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의 이 논변은 과연 적절한 걸까요?

말이 '거기에'의 존재를, 다시 말해서 처해 있음과 이해를 구성하고 있고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를 말하기에, 현존재는 말하는 안에-있음으로서 이미 자신을 밖으로 말했다. 현존재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일상적인 실존은 주로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동시에 철학 이전의 현존재 해석에서나 철학적인 현존재 해석에서 인간의 본질을 초온 로곤 에콘(말할 능력을 갖춘 생명체)이라고 규정한 것은 우연일까? 인간에 대한 이 정의를 후세에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고 해석했는데, 이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현존재에 대한 이 정의가 취해져나온 그 현상적 기반을 은폐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말하는 존재자로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소리를 발성할 가능성이 고유하게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세계와 현존재 자신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존재와 시간 34절 "거기에-있음과 말. 언어" 에 있는 문구입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말을 정당화할 수 있나요?
"현존재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라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에 대한 근거로 고대 그리스어의 어원을 가져오지만, 이것이 충분한 것이 아님은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일단 소박한 접근으로, 이것이 있습니다. 전혀 언어로 소통이 안 되는 한 장애인의 사례를 두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이 있다고, 이것을 현존재라고 할 수 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이 "인간중심주의"적인 접근으로 어떻게 이것에 반박할 수 있을지 생각이 되진 않지만, 문제는 보다 더 큰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하이데거가 "현존재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라는 주장으로서 정말 원하고 싶었던 것은, "사유가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라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비유적인 말로, 언어와 사유를 완전히 연결지을 수 있어야만 하이데거의 철학이 버틸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정의내리는 것이 굉장히 힘든 것이 분명하듯, 정말로 모든 사유가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의 예시로서 Probabilistic method (Probabilistic method - Wikipedia) 와 같은 수학의 non-constructive proof를 예로 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이 주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증명은 단지 계산이다"라고 본 논고 시절의 수학철학에서 벗어난 이후 굉장히 의문스러운 수학철학을 진행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수학"이 정말 "언어"인가, 수학의 몇몇 직관주의적이지 않은 정리들이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에 속하는 것 아닌가, 같은 물음에 답변하기 위한 굉장히 과격한 시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수학"을 "멋진 언어" 수준으로 격하하기 위한 위험한 시도였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둘 다 "언어"에 대한 아포리아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을 하지 않는 평상인들의 관점에서 언어는 어느 정도 회의적이어야 할, 좀 의심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이 둘은 언어에 대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와 같은 과도한 말을 곁들여서라도 믿어야만 하는 것, 과신해야만 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사실일지는 둘째치고, 이런 철학을 믿었을 때 과연 실재에 대한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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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의문이 들어 답글을 남깁니다.

(1) 아시겠지만 현존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현존재는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존재와 시간』, 22) 존재자, 다시 말해 늘 자기의 존재함을 문제시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사례는 현존재가 언어를 갖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전기 하이데거에서 현존재가 갖고 있는 우월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하이데거가 말할 수 없는 존재들(장애인, 말할 수 없는 자들, 동물 등)을 자기 철학의 주변부로 몰아내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2) 비구성적 증명(non-constructive proof)은 찾아보니,

(∃x)Px를 증명하려 할 때, 이를 참으로 만드는 사례 Pa를 직접적으로 찾지 않고서 우회적으로 (예컨대 ~(∃x)Px를 가정해서 이로부터 모순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증명하는 방법

이라고 이해됩니다. (제가 수학에 대해서는 비전공자 수준의 지식 이상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혹시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들으면, 비구성적 증명은 모든 사유가 언어적이라는 논제에 대한 반박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비구성적 증명이 적절한 반례로 기능하려면, 저 증명은 비언어적인 증명이어야 하고, 따라서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추론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저 증명은 (∃x)Px의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을 뿐 여전히 추론적으로 (∃x)Px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구성적 증명은 언어적인 증명이며, 반박하고자 하는 논제의 반례가 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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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증명은 비언어적인 증명이어야 하고, 따라서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추론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됩니다.

이거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추론". 이것이 "언어"의 정의인가요?

