 무엇이며 언어적 개념과 어느정도 일치/환원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들이 있습니다.)

SEP에는 비개념적 심적 내용이라는 항목으로 (제가 설명한 비-언어적 개념이) 올라와있습니다. ( Nonconceptual Mental Conten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 아티클을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다만 이 아티클 역시 언어/개념의 차이에 대해서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있긴합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논쟁이 가끔 헛돌고 허수아비 공격에 가까워지는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3)

내용을 추가하는 차원에서, 예전에 적은 인간의 언어 장애에 대한 간략한 개괄을 부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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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할 만한 좋은 내용들을 공유해주시고 논의를 풍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언어와 개념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제안에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언어 이전에 성립하는 비언어적 개념이란, 등장 맥락을 보았을 때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들을 유적으로 분류하고 식별할 수 있는 심적 능력을 일컫는 듯합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상정되었듯 인식의 "본유적인 능력"(innate ability) 같은 의문스러운 장치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언어적이지 않으면서 사물들에 대한 고수준의 식별과 이해, 추론, 증명 등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무엇일지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Sellars, 1991a, p. 335; 1991, pp. 160-161).

언어능력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의 예시가 거듭 언급되어서 덧붙이자면, 이들을 (적어도 본 질문에서 요구되고 있는 의미에서) 사유하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심적 사건이 발생하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해서 처리하고 그에 따라 반응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심리적 능력들이 사유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적 능력만 가지고는 이들이 상황에 대한 "파악"과 "판단"을 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파악"이나 "그른 판단"이라는 말을 쓰듯이 "파악"이나 "판단"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입니다(이병덕, 2015,pp. 189-191). 그러므로 만일 여기서 "사유"라는 말이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뜻한다면, 이런 의미에서는 이들을 사유하는 존재로 분류하기에 힘들 것 같습니다.

제시하신 구별은 현대철학에서 지각적 지식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개념주의/비개념주의 논쟁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원문의 질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는 고도의 수학적인 증명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언어가 아닌 사유가 있다는 주장 같은데, 그렇다면 언어와 개념을 구별하고 비언어적 개념을 동물 등에 귀속시킨다고 해서 질문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학적 지식은 명제적인 형식을 띠고 참이나 거짓일 수 있으며 규칙에 지배되는 지식이어서 언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병덕 (2015). 「소사의 동물 지식 이론과 인식적 규범성」. 『철학연구』, 108. pp. 185-208.
Sellars, W. (1991).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I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pp. 127–196). Ridgeview. p. 160
Sellars, W. (1991a). Some Reflections on Language Games. I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pp. 321–358). Ridg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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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리멸렬한 질문에 계속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가 보기에 제가 말하는 "언어"는 "자연 언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처음 말하려고 했던 주제는 하이데거였죠.
저의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의 주요 논점은 하이데거의 "이해의 현사실성"이나, "해석학적 순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명제에 대해서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근본기분의 조화로운 관계라는 말을 벗어나고도 명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과학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뉴턴의 법칙과 같이 자연과학의 법칙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꽤 이상한 점이 자리잡아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언어"를 정의하기 위해 "파악"과 "판단"을 정의하려고 하는 장대한 무한소급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로,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입니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Smullyan의 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에 대해서도 잘 나와있지만, "참"만큼 이상야릇한 개념이 또 없습니다. 수학과 논리학에서도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메타개념이며, "철학"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괴델이 괜히 플라톤주의를 지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소사라는 분이나 이병덕이라는 분이 이 정리에 대해서 당연히 알 것이고 이것을 반영했겠으나, 결국 "참"에 대해서 이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겠냐에 대해서는 의견의 소지가 있습니다. 귀속된다고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냐는 것이죠.

둘째로, "파악"과 "판단"이라고 할 때 제가 먼저 떠올린 것은 데이빗슨의 아크라시아 개념입니다. 저는 데이빗슨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아크라시아로 볼 때 (지금과 같이 참과 거짓, 귀속의 여지와 관련이 없이) 그것이 합리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먼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크라시아가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선 더 강한 주장이 필요할지도 모르고요.

사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능력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사유하는 존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위해서 결국 보충한 논변은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이다"라는 어떤 분석철학자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저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또다른 분석철학자를 찾아낸 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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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어를 현사실적으로 사용하지 않고도 사유할 수 있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명제를 사고하는 것을 사유 중 하나라고 보고 있고요. 그리고 이의 예로 수학의 비구성적 증명과 뉴턴역학적 법칙을 들고 있습니다.

