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칭, <세계 끝의 버섯>, 자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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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세계 끝의 버섯 (aladin.co.kr)

제가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무엇이라 분류할지 참 난감합니다. 직접 관찰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지식를 전달해주는 민족지일까요? (혹은 그 민족지를 통해 어떠한 이론을 도출하는 전형적인 인류학 저서일까요?)

그러기에는 저자인 애나 칭은 특별한 "이론"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송이버섯과 송이버섯이 자라는 숲의 생활사 - 이걸 채집하는 아시안 아메리칸 공동체 - 이걸 전달받아 소비하는 일본인. 이 송이버섯의 전달망을 중심으로, 여러 인류학적 (혹은 환경 인문학적) 자료들을 제시하지만, 이 내용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수렴한다...보긴 어려워 보입니다.

그저 애나 칭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 그 사건들에 적응하려는 나름의 조직/패치들의 활동, 그로 인해 생기는 연결망 등등을 "기술"하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애나 칭은 이러한 연결망을 '기술'하려 노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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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부제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리고티의 책을 소개하면서 적은 말이지만, 오늘날의 "시대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면)은 종말인 듯합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여러 대안적 사회주의들이 주창되었지만, 어느 것도 그럴싸하게 들리지는 않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히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자본주의라 불리는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열심히 지구를 "파괴"하고 있으며, 곧 있으면 인류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기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사방팔방에서 들립니다.

모두가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걸 막으려고 하지만 도대체 인류의 단합이라는 되지 않는 이 어리석은 상황. 여기서 어떠한 획기적인 방법도 존재하지 않고, 그저 코미디처럼 인류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런 "희망 없음" 혹은 "미래 없음"이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시대 감각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일 것 같습니다. i) 획기적인 대안적 시스템 혹은 그럴싸한 희망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상, 공허한 말 내지는 절박한 기도처럼 보일 뿐입니다. ii) 구체적인 데이터와 좁은 범위를 통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을 제시한다. (빌 게이츠나 1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노드하우스 등이 선택한 접근법이죠. 또한 환경 문제는 아니지만, 매튜 데스몬드 같은 사회학자들이 불평등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에게 방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다만 여전히 이런 "좁은 실천들"조차 작동하지 않고, 개인은 한 없이 무력한 상황에 놓이다보면 이 역시 공허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애나 칭은 세 번째 길을 선택합니다. iii) 지나치게 과장된 어둠을 회색 빛으로 돌려놓는 것. 생각해보면, 기후 위기는 분명 문제이지만, 그 미래는 "어느 정도 예측된 것에 불과합니다." 분명 우리의 불안과 공포는 그 종말을 과장하고 있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애나 칭은 기꺼이 자본주의 혹은 기후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은 패치/공동체들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을 하는지,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는지"에 대해서 기술하는 방법을 통해, 어떠한 가능성을, 혹은 희망을, 혹은 회색 지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고,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식의 "회복"의 내러티브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00년대 초반 인류학계에서 나름의 지분을 차지하던 담론이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민족 공동체의 상흔이, 어떻게 추모/장례 의레를 통해서 회복되는지를 다루었던 권헌익의 <학살, 그 이후>, 대서양 노예 무역으로 끌려온 흑인들이, 백인 노예주인들을 피해 숲 속으로 도망쳐서 이룬 마룬(Maroon) 공동체. 이 공동체가 어떻게 자신들에게 남아있는 아프리카의 유산을, 노예제와 아마존 정글이라는 변화된 환경에 맞게 변형시켰는지 연구한 Richard Price의 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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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칭이 분명 권헌익이나 리차드 프라이스처럼, 회복/추모/복원의 서사를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 시작 지점은 꽤 다릅니다. 권헌익이 전쟁/냉전 연구에서 시작한 관심사이고, 리차드 프라이스는 혼종성과 노예제에서 시작한 관심사이지만, 애나 칭은 환경과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한 관심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애나 칭이 명시적으로 지목한 "상대"가 a) 리처드 도킨스로 대표되는 진화유전학과 b) 자본주의 - 주류 경제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애나 칭의 대가와 같은 솜씨가 발휘됩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1) 절대 자신의 논의를 형이상학으로 끌고올라가, 미심쩍은 유사과학이라는 혐의를 받지 않게 만들고 2) 자신의 주장이 주류 과학/경제학에 대한 "전복"이 아닌, 그 학문들이 무관심하게 넘긴 지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주지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넌지시, 그들이 넘긴 지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하죠.)