모든 언어가 추론은 아니지만, 추론은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을 구성하는 전제와 결론은 명제 혹은 문장인데, 명제란 언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증명"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i) 우리를 납득시키고, ii) 우리에게 경험적, 인과적 과정이나 사건과는 무관한 것을 보여주고, iii) 판독 가능하고 재현 가능해서 전달이 가능하고, iv) 경험적이고 수학적인 판단의 모델이나 표준을 제공하고, v) 다른 증명 이론 없이 그 자신이 기초가 될 수 있게 납득시키고, vi)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도록 우리의 개념을 바꾸게 하고, vii) 필연적이고 확실한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게끔 하고, viii) 특정한 해결책이 아닌 수학적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ix) 명제에 대한 신념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게 하며 x) 수학적 기술에 대한 오직 부분적인 통찰력을 주어서 재맥락화의 대상이 될 수 있게끔 하는 것

이 말은 마치 보르헤스의 동물 사전마냥 어느 정도는 웃긴 면을 보여줍니다. 그 어떤 수학자들도 이것을 좋은 정의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거든요.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이 모순율이나 배중률을 거부하느냐 아니냐조차도 의견이 갈리고요.
하지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마주쳤던 문제점은 꽤 복잡합니다.
왜냐면, 기존의 수학기초론 탐구자처럼 "안쪽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면, "더 높은 공리계에서는 참이나 PA와 같이 약한 공리계에서는 결정불가능한 명제" 같은 괴상한 사례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제를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이런 명제를 언어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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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와 같은 사례들은 명제의 참이나 거짓이 명제가 속한 체계에 따라 변동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명제가 비언어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릿값이 확정적이지 않거나 결정 불가능해도 여전히 유의미한 명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주에는 인간 외의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나 "이 문장은 거짓이다"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이 언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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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언어적"으로 보일 예시를 대 볼게요. 더 높은 공리계를 추구한 나머지 가장 강한 공리체계를 택한답시고 1=2를 공리로 채택한 자를 생각해봅시다. 이럴 경우 그 어떤 명제를 내준다 한들 이 공리계에서는 참이라고 되돌려주는 전혀 쓸모없는 체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경우에 대해서 "언어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오히려 이런 사람은 위에서 말했던 장애인이 현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례보다 훨씬 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아닌가요?

네, 언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체계는 비합리적이고 괴상하기는 하지만, 의미를 지니고 진릿값을 귀속시킬 수 있는 명제들의 추론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시로 드신 부조리한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 아예 언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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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예시를 하나라도 가져와주실 수 있나요?

멀리 갈 것 없이 위에서 제시하신

가 찾고 계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의 예시일 것입니다. 저기서 "전혀 언어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아예 문장을 발화하고 형성할 능력이 없고, 이러저러한 문장을 들었을 때 그 문장과 관련된 규칙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목표로 하시는 반박을 위해 필요한 것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보다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사유할 수 있는 자"의 예시 같습니다. 한데 저는 이러한 예시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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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점은 대체 누가 정한다는 말입니까?

조금 다른 길로 샌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지만, "언어"를 정의할 수 있어야 "언어에서 벗어나는 사유"를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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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이데거 전공자가 아닌 문외한이라 할 수 있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봐 몇글자 남겨봅니다. @cottoncandy 님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을 만한 좋은 논문으로 문동규 선생님의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언어의 문제>[범한철학])가 있는데요, 일단 거기에서 다루는 주요한 내용을 극히 간략히 정리해 보려 합니다.