일단

  1. 사유 개념이 여러 개가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적인 사유를 생각하고 있는 반면 cottoncandy님은 명제를 사고하는 것도 사유 중 하나라고 보고 계십니다.

  2. 비구성적 증명이나 뉴턴역학적 법칙의 정립은 선이해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구성적 증명은 모순은 어떤 개념이고 어떤 대상이 모순이 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뉴턴역학적 법칙의 정립은 역학적 사건들의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 다음 '수학적 기술'이라는 과정을 지나서 법칙을 추론해냅니다.
    결국 이 두 사례가 비언어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 과정을 돌이켜봐도 자연언어든 인공언어든 언어가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논점이 돼야 하는 것은 비언어적인 사유가 아니라 인공언어의 비현사실적인 사용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이 자연언어의 자기이해 모먼트 제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공언어는 이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공언어를 생각할 때 우리가 비현사실적인 사유만을 하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공언어로 기술된 것들을 통해서 사유한다고 여길 때도 우리가 사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공언어에 자기이해 모먼트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통해서 이를 이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연언어로 봅니다.
여기서 인공언어로 사유한 내용과 자연언어로 사유한 내용 간에 단절이 있고 결국 이 단절이 있기 전에 자연언어로 사유한 내용들이 이 단절의 발생으로 지향되지 않는 것을 후설이 '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이데거도 이 맥락에 있고요.

결국 이 단절이 기존의 자연언어적 사유와 완전히 단절된 사유인가가 쟁점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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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언어의 비현사실적인 사용 여부"라는 말이 정말 좋은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인공언어의 자기이해는 자연언어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저 관조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실일지 아닐지 잘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사실이라고 둔다고 한들, 하이데거가 실재에 대한 좋은 모델을 준다는 주장에 있어선 거짓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술에 대한 물음"은 좋은 논변이 아니다고 말해야 합니다.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풍차를 자기 철학을 대표하는 사례로 두고 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요, 풍차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완벽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차는 그 바람의 힘으로 나무덩이를 아주 샤프하게 짜를 수 있었고, 이것으로 그 당시 가장 최첨단의 상선과 전투선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자본과 군사를 상징하는 것이고, 몰아세움의 상징이었습니다.

두 가지 층위가 구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cottoncandy님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제기한 문제 자체는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실제로, 비개념주의자들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와 같은 하이데거의 논제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수학은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 아닌가?"와 같은 의문 및 그와 관련한 댓글들은 다소 논점이 어긋나 있습니다. 아마도 하이데거를 비롯한 20세기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왜 언어라는 주제에 각별하게 주목하는지가 정확히 이해되시지 않으셔서 문제에 잘못 접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1.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논증하지 않았다.

우선, 제대로 지적하신 것처럼,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justification)'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술(description)'하고 있을 뿐입니다. 애초에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 저술입니다. 현상학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대상을 탐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대상에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특징들을 포착해내어 제시하는 작업이 현상학적 탐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와 같은 현상학자들의 텍스트에서는 직접적인 논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폴트(Richard Polt)가 이 점을 자신의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폴트의 책 Heidegger: An Introduction , Ithaca, N.Y. :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p. 39의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논증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하이데거의 글에서 결함인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와 같은 시구가 논증이 아니라고 해서, 이 시구가 무조건 '틀렸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상학적 글쓰기는 일종의 시적 글쓰기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닙니다. 독자가 그 글이 드러내고자 하는 통찰에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에 따라 그 글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아닌지가 크게 좌우됩니다.

그래서 사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처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철학적 논의들이 어떤 논증을 통해 뒷받침되는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하이데거보다는 (a) 하이데거 계승자들의 논의, (b) 하이데거에 대한 영미권 연구자들의 논의, (c) 1960년대 이후 후기 분석철학자들의 논의를 찾아보시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이데거가 번뜩이는 통찰로 제시한 논의들을, 이 사람들은 보다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해설합니다.

2. 왜 철학자들은 언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가?