이제부터 책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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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프롤로그/에필로그와 인터루드처럼 이 두 부분 군데군데에 들어와서 일관성을 깨트리는 양념 같은 내용들도 있지만요.)

1부 남은 것은 무엇인가? - 2부 진보 이후 ; 구제 축적은 아주 넓게 보면, 미국 오레건주의 숲에서 여러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수확된 송이버섯이 어떻게 일본으로 수출되는지, 그 과정에 참여하는 여러 참여자들의 "가치관/세계관/멘탈리티"에 대한 분석입니다.
기본적인 틀은 각 참여자들이 "우발성"을 강조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에서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경제 활동 이면에 존재하는 여러 가치관들을 분석하는 경제 인류학적 작업에 가깝습니다. (또한 인간의 개입이라는 요소조차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품어가는, 일종의 환경 인문학적 작업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내용은 후반부 파트에서 보다 더 강조되는 내용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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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간략하게, 저자가 선택할 "관점"을 소개하는 인트로에 가깝습니다. i) 자연과 인간은 서로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변형시킨다. ii) 이 과정을 통해 산출되는 결과는 어떠한 행위자(들)이 단일한 의도라 보기 어렵다. (즉, 인간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자연을 변형시키곤 하지만, 항상 예기치 못한 것들이 그 변형에 끼어들고, 따라서 미래는 이들의 개입에 의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iii) 나는 이러한 영향 관계의 단위를 "배치"라 부르겠다.

(여담 ; 여기서 제가 "관점"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은, 저자가 이 내용을 "어떤 층위에 놓을 것인지" 확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유물론에서는 이를 "형이상학"으로 놓고, 새로운 진리/실체라 주장합니다만, 저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저자는 굳이 이를 형이상학의 영역으로도, 아니면 [구성된] 이론의 영역으로도 놓지 않고, 그저 상황을 분석할 툴/관점이라는 매우 유연한 입장을 선택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여러 "강한" 주장들에 따라올 수 있는 기존 학계의 반발들을 영리하게 피해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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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2부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버섯 채집이 참여하는 몽-미엔계, 라오계, 캄보디아계 난민들 출신자들, 백인 아웃캐스트들, (오래전에 넘어온) 일본계 참여자들이 i) 왜 버섯 채집에 참여했는지 (일본계의 경우, 일본적 내셔널리즘이라는 관념에서, 몽-미옌/라오계는 정글 생활에서 갑자기 미국으로 던져진 난민이라는 상황에서, 먹고 살 방법이 이것 밖에 없었으므로, 백인 아웃캐스트들은 미국이라는 주류 사회에 대한 환멸로 자유를 얻으려는 자급자족의 방편으로.) ii) 표준적인 "이익 - 이익을 위한 경제 활동"이라는 (경제학의) 보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문화적 가치들" (예컨대, 동남아시아 난민계 채집인들에게, 버섯 채집은 "고향의 풍경을 상기시키고, 자신들의 자유를 통한 자긍심을 회복시켜주는 활동"이기에, 대도시에서의 일용직이 더 안정적이고, 평균적 수익이 더 많더라도 버섯 채집 활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다.)(또한 공평함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중요한 가치"이지만, 집단마다 무엇을 공평하다 생각하는지는 꽤 다르다.)(또한 일본에서 송이버섯은 선물로 거래되기에,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를 언급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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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와 4부는 꽤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 오리건주와 핀란드의 숲, 일본과 중국의 숲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송이버섯 생산지가 되었는지, 각각의 인간들이 "꽤 다른 목적"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지금도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백과사전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컨대,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숲의 자생력을 믿고 개입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 결과 오히려 [원주민들의 주기적 산불로 형성되었던] 거대한 숲들이 사라지고, 고만고만한 관불과 송이버섯 숲이 생기고 말았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적극적으로 숲에 개입하는데, 이는 나무를 제거해서, 영양분이 부족한 곳에서 자라는 송이버섯 지대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러한 개입은 미국적 입장에서 보자면, 환경 파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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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i) 조각조각난 지엽적인 사례들의 백과사전식 나열은 흥미롭지만 (ii) 새로운 관점이나 이론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그냥저냥 밍숭맹숭한 익숙한 이야기다. (iii) 다만 저자의 다층적 목적인 학술서-어떤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책 - 위안을 위한 책이라는 의도(라 여겨지)는 것은 꽤 잘 달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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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를 위시로 한 인류학 계열에서는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은 구성이기는 합니다. 비인간행위자를 도입하고 현대는 인간행위자와 비인간행위자의 하이브리드로서 그 두 행위자 모두에게 예기치 않은 형태로 나와있다고 보기는 하거든요.

