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층위가 구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cottoncandy님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제기한 문제 자체는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실제로, 비개념주의자들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와 같은 하이데거의 논제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수학은 언어를 벗어나는 사유 아닌가?"와 같은 의문 및 그와 관련한 댓글들은 다소 논점이 어긋나 있습니다. 아마도 하이데거를 비롯한 20세기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이 왜 언어라는 주제에 각별하게 주목하는지가 정확히 이해되시지 않으셔서 문제에 잘못 접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1.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논증하지 않았다.
우선, 제대로 지적하신 것처럼,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justification)'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술(description)'하고 있을 뿐입니다. 애초에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 저술입니다. 현상학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대상을 탐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대상에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특징들을 포착해내어 제시하는 작업이 현상학적 탐구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와 같은 현상학자들의 텍스트에서는 직접적인 논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폴트(Richard Polt)가 이 점을 자신의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폴트의 책 Heidegger: An Introduction , Ithaca, N.Y. :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p. 39의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논증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하이데거의 글에서 결함인 것은 아닙니다. 가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와 같은 시구가 논증이 아니라고 해서, 이 시구가 무조건 '틀렸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상학적 글쓰기는 일종의 시적 글쓰기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닙니다. 독자가 그 글이 드러내고자 하는 통찰에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에 따라 그 글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아닌지가 크게 좌우됩니다.
그래서 사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처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철학적 논의들이 어떤 논증을 통해 뒷받침되는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하이데거보다는 (a) 하이데거 계승자들의 논의, (b) 하이데거에 대한 영미권 연구자들의 논의, (c) 1960년대 이후 후기 분석철학자들의 논의를 찾아보시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하이데거가 번뜩이는 통찰로 제시한 논의들을, 이 사람들은 보다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해설합니다.
2. 왜 철학자들은 언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가?
20세기 이후 철학에서 언어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세계를 결코 순수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논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즉,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곧 언어다."(가다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캉),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데리다)와 같은 논제들은 모두 우리의 인식이 언제나 특정한 배경과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아마도 cottoncandy님은 '언어'라는 것으로 한국어나 영어 같은 제한된 형태의 문화적 질서만을 떠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언어'에는 그런 형태의 언어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논의가 더욱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언어'란 사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상정한 '현상/실재', '주체/객체', '기표/기의', '마음/세계' 등의 이분법에서 '현상', '주체', '기표'의 영역에 해당하는 모든 요소들입니다. 즉, 언어학에서 다루어지는 제한된 상징 형식을 넘어서, 그동안 철학이 "그건 단순히 너의 선입견이잖아?", "그건 그냥 문화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은 아니잖아?", "그건 현상일 뿐이지 실재와는 무관하잖아?"라고 폄하한 모든 것이 '언어'로 통칭됩니다. (그래서 데리다의 경우에는 어느 인터뷰에서 "텍스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이라고 답하면서 "원자폭탄도 텍스트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 모든 것이 '언어'라는 이름 아래에 묶이는지는 여기서 설명드리기에는 너무나 길고 복잡합니다. 간략하게만 말하자면, 우리가 그동안 순수하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한 지식들이 언제나 특정한 '관점'이나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고, 특정한 '개념 틀'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고, 특정한 '규범'이나 '규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 언어적 전회를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이런 '관점', '태도', '개념', '규범', '규칙', '맥락' 따위를 모두 통칭하는 말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수학은 언어를 벗어난 사유 아닌가?"라는 식의 질문들은 다소 논점을 벗어나 있습니다. (더욱이, 반드시 철학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수학의 기호나 계산이나 증명 등이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져 있다"라는 갈릴레이의 유명한 말처럼 수학은 수학자와 과학자들에게조차 일종의 '언어'라고 당연하게 여겨지니 말입니다.) 핵심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한지에 있습니다. 모든 사회-문화적인 관점, 태도, 개념, 규범, 규칙 등을 벗어나서, 실재를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들 철학자들을 비판하시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탈맥락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 20세기 철학에서 일어난 언어적 전회의 이유와 양상에 관현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29898421
https://blog.naver.com/1019milk/220617878453