20세기 이후 철학에서 언어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세계를 결코 순수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논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곧 언어다."(가다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캉),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데리다)와 같은 논제들은 모두 우리의 인식이 언제나 특정한 배경과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아마도 cottoncandy님은 '언어'라는 것으로 한국어나 영어 같은 제한된 형태의 문화적 질서만을 떠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언어'에는 그런 형태의 언어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논의가 더욱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언어'란 사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상정한 '현상/실재', '주체/객체', '기표/기의', '마음/세계' 등의 이분법에서 '현상', '주체', '기표'의 영역에 해당하는 모든 요소들입니다. 즉, 언어학에서 다루어지는 제한된 상징 형식을 넘어서, 그동안 철학이 "그건 단순히 너의 선입견이잖아?", "그건 그냥 문화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은 아니잖아?", "그건 현상일 뿐이지 실재와는 무관하잖아?"라고 폄하한 모든 것이 '언어'로 통칭됩니다. (그래서 데리다의 경우에는 어느 인터뷰에서 "텍스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이라고 답하면서 "원자폭탄도 텍스트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 모든 것이 '언어'라는 이름 아래에 묶이는지는 여기서 설명드리기에는 너무나 길고 복잡합니다. 간략하게만 말하자면, 우리가 그동안 순수하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한 지식들이 언제나 특정한 '관점'이나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고, 특정한 '개념 틀'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고, 특정한 '규범'이나 '규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 언어적 전회를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이런 '관점', '태도', '개념', '규범', '규칙', '맥락' 따위를 모두 통칭하는 말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수학은 언어를 벗어난 사유 아닌가?"라는 식의 질문들은 다소 논점을 벗어나 있습니다. (더욱이, 반드시 철학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수학의 기호나 계산이나 증명 등이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져 있다"라는 갈릴레이의 유명한 말처럼 수학은 수학자와 과학자들에게조차 일종의 '언어'라고 당연하게 여겨지니 말입니다.) 핵심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한지에 있습니다. 모든 사회-문화적인 관점, 태도, 개념, 규범, 규칙 등을 벗어나서, 실재를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들 철학자들을 비판하시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탈맥락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 20세기 철학에서 일어난 언어적 전회의 이유와 양상에 관현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29898421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17878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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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아닌 사유가 있다"와 "자연언어 아닌 사유가 있다"는 완전히 다른 주장입니다. 저는 딱히 후자에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여태껏 제시된 사례들(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 거짓 명제를 공리로 받아들이는 쓸모없는 수학 체계, 비개념적인 심적 내용)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주장에 대한 예시였나요? 만일 정말로, 거짓 명제들을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만든 공리계를 자연언어 아닌 사유의 예시로 제시하신 거라면 저는 그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언어 아닌 사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 아닌 사유가 있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굳이 사용되는 개념들을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비언어적인 사유라고 주장되는 반례의 후보들이 실은 언어적이거나 아예 사유가 아니라는 점을 보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본 글타래에서 "언어", "파악", "판단", "진리"에 대해 어떤 정의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시된 반례들(비구성적 증명, 비개념적인 심적 내용, 비개념적 파악과 판단)에 대해 각각 (1) 비구성적 증명이 추론이라는 언어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 (2) 심리적 활동은 그것만으로는 애초에 사유라고 간주하기 어렵다는 점, (3) 파악과 판단이 진리담지자(truthbearer)이며 진리담지자는 명제 형식을 띤다는 점을 근거로, 이 반례들이 실은 반례가 아니라는 점을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사용되었던 개념들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가 있다는 논제를 공박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무한 소급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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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본격적인 댓글은 내일 하겠습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때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객체’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신적 관점(God’s eye view)’ 혹은 ‘아무 곳도 아닌 관점(view from nowhere)’에 놓이게 된다. 곧, 인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와 동떨어진 채, ‘세계-밖’의 자리에 위치하여, 세계를 ‘앞에-세움’으로써 즉자적인 세계 자체를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이 상정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철학적 고민은 바로 이러한 관점이 과연 어떻게 정당하게 전제될 수 있는 것인지, 수리-물리학의 이론이 과연 어떻게 이러한 관점을 선취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인지를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라는 말을 그 링크에 남긴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저히 저는 이것이 좋은 논변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데카르트의 책을 다 읽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진짜로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카르트 이후로 거의 모든 철학자는 이 소박한 주체/객체 구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 저는 도저히 데카르트 이후로 이것을 주장한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버클리나 흄도 굉장히 오묘한데 이 사람들이 말했을 거라고 느껴지지도 않고요. 진짜 극단적이기로 악명높은 도노소 코르테스라던지 필립 메인랜더 같은 사람도 이걸 지지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자, 여기 '신적 관점'과 '아무 곳도 아닌 관점'이 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라고 할 때 진짜 그 양자택일을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당연히 할 답변은 "너의 논리적 도식이 잘못되었다" 아니겠습니까?
결국엔 리처드 로티가 아주 함축한 논변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언어적 전환을 위한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이 주장이 당연히 나올 것입니다 : 이 주체/객체라는 아주 오래된 문제를 꼭 언어적 전회로 풀어야만 하는가?