(1) 하이데거 철학에서 말하는 '언어'는 우리가 일상어로 사용하는 용례로서의 언어와 다르고, 영미분석철학의 전통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언어'와도 다릅니다. 일상어로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이며, 영미분석철학에서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좀 거칠게 말해 언어 자체에 대한 탐구에 치중되어 있는데 비해,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는 존재와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후기 하이데거만을 일단 한정하여 보자면, 언어는 존재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현존재가 인간 자체와 동일어는 아니지만, 인간을 현존재와 연결시켜 사유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현존재는 근본기분(Grundstimmung)에 의해 존재 경험 및 언어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체로서 사용하는 도구가 언어라는 일상적 사유방식을 그대로 하이데거의 언어개념을 이해할 때 확장/적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관은 세계와 사물의 내밀함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 즉 세계를 세계로서 사물을 사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부름이 상실되어 버린 언어를 언어자체로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유명한 하이데거의 정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언어가 말한다"라는 그의 또다른 정식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말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이죠.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존재의 발현함'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존재에 대한 응답으로서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대로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근본기분(Grundstimmung)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이 근본기분이란 존재의 말과 인간의 말이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할 때, 일종의 화음과 같이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기분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심리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하세요) 즉, 존재의 소리 없는 목소리와 인간-현존재의 조음함이 바로 기분입니다. 하이데거가 슈테판 게오르게나 트라클 같은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시인은 언어의 요구, 즉 말건넴에 자신을 내맡긴다'고 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 근본기분은 존재의 목소리가 인간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됩니다. 인간은 기분 자체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4) 하이데거의 설명방식은 상식을 넘어서 있고, 영미철학적 언어관과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의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그의 논리를 계속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이데거의 설명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내릴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가 건네는 목소리와 저의 내면이 조응하는 화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할 뿐입니다. 부디 논문을 찾아서 한번 보시고 깊이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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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사회가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규칙은 특정한 누군가나 무언가가 정해준다기보다는 언어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행하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와 사유를 확실히 경계지을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언어의 보편적 정의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정의를 제시하실 수 있다면, 지금 목표로 하시는 "언어에서 벗어나는 사유" 역시 제시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데 저는 그러한 정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고, 따라서 비언어적인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저는 하이데거 전문가나 비트겐슈타인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들도 역시 이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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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히 긴 댓글을 달려고 했지만, 아예 쓰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아 이렇게 한줄로 잘라서 올려볼까 합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렇게 형이상학적일 것이라면, 대체 왜 현상학이 그의 철학을 뒷받침해줘야 하는 것입니까?

저도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현상학은 현상들 배후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대개는 현상 자체가 아예 주어져 있지 않기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서 현상학적 기반이 요구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답변은 @YOUN 님이 작성한 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도 더 이상 깊게 이야기하면 실례인 것 같아 말하지 않겠지만, 저는 도저히 정당성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라는 주장 또한 근거를 세울 수 없겠죠. 시간에 대한 수많은 그의 분석, 탈자태나 존재의 지평과 같은 것도 쓸모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와 완전히 척을 져서, 시간을 사물처럼 보는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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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하이데거의 방대한 Heidegger Gesamtausgabe의 일부만을 대부분의 하이데거 전공자와 연구자들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미지의 텍스트들 속에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 자신의 입장 자체가 변화했을 수도 있고요...열정적인 탐구정신 존경합니다.

(1)

@TheNewHegel@cottoncandy .

두 분의 의견 교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합니다.

언어(language)와 개념(concept)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처음 @cottoncandy 님이 수학을 '비언어적'인 사유의 예시로 가져온 것을 보았을 때, 이는 '자연 언어'가 아니라는 의미로 가져오신 듯합니다. 자연 언어, 즉 인간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언어와 수학을 확실히 구분되죠.
다만 @TheNewHegel 님이 지적하시듯, 수학은 '자연 언어'는 아니지만 일종의 '언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명제 - 의미 - 진리값 - 규칙 같은 요구 사항은 제가 볼 때 조금 '언어'를 엄격하게 보는 듯하지만, 여하튼 수학 역시 작은 단위들을 가지고, 그 단위들을 합해서 어떠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2)

이러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일단 이 사례는 언어 장애의 종류가 다양하고 논의가 깔끔해지지 않으니, 동물의 예시를 들어볼까합니다.
일단 인간과 같은 형태의 자연 언어를 동물이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은 명확한 듯합니다. (적어도 인간이 아직 번역하진 못하고 있죠.)
하지만 이 동물들이 '개념'(concept)을 가지지 않는다 하긴 좀 뭐한 듯합니다. 개념, 즉 생각/사고를 구성하는 단위가 없다고 하기에, 이 동물들은 나름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리고 있긴 하거든요.
그렇다하면, 우리는 동물을 통해 비-언어적 개념의 가능성을 찾은 겁니다.
(물론 비 언어적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고, 정확히 이게 무엇이며 언어적 개념과 어느정도 일치/환원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들이 있습니다.)