오히려 특이한 지점은 Mandala님이 말하셨듯이 비형이상학적 논의로 전체 논의를 이끌어간다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신유물론에 대응하는 인류학에서의 논의는 '존재론적 전회'라고 불리는데 적어도 최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론적 색깔이 짙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2013, How Frest Think)가 학계에서 화제작이었으니까요. 애나 칭의 작품과 몇 년 차이가 안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애나 칭이 왜 이런 노선을 택했는가가 꽤 중요할 것 같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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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독하지는 않았지만......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긴 했습니다. 온갖 인용문들로 권위의 갑옷을 칭칭 감았긴 하지만....애니미즘을 통한 인간 - 비인간 생물의 "동일성"이라 해야할까요,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한지 잘 모르겠더군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리뷰에서나 최근 댓글에서도 살짝 드러난 생각이지만

학술계나 인간이 가진 "언어"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 감각(perception)이라던가 판단(judgement)라던가....이런 "해방"은 분명 의의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지각과 문어의 지각이 "동일한 종류다."라는 결론에는 도달하진 않을텐데, 어느 순간 논의가 이렇게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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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장기적으로는 푸코를 위시한 사회구성론 - 젠더/소수자적 관점이 텍스트/현상 연구에 "필수적인 관점"이 되었듯,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인 관점"으로 흡수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과정에서 존재론-형이상학적 논의들이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환경 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이라는 거대한 분과가 형성되고 있고, 이 분과의 논의는 신유물론 - 라투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지만........저는....이게 좋은 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제 이론 다음의 "먹이감"처럼 보인다면.....너무 악평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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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희망, 미래 없음"은 마크 피셔부터 70년대의 오에 겐자부로까지 많은 현대 작가에 의해 사유된 문제 같습니다. 다만 그 어떠한 철학자와 문학가도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의 최선은 "구체적인 데이터와 좁은 범위를 통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듭니다. 사태가 정말 그러하다면 여기에 인문학의 자리는 없거나 턱없이 작을 텐데, 최근 문학계가 보편적인 사회 문제 대신 개인적인 몸의 문제(아니 에르노의 오토픽션과 기타 페미니즘 문학)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소리(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욘 포세) 등에 주목하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어쩐지 인문학의 역할이 데이터가 건드리지 않는 분야로만 한정되는 듯해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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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투르하고는 다른 방식이지만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트루는 다자연주의를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기존의 우리는(2세대 인류학 또는 문화주의적 인류학) 문화가 여러 개고 자연이 하나라는 관점에 입각해 생각해 왔는데 관점을 바꿔서 문화가 하나고 자연이 여러 개라는 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인간뿐이고 동물도 문화를 향유하니 동물도 인간이라는 논증을 냈습니다. 이게 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한눈에 보이지만 인간 개념의 외연 확장을 통하여 인류학의 재구조화를 꾀하는 것이라 보면 못받아줄 정도는 아닙니다.

이는 문화적 차원에서만 고려된 것입니다. 지각이나 판단이 인간과 문어가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중요한 것은 둘이 문화가 같아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퍼스의 기호학 이론을 통해 이 주장을 정교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해야 할 비판은 그래서 정말 문화가 하나냐는 것일 겁니다.

(2) 존재론에 입각해서 보면 사회•문화적 인간과 자연물(단지 비인간 생물 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포함하는)을 하나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게 경계를 무시하고 넘어간 일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들은 생태적 위기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대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애나 칭의 이런 저작이 나왔다고 할 수도 있고요.
사회구성주의에 속하는 사상도 수없이 쏟아졌지만 살아남은 것은 푸코 정도 뿐이니 이들 중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몇 개 안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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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늘 매진인 상황이라(..) 이렇게나마 내용을 접하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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