(1) 한 가지 용어상 혼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적 관점(God’s eye view)', '새의 관점(bird's eye view)', '영원의 관점(the point of view of eternity)', '아무 곳도 아닌 관점(view from nowhere)'은 모두 동의어입니다. 이 용어들은 탈맥락적이고 탈시간적인 객관적 관점을 의미합니다.

(2) 데카르트와 관련해서는 예전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2023년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생 학술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이기도 합니다.

(3) "주체/객체라는 아주 오래된 문제를 꼭 언어적 전회로 풀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 자체는 충분히 제기할 만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댓글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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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근대철학이 '주체/객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빠져 있었다거나 근대철학이 '주체성의 철학'이었다는 것은 후대 철학자들의 철학사적 해석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하이데거가 「세계상의 시대」에서 제시한 해석이죠.) 근대철학의 텍스트 자체만을 뒤져서는 애초에 '주체'라는 용어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해석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는 따져볼 수 있는 열린 문제이지만, 단순히 "데카르트는 그런 표현이나 구도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사실만으로는 이 해석이 논박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그 해석의 핵심은 근대철학자들 자신들이 의도하거나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런 식의 이분법적 도식을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전제하였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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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 말을 수정하죠. 제가 말하는 "언어"가 뭔지는 저도 모르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것은 "자연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말하려고 했던 "언어"의 정의는 너무나도 생소해서 굉장히 극단적인 예시만 든 것이고요.

또 "파악과 판단이 명제 형식을 띤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A. 파악과 판단이 진리담지자이다 B. 진리담지자는 명제 형식을 띤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단어가 수리논리학적 단어는 아닌 것 같네요.
위키피디아에서 쳐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A truth-bearer is an entity that is said to be either true or false and nothing else.

다시 저는 일반논리에 대한 이야기에서 또 수리논리적 이야기를 꺼내게 되지만, 이 단어는 이론적으로 너무나 가난한 단어입니다. syntax와 semantics에 있어서도 "참"과 "거짓"에 대해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파악과 판단과 같은 그런 고차원적인 개념이 참과 거짓만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다못해 하이데거 같은 사람도 "파악"이나 "판단"을 진리담지자처럼 쓰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이런 점에서 비판하고 싶습니다.

  1. "습관은 우리가 가진 세계에의-존재를 확장하는 능력을, 혹은 우리를 새로운 도구들에 병합함으로써 실존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낸다... 만약 습관이 인식도 아니고 자동 장치도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두 손 안에 존재하는 앎, 즉 오로지 몸에 따른 노력에로 이행될 뿐 객관적인 가리킴으로 번역될 수 없는 앎이다. 주체는 자판 위의 키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마치 우리의 팔다리 중 어느 하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듯이 안다. 이는 친숙성에 의거한 앎인데, 이러한 앎은 객관적인 공간에서의 위치를 가리키지 않는다."
    "습관의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한다'는 것과 몸에 대한 생각을 고치도록 이끈다.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주어지는 것 사이에서 그리고 의도와 실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응을 경험하는 것이다 - 그리고 몸은 세계에 내리는 우리의 닻이다. 내가 손을 나의 무릎을 갖다댈 때, 나는 운동의 매 순간 나의 무릎을 관념이나 심지어 대상으로서 겨냥하지 않는 의도의 실현을 경험한다."

현상학이 기술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기술이라고 해서 비판의 여지를 줄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 증거로 현상학을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은 당연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그 당시 최신과학을 인용하고 환상통을 언급한 사람인 메를로퐁티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설령 자기 철학이 보이지도 않고 주어지도 않는 것에 대한 포착을 중점적으로 두었다 한들, 이런 그의 접근이 인간 신체에 있어 올바른 이론인가 하는 물음에는 당연히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가 제기한 질문은 아직도 합당하다고 봅니다.

  1. 현상학적 글쓰기에 대해서 정당화를 찾을 수 없고, 이것이 전부 기술에 불과하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이데거의 모든 "시간성" 논의가 시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x라고 치환하고 언어를 y라고 치환하셔야 합니다. 대체 "시간"과 같은 단어로 본의아닌 논란거리를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더 이상 베르그송처럼 물리학자의 수리물리학적 시간 논의에 접근하지 말고 자신이 하는 것이 전혀 다른 논의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분명히 아니죠. 존재와 시간에서는 뜬금없이 헤겔의 시간 논의를 언급하고 있으니까요.)