SEP에는 비개념적 심적 내용이라는 항목으로 (제가 설명한 비-언어적 개념이) 올라와있습니다. ( Nonconceptual Mental Conten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 아티클을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다만 이 아티클 역시 언어/개념의 차이에 대해서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있긴합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논쟁이 가끔 헛돌고 허수아비 공격에 가까워지는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3)

내용을 추가하는 차원에서, 예전에 적은 인간의 언어 장애에 대한 간략한 개괄을 부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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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할 만한 좋은 내용들을 공유해주시고 논의를 풍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언어와 개념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제안에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언어 이전에 성립하는 비언어적 개념이란, 등장 맥락을 보았을 때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들을 유적으로 분류하고 식별할 수 있는 심적 능력을 일컫는 듯합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상정되었듯 인식의 "본유적인 능력"(innate ability) 같은 의문스러운 장치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언어적이지 않으면서 사물들에 대한 고수준의 식별과 이해, 추론, 증명 등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무엇일지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Sellars, 1991a, p. 335; 1991, pp. 160-161).

언어능력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의 예시가 거듭 언급되어서 덧붙이자면, 이들을 (적어도 본 질문에서 요구되고 있는 의미에서) 사유하는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심적 사건이 발생하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해서 처리하고 그에 따라 반응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심리적 능력들이 사유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적 능력만 가지고는 이들이 상황에 대한 "파악"과 "판단"을 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파악"이나 "그른 판단"이라는 말을 쓰듯이 "파악"이나 "판단"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입니다(이병덕, 2015,pp. 189-191). 그러므로 만일 여기서 "사유"라는 말이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뜻한다면, 이런 의미에서는 이들을 사유하는 존재로 분류하기에 힘들 것 같습니다.

제시하신 구별은 현대철학에서 지각적 지식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개념주의/비개념주의 논쟁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원문의 질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는 고도의 수학적인 증명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언어가 아닌 사유가 있다는 주장 같은데, 그렇다면 언어와 개념을 구별하고 비언어적 개념을 동물 등에 귀속시킨다고 해서 질문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학적 지식은 명제적인 형식을 띠고 참이나 거짓일 수 있으며 규칙에 지배되는 지식이어서 언어라고 말하기에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병덕 (2015). 「소사의 동물 지식 이론과 인식적 규범성」. 『철학연구』, 108. pp. 185-208.
Sellars, W. (1991).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I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pp. 127–196). Ridgeview. p. 160
Sellars, W. (1991a). Some Reflections on Language Games. In Science, Perception and Reality (pp. 321–358). Ridg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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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리멸렬한 질문에 계속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가 보기에 제가 말하는 "언어"는 "자연 언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처음 말하려고 했던 주제는 하이데거였죠.
저의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의 주요 논점은 하이데거의 "이해의 현사실성"이나, "해석학적 순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명제에 대해서 말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근본기분의 조화로운 관계라는 말을 벗어나고도 명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과학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뉴턴의 법칙과 같이 자연과학의 법칙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꽤 이상한 점이 자리잡아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언어"를 정의하기 위해 "파악"과 "판단"을 정의하려고 하는 장대한 무한소급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로,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입니다"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Smullyan의 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에 대해서도 잘 나와있지만, "참"만큼 이상야릇한 개념이 또 없습니다. 수학과 논리학에서도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메타개념이며, "철학"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괴델이 괜히 플라톤주의를 지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소사라는 분이나 이병덕이라는 분이 이 정리에 대해서 당연히 알 것이고 이것을 반영했겠으나, 결국 "참"에 대해서 이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겠냐에 대해서는 의견의 소지가 있습니다. 귀속된다고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냐는 것이죠.

둘째로, "파악"과 "판단"이라고 할 때 제가 먼저 떠올린 것은 데이빗슨의 아크라시아 개념입니다. 저는 데이빗슨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아크라시아로 볼 때 (지금과 같이 참과 거짓, 귀속의 여지와 관련이 없이) 그것이 합리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먼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크라시아가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선 더 강한 주장이 필요할지도 모르고요.

사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능력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사유하는 존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위해서 결국 보충한 논변은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이다"라는 어떤 분석철학자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저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이나 거짓은 명제에 귀속되는 속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또다른 분석철학자를 찾아낸 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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