  2. 이제 언어 논변으로 들어가는데, 저는 이것이 결국 핵심을 회피하고 있는 논변이라고 봅니다.
    "'현상/실재', '주체/객체', '기표/기의', '마음/세계' 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모든 요소가 전부 언어에서 판을 맞대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가 논변 같은데, 이것은 언어가 철학에서 중요하다는 주장은 될 수 있어도 언어가 왜 철학에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빈약한 논변입니다.
    왜냐면, 대체 왜 언어에서 그것을 다뤄야 합니까? 그냥 각자 따로따로 두어서 논쟁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저는 이것을 "역사"로서도 다룰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이 논변은 결국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현존재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곧 언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 모든 철학자의 주장은 "언어가 현대철학에서 중요하다"를 보충할 수 있어도, "이것이 언어가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이유이다"에 대해서는 남지를 못합니다. 각각의 철학자들의 주장이 될 뿐, 이 주장은 그저 아포리즘으로 남게 될 뿐입니다.

"실재를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이라 했는데, 속된 말로 이건 너무 나이브합니다. 거의 그 누구도 이 주장에 맞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론 실재를 순수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인 랜드와 괴델뿐입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탈맥락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는 허수아비 논변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고 묻는다면, 저는 주관적이고 맥락적인 인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적 대상에 도달할 수 있다 - 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것은 레비 브라이언트와 같은 사변적 실재론의 루트입니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져 있다"라는 갈릴레이의 말은, 사실 저의 주장을 돋보이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은 믿을 필요가 없지만, 그 '책'은 믿어야 한다."라는 폴 에어디쉬의 말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다른 언어로는 자연에 접근할 수가 없고, 오직 수학이라는 것을 사용해야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수학/언어 구분을 아주 날카롭게 구분한 표현인 것입니다.

갈릴레이의 철학을 다룬 책으로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From the Closed World to the Infinite Universe가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그 이전의 과학자와 다른 점을 명확하게 구분해줍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를 벗어나 플라톤주의로 돌아간 사고실험의 사람이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실재와 현상의 끈끈한 연관관계를 끊고 모든 것에 있어 빠짐없는 수학화와 기계론을 두어 접근해야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말과 사물 중에서, 그 전까지 말이 너무나 우세했던 그 시대에 있어 첫 번째 사물로서의 억제기였던 인물이었습니다.

cottoncandy님의 철학적 입장이나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사실 제가 읽기에는 댓글들의 논점이 많이 일탈되어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34절의 논변은 과연 적절할까요?"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루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세부 주제들로 댓글의 논의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가령,

(1) 현상학적 기술도 비판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네, 당연히 비판될 수 있습니다. 현상학 전통 바깥에서도 현상학적 기술을 비판하지만, 현상학 전통 내부에서도 이전 현상학자들의 기술에 대한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무리하게 '현상학적 기술 일반'의 비판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논의의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가령, 누구의 현상학적 기술을, 어떤 텍스트에 등장한 현상학적 기술을, 비판해야 하는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논의들이 겉돌기만 할 뿐입니다.

(2) '시간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무의미한가?: 이 주제도 제시하신 논의 맥락에서 심하게 일탈된 문제입니다. 물론, 당연히 하이데거의 시간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갑자기 '시간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이데거의 모든 "시간성" 논의가 시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쓸어버리는 것입니다."라는 대단히 과격한 주장이 제시하신 한 문단만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이 주제도 하이데거의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인 독해 과정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다지 생산적인 논의가 아닙니다.

(3) 언어의 편재성(ubiquity)에 대한 논증은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가?: 이 주제도 댓글로 이렇게 다루기에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이데거를 비롯하여 언어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라캉, 데리다 등의 논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인용과 구체적인 논박이 필요합니다. 제가 제시해 드린 간략한 논의 구도가 불충분한 탓이겠지만, 20세기 철학에서 등장한 언어의 편재성 논의는 사실 굉장히 복잡한 주제입니다. 적어도, 저로서는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해서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라캉, 데리다 등의 언어철학을 아우르는 온갖 논의들을 cottoncandy님께서 납득 가능하도록 이 댓글에서 깔끔하게 요약해 드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처음 글을 쓰신 목적인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일단 만족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상으로 댓글에서 문제를 확장시키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4) 사변적 실재론 루트가 대안인가?: 이 문제제기도 너무 큽니다. 레비 브라이언트 같은 철학자들이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런 입장들에 대해 당연히 이런저런 의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레비 브라이언트의 철학을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작업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제를 정확히 제한해서 분절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5) 수학에서는 날고 뛰는 사람이 토플에서는 젬병이다?: 갈릴레이에 대해 제시하신 내용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역시 본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는 이야기들입니다. 자꾸 주제를 확장하게 되면 모든 논의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다만, "수학에서는 날고 뛰는 사람이 토플에서는 젬병인 사람이 수두룩인데?"라는 점은 수학이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반례가 아닙니다. 제가 한국어 원어민 화자이지만 토플에서는 젬병이라고 해서, 한국어가 언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수학과 토플 사이의 관계를 가지고 수학이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적 오류이기에 지적드립니다.

종합하자면, cottoncandy님께서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말하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저는 그런 태도가 cottoncandy님의 철학적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cottoncandy님이 제기하신 문제들 자체가 아주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제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문제제기가 논의를 점점 엉키게 만든다는 점은 알려드립니다. cottoncandy님의 문제제기들에 대답해드리기 위해서는 (a) 『존재와 시간』 34절에 대한 해설-반박-재반박, (b) 현상학적 기술에 대한 해설-반박-재반박, (c) 언어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20세기 철학자들 각각에 대한 해설-반박-재반박, (d)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해설-반박-재반박이 모두 요구됩니다. 적어도, 저는 이 모든 주제를 댓글에서 다 다룰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어느 누구도 이 주제를 모두 다룰 능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단순히 '능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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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너무 심해지는 것 같아 농담을 넣었는데 정말 생각해보면 좋은 것이 아니었군요. 그 문구는 편집해서 지웠습니다. 그저 5번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수학/언어의 구분이 심하다라는 것으로만 남겨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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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지적 감사드립니다.

1번과 2번 지적에 대해 -
일단 이런 주장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현상학에서 당연히 비판은 이루어질 것이고, 비판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시간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대체 왜 나오냐고 주장하셨는데, 이것은 제가 지금 가고 있는 방식에 대한 아주 합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상학 자체에 대한 질문은 이 댓글에서 완전히 끝내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부분에서 다시 끼어들기를 하고 싶은 것은, 저의 주장의 기반에 담겨져 있는 이 과도한 주장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를 체계적이고 이론적이라고 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업니다. 하이데거의 말이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도움을 주고 어떠한 인생철학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뭔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철학에서 하이데거주의를 쓰다던가, 말이죠.)

하이데거가 꽤나 체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하이데거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모든 개념들이 끈끈히 연결되어있으며, 하이데거의 수많은 단어들은 다른 하이데거의 수많은 단어들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존재와 시간 34절도 그렇죠. 바로 그 뒤 35절이 "빠져 있음" 중 하나인 "idle talk"입니다. 이 35절의 하이데거가 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빠져 있음"을 보충하기 위해서 34절을 쓴 것입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주의자였을 때 이 언어와 시간성을 더 크게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체계성의 부족을 들어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책을 "더" 구체적으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가이아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은 꼭 가이아 이론을 설명한 책을 읽지 않고도, 아니면 가이아 이론 관련된 책을 전부 읽지 않고도, 그 이론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사용하긴 헐겁겠지만, 애초에 하이데거야말로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면서 모든 철학을 싸잡아버렸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번에 대해서는 그저 죄송하다고 말씀드립니다.

3번과 5번 지적에 대해서 - 확실히 이 "언어철학"이 너무나도 광범위해서 이런 토론이 의미가 없다는 점은 알지는 못해도 느껴지고는 있었습니다. 유비쿼터스만 알고 편재성이 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이 편재성의 설명은 이 지면에 쓸 수가 없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과 잘못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데리다는 원자폭탄도 텍스트라고 했는데, 원자폭탄에 데리다의 이론을 쓸 수가 있습니까? 탈구축, 대리보충이 가능한가요? 물론 쓸 수야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좋은 "모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편재성이더라던가 언어가 전통적 형이상학을 전부 내재한다는 생각이라던가 같은 것을 신념처럼 가지고 있다면, 인공언어와 같은 AI의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마르크스의 유령들"), 신자유주의와 같은 인생을 깊숙히 파고들어가는 문제에 있어 너무 허약한 논변을 가질 게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언어"에 대한 과신부터 체크를 하려는 것이고요.
저는 그런 점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부터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중심주의"와 비스무리한 잘못 끼운 첫 단추같은 징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거의 같은 걸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정말 끊임없는 확장으로 넘어가는군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